프롤로그: 예비창업자의 특권

창업의 파도를 만나기 전에

by 정텔러

1. 블랙코미디


1970년대 서울, 종로 피카디리 극장. 한 영화 흥행 기획자가 타임머신을 타고 2020년대 미래에서 도착했습니다. 몰래 가져온 마블의 <어벤져스> 필름을 영사기에 겁니다. 그는 확신에 차 있습니다.


"이건 미래에서 수십조 원을 벌어들인 전설의 걸작이야. 다들 뒤집어지겠지? 크크크."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흐음…


글쎄요.

그가 기대했던 환호가 터질 수도 있지만, 어쩌면 여기저기서 비명 소리가 들릴 수도 있을 것 같네요.

구체적인 장면을 묘사하면 여러분의 상상력 발휘에 방해가 될 수도 있으니, 각자 생각해 보는 걸로 하시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어느 쪽으로건 소동은 일어난다는 겁니다.

충격과 흥분, 경악과 공포, 기타 등등.


이번에는 거꾸로 생각해 볼까요?

태권브이의 김청기 감독이 타임머신을 타고 현대로 오시는 겁니다. 그리고 당신의 인생명작 태권브이를 GCV에서 상영하는데 성공을 하시는 거죠.


뭐, 원래 상상이라는 게 그런 거잖아요?

마음 속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쌍욕은 잠시 접어두시고, 그냥 한번 해보시자구요.


사전 정보 없이 ‘어마무시한 명작’이라는 홍보에 속아서(?) 온 관객들이 있습니다. 과연 그들은 수십 년 전 스타일의 태권브이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할까요?

이후 장면도 역시 여러분의 상상에 맡겨봅니다.


책을 시작하며 이런 상상으로 예비창업자 여러분들께 던져보려는 화두가 있습니다.


바로 ‘눈높이’와 ‘맥락’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저는 두 개 극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인지부조화의 블랙코미디를 오늘날 대한민국의 수많은 창업 현장에서 자주 목격합니다.


꼭 판교의 여러 기술 스타트업 창업 현장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여러 시행착오 끝내 개발한 '비법 소스'로 외식 브랜드 식당 창업을 준비하는 분,

*성수동 가죽 공방 작가님이 밤을 새워 한 땀 한 땀 꿰맨 '수제 가방',

*오랫동안 연구해 온 건강 회복과 유지 비법을 가진 건강용품 개발자,

*비즈니스 시험대에 오른 법조인과 의료인, 그 외 여러 전문직 창업가들,

*1인 셀러의 길을 선택하고 전 재산을 털어 소싱해 온 '아이디어 생활용품',

*기타 등등 소중한 삶을 걸고 열정을 불태우는 수많은 분들과 아이템들...


이 모든 창업 주체와 아이템이 당사자들에게는 세상을 놀라게 할 '어벤져스'이자 ‘태권브이’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시장의 반응은 냉담합니다. 소비자는 무관심하게 스크롤을 넘기며, 야심 차게 오픈한 가게는 파리만 날립니다.


자신만만하게 창업을 해버린 대표님은 하루하루 초조함이 더해갑니다.


"내 물건, 내 서비스...
진짜 좋은데
돈을 내게 할 방법을 모르겠어."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각종 프랜차이즈를 선택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 분들에게도 이런 현실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성공은 그저 운 좋은 놈의 것이라는 생각만 커져 가는데요.


그러다가 창업자의 이야기를 어찌어찌 잘 포장하면 손님이 줄을 선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퍼스널 브랜딩이라는 것도 배워보고 스토리텔링도 시도해 보지만, 결과는 그렇게 쉽게 나오지 않습니다.


최소한의 전략은 고사하고,

창업자와 소비자의 눈높이의 차이가 큰데다가,

소비자의 마음을 움직일 전후 맥락도 준비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가고 움직일수록 깊숙하게 빠지게 되는 창업의 늪에 서게 됩니다.


그래도 어차피 당겨진 창업 시위, 날아가는 생존 화살 위에 앉아 있는 현실.

뭐라도 해야 하잖아요. 매일 살아내기는 해야 하니까요.


소비자의 지갑을 열고 고객으로 만드는 법을 모르니,

결국 많은 분들이

조금 쉬워보이는 돈줄을 찾아 눈을 돌립니다.


시장과 소비자를 설득할 전략과 역량을 키우는 대신,

생존을 위한 정부 창업자금과 운전 자금을 따내는 작업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사업의 본질이 '고객 창출'이 아니라 '지원금 사냥'으로 바뀌는 출발점이 되는 순간입니다.


지원금 쉽게 타는 각종 노하우 강의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하면서,

상품의 소비명분 보강과 고객 설득자료 기획 대신

투자 설득과 지원금을 위한 발표자료 연구에만 골몰합니다.


시트콤으로 만들면 ‘프렌즈’나 ‘빅뱅이론’ 급의 대박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은 대한민국 창업 시장의 '웃픈' 단면입니다.


‘그렇게라도 버티는 놈이 이기는 거야.

버티다보면 언젠가는 대박이 터지고,

나도 멋지게 엑싯을 할 거야!’


수많은 창업자들이 이런 로또 스타일 환상의 늪에 빠져 허우적 거리다가,

결국 사업을 접고 맙니다.


2. 스토리텔링 세상의 팜므파탈


저도 소통이 중요한 거 압니다.
그래서 스토리텔링 책도 읽고 강의도 들었어요.


직업 덕분에 이런 말씀을 하시는 창업자를 항상 만납니다.


사실 그 분들은 죄가 없습니다. 열심히 노력을 했을 뿐이죠.

서점가에 깔린 작법서를 읽고, 유명 작가의 특강을 쫓아다니며 '영웅의 여정'을 배웠을 뿐입니다.


우리 나라는 비즈니스 스토리텔링에 대한 이해와 체계가 아직 잡혀있지 않은데요.

문화와 산업 구조의 특성 때문인데, 이 주제는 나중에 따로 다뤄보겠습니다.


아무튼, 현재 만날 수 있는 기존의 스토리텔링 교육은 대부분 '창작 스토리'에 관한 작법 이론입니다.

문학이나 시나리오 작법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방법론(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수준이지만) 입니다.

가르치는 분들도 문학 작가 출신이 많고, 비즈니스 현장에서 뛰는 분들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소설이나 영화는 독자와 관객을 몰입시키고 감동을 주고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만들죠.

이것은 문화예술의 영역입니다.

저는 이것을 '선불제 스토리'라고 부릅니다.


선불제 스토리 세상의 관객은 이미 티켓값을 지불했습니다.

돈을 냈으니 이제 나를 감동시켜 보라며 자리에 앉아 있죠. 창작자는 그 기대에 부응해 감동과 재미를 주면 됩니다.


하지만 비즈니스 스토리텔링 세상은 전쟁터입니다. 철저하게 '후불제 세상'이죠


그 세상의 소비자는 아직 지갑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 세상의 투자자는 아직 입금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팔짱을 끼고 당신의 이야기를 먼저 듣습니다.

이야기가 끝난 뒤에야 비로소 당신이 원하는 행동을 할지 말지를 결정합니다.


'후불제 스토리' 세상의 기본 법칙입니다.


그래서 그 세상의 스토리텔링 목적은 '감동과 재미', 그 자체가 아닙니다.

단 하나의 목적은 소비자의 지갑을 여는 '후불 결제’를 이끌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응원하는 고객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어렵게 노출시킨 내 상품과 서비스에 돈을 쓰게 만드는 것
투자자가 내 회사에 수억 원을 송금하게 만드는 것.
배달 앱을 켠 손님이 수많은 경쟁 가게를 제치고 내 가게를 클릭하게 만드는 것.
유능한 개발자가 대기업을 마다하고 우리 스타트업에 지원서를 쓰게 만드는 것.



철저하게 상대방의 판단에 영향력을 발휘해서 지갑을 열게 만드는 설득과 전략의 영역입니다.


기관총이 빗발치는 전쟁터에 나가는데, 예쁜 꽃밭을 가꾸는 호미를 들고 나간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것이 창업을 준비하는 당신이 앞으로 마주하게 될 수많은 스토리텔링 강의와 관련 콘텐츠의 현실입니다.


냉혹한 비즈니스 전쟁터의 생존법을 알려줘야 하는 곳에서,

문화센터 교양 강좌나 작가 지망생을 위한 수업에서나 들어야 할 시나리오의 거장 '로버트 맥기'의 이론을 듣습니다.

시나리오 작법의 바이블이라는 '고양이를 구하라(Save the cat)' 공식을 배웁니다.

"왕이 죽고, 슬퍼서 왕비도 죽었다"는 예시를 들으며 스토리와 플롯의 차이를 외우게 됩니다.

창업자들은 스토리와 스토리텔링의 차이를 들으며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아하!'를 연발합니다.


물론 훌륭한 이론과 설명입니다. 하지만 내 회사, 내 가게의 월세를 내거나 직원의 월급을 마련하는데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겁니다.

영화를 만들거나 소설을 쓸 게 아니라면, 그 이론들은 창업가에게 그저 '예쁜 장식품'으로 남을 확률이 매우 높은데요.


그 예쁜 함정에 빠지지 마십시오.


그것은 성공을 꿈꾸는 창업자들이 기필코 극복하고 넘어야 할,

아주 그럴듯하게 포장된 '예뻐서 치명적인 함정'입니다.


제2의 인생을 꿈꾸면서 창업을 준비하고 계신가요?


그렇다면 앞으로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소설 작법이 아니라 비즈니스 스토리 전략입니다.

감동이 끝이 아니라, 당신이 원하는 행동을 끌어내야만 끝이 나는 '스토리 커뮤니케이션 능력'입니다.

투자자의 지갑을, 소비자의 클릭을, 인재의 지원서를 끌어내는 '후불제 스토리'의 설계법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스토리 전략과 커뮤니케이션 설계 능력이 더욱 빛을 발하는 인공지능 시대가 찾아왔습니다.


3. AI 시대에 더욱 빛나는 스토리텔러의 사고법


지금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도구인 인공지능과 함께 사는 세상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몇 줄만 입력하면 그럴듯한 사업계획서, 홍보 문구, 로고가 단 몇 초 만에 만들어지는 세상입니다.

누구나 칠팔십점짜리 '어벤져스'를 만들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창업가는 스토리텔링 공부를 안 해도 될까요?

원하는대로 모두 만들어주는 인공지능이 있으니까요?


진짜 그런가요?


조금만 생각해보시면 완전히 정반대 상황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을 겁니다.



기술이 평준화될수록, '무엇을', '왜','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의 가치는 높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화려한 CG로 떡칠 된 영화가 더 이상 무감각하고 재미없는 이유는 너무 흔해졌기 때문입니다.

그것만의 '영혼'과 이어져오는 '맥락'이 없기 때문입니다.


AI가 쏟아내는 수많은 콘텐츠 속에서 당신의 회사, 당신의 브랜드가 살아남으려면 공개되는 화려함 뒤에 숨겨진 '설계도'를 보고 그릴 줄 알아야 합니다.


청중의 눈높이는 이미 하늘에 닿아 있습니다.

그들은 이제 알아볼 수 있는 눈을 가졌고,

어지간한 스토리에는 반응하지 않는 무감각 지수도 충만합니다.


만들어낸 스토리텔링보다 진정성이 중요한 거 아니야?!


맞습니다. 기술이 발달할수록 흔히 말하는 진정성은 분명 강력한 비즈니스 무기가 되는데요.


하지만 그 진정성조차

전략적으로 설계되고,

세련되게 전달되지 않으면


그저 촌스러운 태권브이 취급을 받거나 소음으로 묻혀버리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제
'스토리텔러의 사고방식'
그 자체를 장착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기술 측면은 AI가 채워줄 수 있지만, 판을 짜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획은 오직!

자연산 인간인 당신만이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4. 예비창업자의 특권


이 책의 제목은 <창업스토리텔링 예습>입니다.

창업 스토리텔링은 벼락치기가 통하지 않는 영역입니다.

월세 낼 돈이 없어 쫓기듯 올린 할인 행사, 발표일 전날 밤까지 급하게 만든 피치덱으로는 원하는 반응을 지속적으로 얻어내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반가운 소식도 있습니다.


스토리텔링 역량은 타고난 재능이 아니라는 겁니다.

근육처럼 훈련하고, 학습하고, 미리 준비하면서 키울 수 있는 암묵지에 속하는 역량이죠.


앞으로 이 책을 통해 여러분이 만나게 될 내용은 스토리텔링 이론이나 문학작법 수업이 아닙니다.

창업 후 당신에게 찾아올 현실에 대한 '실전 대비 지침'입니다.


예비창업자에게는 당장 내일의 매출을 위해 자신과 직원을 닦달해야 하는 절박함이 없습니다.

사실 이것은 꽤 괜찮은 기회이자 특권입니다.

전쟁터에 나가기 전에 기초를 아주 탄탄하게 닦을 수 있으니까요.


예비창업자의 이런 특권을 적극 활용하세요.


제대로 배우시고 제대로 익히셔서,

1980년대 극장으로 날아간 이방인이 되지 않으시면 좋겠습니다.

수십 년 전 콘텐츠에 사로잡힌 억울한 노장도 되지 마시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부으며 지원금과 정부과제만 찾아 헤매는

'창업 시트콤 속의 사냥꾼 주인공'이 되지 마십시오.


당신의 소중한 아이템과 사업 아이디어 그리고 열정과 소망이

미래의 고객에게 온전하게 전달되고,

그들에게 당신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게 만들고,

기꺼이 그들의 지갑을 열게 할 수 있도록!


지금부터 저와 함께 그 실무 방법을 익히고 맥락을 만드는 '예습'을 시작해 봅시다.




저는 20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치열한 비즈니스 현장에서 살아온 프로 스토리텔러입니다.

제 경험과 생각 중에서 창업을 꿈꾸는 분들이 꼭 아셔야 하는 주제와 실무 내용을 엄선해서 들려드릴게요.


당신은 아직 창업의 항해를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아직 침몰을 걱정하지 않으며 잠들 수 있습니다.


여유를 가지고 즐겨보세요.

스토리텔링 파워를 미리 당신의 것으로 장착할 수 있는

예비창업자만의 바로 그 특권을.



목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