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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윤영 Jun 22. 2022

여덕이 된다는 것

*'여덕'은 여자아이돌의 여성팬을 의미




얼마 전 시작된 예능프로그램이 매주 화제가 되고 있다. 네 친구가 캠핑카를 타고 여행을 떠난다는 다소 단순한 포맷의 예능 프로그램인데, 이 예능이 연일 화제를 끌어모으는 이유는 하나. 주인공이 ‘핑클’이기 때문이다. 90년대 말 데뷔하여 2000년대 초반까지 대한민국을 ‘넌 내꺼야’ 열풍에 빠트렸던 (프로듀스 101의 나야 나 신드롬과 견주어도 될 정도라 기억한다.) 핑클은 내 또래 보다는 언니 오빠 세대에게 좀 더 익숙한 아이돌 가수다. 핑클빵까지 발매하며 전무후무한 인기들 누렸던 언니들의 전성기 때 나는 8살이었지만, 또래 친구들 보다는 언니 오빠들과 어울렸던 덕에 핑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우리 윗집에 살던 사촌언니의 책상에 깔린 데스크매트의 주인공은 이효리였고, 사촌오빠의 책받침(당시에는 이런 문구점 굿즈가 인기의 척도며 유행이었다.)은 몇 년간 성유리가 차지했다. 




사촌언니를 맹목적으로 좋아했던 나는 언니가 좋아하는 이효리도 덩달아 좋아하기 시작했으며, 슈퍼에 가서 빵을 살 때마다 핑클 얼굴이 박힌 것을 샀다. (핑클이 광고한 ‘패스트푸드’라는 게임도 구매했다.) 언니들이 사다보는 청소년 잡지도 열심히 사서 읽었다. 당시 잡지들은 구독자들이 잡지사로 직접 엽서를 보낼 수 있었는데 (이게 핵심 코너 중 하나기도 했다.) 내용의 대부분은 펜팔 친구를 구한다거나, 이효리가 입은 청바지를 벼룩한다는 것들이었다. 벼룩이니 펜팔이니 하는 말들은 통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그래도 열심히 읽었다. 하지만 영원한 것은 없다는 어느 노래 가사처럼 사촌 언니네는 이사를 가버리고, 핑클은 각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나의 첫 덕질은 그렇게 끝이 났다.





두 번째 덕질이 시작된 것은 06년이었다. 당시 나는 무서울 것 없다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으며 집에 붙어있는 시간보다 밖에서 친구들과 돌아다니는 시간이 월등하게 많았다. 그런 내가 어쩌다 엠티비를 보게 된 것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동방신기 뮤비를 보고 싶어서 틀어두었던 것 같다. 그런데 나오라는 동방신기 뮤비는 안 나오고 난생처음 보는 여자애들이 나왔다. 핑크색 후드티를 입고 머리를 바짝 올려 묶은 여자애가 앞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여자애와 떠들고, 단발머리를 한 여자애랑 장난을 치다가 춤을 추고 그랬다. 알고 보니 그 프로그램은 걸그룹 데뷔 준비를 하는 리얼리티였고, 요즘처럼 재밌고 귀여운 편집이 유행하기 전이어서 그랬는지 어쨌든지 하여간 되게 재미가 없었다. (흡사 인간극장 같았다.) 떡볶이를 해먹겠다며 슈퍼에 들리고, 감기에 걸렸다며 콜록거리고, 학교에 갈 준비를 하는, 지금 생각해보면 재미있을 수가 없는 내용들 뿐인데 나는 그걸 몇 번이나 보았다. 그리고 프로가 끝이 났다. 프로가 끝이 나고 나니 매주 보던 여자애들과 순식간에 단절되었다. 단절되고 나니 마음 한 구석이 꼭 얹힌 듯 갑갑하고 답답했다. 보고 싶어서 그랬던 거였다. 정말이지 나는 그 여자애들이 너무 보고 싶었다. 그래서 매일 네이버에 ‘원더걸스’만 검색했다. 그리고 07년 2월. 소녀들이 돌아왔다. 원더걸스가 데뷔한 것이다.





 


여덕이 된다는 것





핑클은 언니가 좋아해서, SES도 언니들이 좋아해서, 보아는 매일 뉴스에 나와서 알게 되고 좋아하게 되었지만 원더걸스는 아니었다. 누구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에 알게 되고, 나 때문에 좋아하게 되었다. 아직도 기억이 난다. 팬카페가 생기길 기다렸다가 가입을 했고, (내가 12번째 멤버였다.) 처음 본 공지가 원더걸스의 첫 스케쥴에 (라디오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과자를 보내주자는 내용이었다. 꼼꼼히 공지를 읽고 시키는 대로 선물도 보내고, 편지도 쓰고, 사진도 줍고, 당시 유행하던 다음 판에도 게시글 몇 개를 올리며 나는 여덕이 되었다. 데뷔곡 ‘아이러니’는 눈에 띄는 성과를 내지 못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텔미가 데뷔곡인줄 알았다.) 후크송의 아버지 제왑삐의 손을 거치사 ‘텔미’로 돌아온 원더걸스는 그야말로 대박을 터트렸다.




내가 원더걸스를 좋아한다고 하면 ‘누구?’ 라고 하던 친구들이, 이제는 소희가 예쁘니, 선예가 예쁘니 떠들기 바빴으며 티비에 나오는 모든 남자연예인들이 원더걸스를 이상형으로 꼽았다. 전국민에게 ‘어머나’ 열풍을 일으키고 할머니부터 할아버지까지 ‘노바디’를 외치게 만든 원더걸스는 3연속 히트를 치며 명실상부 최고의 걸그룹으로 떠올랐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덕질도 평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원더걸스는 노바디 활동을 끝내자마자 미국행 발표를 했다. 나는 미국이 얼마나 먼지도, 이 시간이 길어질지도 몰랐기 때문에 그때는 웃으며 보내줄 수 있었다.




원더걸스가 미국에서 투어버스를 타고 전역을 돌고 있을 때, 한국에서는 소녀시대가 대박의 대박을 터트리며 최고의 걸그룹으로 자리매김했다. 티비만 틀면 소녀시대가 나오고 남자연예인들의 이상형도 슬슬 윤아나 유리로 바뀌었다. 나에게 선예가 제일 좋다고 했던 짝꿍은 어느 순간부터 태연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나는 원더걸스도 아니면서 배신감에 부들거렸다. 지금 생각하면 유치하기 짝이 없지만, 당시에는 인터넷은 물론이고 뉴스까지, 온 세상이 원더걸스와 소녀시대를 비교해댔기 때문에 덩달아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다. 원더걸스가 ‘투디티’(투 디프런트 티어)로 깜짝 컴백을 하기 전까지 공백기는 계속되었다. 그 공백기에는 많은 일이 있었다.




선미가 활동중단을 선언했다. 말이 활동중단이지, 당시에는 탈퇴 선언과 다를 바가 없는 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고작 열 몇 살 여자애들이 학교도 그만두고 미국에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어 마음이 짠한데, 그때의 나는 원더걸스보다 더 어렸고, 갑자기 시작된 생이별에 마음이 넝마가 된 상태였다. 그래서 선미의 활동중단에 그냥 쇼크만 받았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팬카페에서는 선미가 잘했니 못했니, 국내컴백을 할 거니 말 거니 기타 등등의 이유로 매일 싸워댔다. 거기다가 연예 기사면에는 잊을만 하면 <원더걸스의 쇠락> 이라는 자극적인 타이틀이 걸린 기사가 나왔다. 혜림이 새 멤버로 합류하던 날, 원더걸스는 맨날 탈퇴하네; 라는 악플 아닌 악플이 달렸고 나는 모니터를 부여잡고 한참을 울었다. 온 세상이 내 마음을 구렁텅이로 밀어 넣고 있었다. 이제 원더걸스 안 좋아할 거야. 나는 일기장을 부질없는 다짐으로 가득 채웠다.




휴덕은 있어도 탈덕은 없다고 누가 그랬던가. 11년, 원더걸스가 ‘비 마 베이비’로 국내 컴백을 확정지음과 동시에 집 나갔던 내 마음은 신속히 복귀했다. 원더걸스는 화제성과 콘셉트만 있는 그룹이니, 음악성은 기대할 수가 없니 등등의 편견을 깨부수는 앨범이었다. (평론 웹진은 IZM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캐롤 느낌의 ‘비 마 베이비’는 물론 수록곡들까지 널리 사랑을 받았으며, 평가하기 좋아하는 안티들을 놀리듯 돌아온 원더걸스는 당당히 음악 방송 1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7개월 뒤, 원더걸스는 ‘라이크 디스’를 필두로 컴백을 했다. 예은이 만든 자작곡 ‘걸프렌드’와 ‘R.E.A.L’은 널리 사랑을 받았다. 원더걸스의 새로운 챕터가 열리는 걸까, 기대감에 가슴이 부풀었다.




선예가 결혼 발표를 했다. 연애하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컴백 후 진행된 토크쇼에서 연애 사실을 밝혔기 때문이다. 언니는 프로그램의 이름처럼 ‘강심장’이었다. 어쨌거나, 연애를 한다는 것과 (연애 이야기는 못 본 척하면 되니까.) 결혼을 한다는 건 처음부터 끝까지 다른 차원의 이야기였다. 결혼이라니. 결혼이라니! 나는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어떻게 컴백했는데. 어떻게 기다렸는데. 할 수 있는 게 우는 것 밖에 없었다. 영원히 결혼을 하지 말고 아이돌로 남아라, 같은 소망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런 건 애초 바라지도 않았다. 내가 슬펐던 것은 원더걸스가 끝이 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남자들은 결혼하고도 잘만 활동하지만, 결혼 이후에도 그룹 활동을 이어가는 걸그룹은 없었다.




여덕은 여자 아이돌을 좋아하는 여성 팬을 지칭하는 말로 온갖 편견에 시달리기 마련이다. 가장 대표적인 편견이 바로 이것이다. ‘넌 여잔데 왜 여자를 좋아하니?’ 남자 아이돌을 좋아할 때는 한 번도 받지 않았던 질문인데 (묻더라도 ‘어떤 면 때문에’ 좋아하는 것이냐고 묻지, 대체 ‘왜’ 걔를 좋아하냐고 묻지는 않는다.), 여자 아이돌을 좋아한다고 밝힌 뒤에는 수도 없이 들었다. 나는 내 애정의 이유를 설명하고, 심지어는 설득시키기까지 해야 했다. 나중에는 화가 나서 ‘낸들 아나요 심장이 시켜서 사랑합디다’ 떠들었다. 선예가 결혼하던 날, 나는 집에서 선예의 기사 사진을 보며 펑펑 울고 또 울었다. 잘 어울린다는 댓글에도 울었고, 예쁘다고 하는 댓글에도 울었고, 선예의 행보를 비난하는 댓글에도 울었다. 나조차도 내가 왜 우는지, 왜 이렇게까지 우는지 몰랐지만, 어쨌든 그거 하나는 확실했다. 나는 원더걸스를 너무 사랑했다.



선예의 결혼 이후에도 원더걸스는 숙소 생활을 이어가며 돈독한 우애를 과시했고 나는 환장할 노릇이었다. 해체만 하지 않았지, 공식적인 그룹 활동은 끝이 남과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제와피는 어떠한 오피셜 입장도 내주지 않았고 팬덤의 절반 이상이 탈주했다. 소희는 연기자의 길을 걷기 위해 소속사도 옮겼다. 이 상황이 논리적으로는 이해가 되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제일 이해가 안 가는 것은 내가 아직도 원더걸스를 좋아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어쨌거나 나조차도 모든 게 끝이 났다고 생각했던 2015년 원더걸스가 돌연 컴백을 예고했다. 선미와 함께였다.




원더걸스가 4인 체제로 돌아오기 전, 선예와 소희는 손편지로 탈퇴 소식을 전했다. 요즘 말로 하면 소희는 나의 ‘최애’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 나의 영원한 ‘최애’ 소희가 원더걸스를 떠났기 때문에 내 마음도 식을 것이라 점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원더걸스를 너무 사랑했고, 그 사랑은 최애를 향한 높은 사랑보다도 크고 깊은 것이었다. 최애 없는 게 뭐 어때서. 내 차애는 원더걸슨데. 그 사실은 내게 어떠한 장벽도 되지 않았다.




4인 체제 원더걸스는 기존의 원더걸스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돌아왔다. 멤버 전원이 악기를 배웠고, 밴드 형식으로 그룹을 새로 꾸렸다. 타이틀을 제외하고는 전부 멤버들이 만들고 썼다. 3년 2개월만에 돌아온 언니들은, 너무나도 다른 사람 같았다. 그게 멋있었다. 랩과 보컬, 영어부터 중국어까지 능통한 혜림의 매력이 빛을 발한 앨범이기도 했다. 수록곡 BACK의 가사 중 ‘3년 동안 이어진 끝없는 암흑 같은 공백’ ‘다들 물어봐 하긴 하는 거냐 컴백’ ‘고인 됐다 말해’ (고인걸스라는 악플이 한동안 따라다녔다.) 라는 가사에 속이 상했지만, ‘고인 됐다 말해? 절이라도 해’, ‘우린 거인 됐지 너 밟힘 어쩔래’ 라는 가사들이 내 속을 시원하게 해주었다.



‘아이 필 유’는 대박을 터트리며, 원더걸스의 새로운 전성기를 예고했고 ‘와이 소 론리’까지 연이어 히트를 쳤다. 이대로 20주년까지 함께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염원이었다. 하지만 원더걸스는 2017년 돌연 해체를 선언하고, 각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원더걸스 해체 후 섭섭하고 공허했다는 유빈의 말처럼 나도 한동안 그 마음을 떨치지 못하고 살았다. 아무리 오랜 시간을 함께 했어도 나는 팬일 뿐이라, 내부의 사정을 다 알 수가 없었다. 어떤 이유 때문인지, 왜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 짐작가는 것은 있어도 아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게 속상했다. 해체는 하지 말지 나 기다리는 거 잘하는데 수십 번 생각했지만 혼잣말일 뿐이었다. 직장인이 된 여중생은 더 이상 울지 않았지만 그 뿐이었다.






2019년 7월 말, 원더걸스가 해체한 지 이 년이 훌쩍 넘었다. 예은과 유빈, 선미는 각자 솔로데뷔를 마쳤고 혜림은 학교에 다니며 번역가로, 작사가로 데뷔했다. 소희는 부산행을 비롯한 여러 영화에 출연하며 배우의 필모를 쌓아가고 있으며, (메모리즈 많이 사랑해주세요) 선예는 캐나다에서 아이들을 기르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때와는 다른 모습으로 여전히 원더걸스를 좋아하고 있다.




2011년 11월 7일 발매된 ‘Wonder World’의 수록곡, ‘Girls Girls’는 사랑 노래가 아니다. ‘마음이 가는 대로 따라가’ 너의 꿈과 길을 찾으라고 말하는 노래다. 나는 이 노래와 이 노래의 후렴에 등장하는 ‘Girls girls I’m a wonder girls’ 라는 가사를 제일 좋아했다. ‘할 수 있잖아’ ‘그대로 될 수 있잖아’ 라고 노래하는 언니들. 예은은 원더걸스가 어떤 걸그룹으로 기억되고 싶냐는 인터뷰 질문에, 걸그룹이 아니라 ‘그냥 원더걸스’로 기억되고 싶다고 대답했다. 그 소망대로 나는 언니들을 그냥 원더걸스로 기억하고 있다.




여덕이 된다는 건, 무한한 애정의 대상을 찾았다는 것. 닮고 싶은 롤모델이자, 내게 꿈꿀 힘을 주는 용기를 얻는다는 것. 앞으로 또 누군가를 이렇게 좋아할 수 있을까? 그건 잘 모르겠다. *






2019년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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