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Fragments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윤영 Feb 17. 2021

그 애

  열아홉, 지금의 아파트로 이사를 왔다. 입주를 시작하자마자 이사를 온 덕에 우리가 이사를 마쳤을 때는 우리 동에는 여섯 가구도 살지 않았다. ‘입주를 축하드립니다’ 라는 플랜카드가 펄럭거리는 아파트는 한산했고, 산 아래 위치한 덕에 해가 빨리 졌다. 야간 자율학습을 하던 나는 10시가 지나 귀가 하는 일이 잦았다. 후문으로 가려면 길을 조금 둘러가야 했지만, 후문에는 편의점이 있어 늘 불이 켜져 있었다. 나는 어두컴컴한 아파트가 무서워 몇 달을 후문으로 다녔다. 그날도 그랬다. 10시쯤 버스에서 내렸고, 10분쯤 지나 아파트 후문에 도착했다. 평소와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내가 인기척을 느꼈다는 것이다. 놀라 뒤를 도니 사람이 아니라 얼룩덜룩한 무늬가 남은 고양이 한 마리가 날 보고 있었다. 오랜지색과 흑색의 무늬가 얼굴부터 꼬리까지 남아있는 고양이는 나를 빤히 바라보다 수풀 속으로 사라졌다. 그게 첫만남이었다.


  동물을 좋아하지 않는 엄마 아래서 자라 햄스터 한 마리 길러본 적이 없다. 엄마는 늘 말했다. 동물은 손이 많이 간다. 먹고 살기도 바쁜데 동물까지 기를 이유가 없다. 동물을 기른 적도 없고, 평생 그 말을 듣고 자란 나는 동물에 무감한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그 일이 있고 난 뒤로는 후문이 가까워지면 주위를 살피게 되었다. 그냥 고양이가 그날처럼 서서 나를 볼 것 같았다. 다시 만난 것은 여름이 부쩍 가까워진 5월이었다. 하교를 하다 만난 것이 아니라 새벽, 편의점에 다녀오는 길에 만났다. 편의점 앞 인도에 길게 누워있는 고양이를 본 순간 그때 그 애라는 확신이 들었다. 길고양이는 전부 비슷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에 다시 만나도 못 알아볼 것이라 생각했는데도 그 애라는 확신이 섰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반가운데, 반가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를 몰랐다. 고양이를 길러본 적도, 이렇게 가까이서 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애가 나를 보는 게 느껴졌다. 손을 들어 ‘안녕’ 한 마디 했다. 도망가지 않았다.


  편의점에는 고양이 전용 캔이나 간식들을 팔았지만 유통기한이 짧고 소량인 것이 많았다. 하지만 인터넷이나 마트에서 파는 것들은 집에 쌓아두기엔 많은 양이었다. 어쩌다 마주치는데 이렇게 큰 걸 사도 될까, 하던 고민은 오래 가지 않았다. 고양이를 키우지 않는 집에 고양이 사료가 정기적으로 배송되었다. 매일 저녁, 물과 사료를 챙겨 집을 나갔다. 오렌지색과 흑색 무늬가 섞인 그 애를 나는 나비라고 불렀다. 그 애와 나는 서로 다른 말을 쓰지만 매일 약속을 했다. 여기서 만나. 알았지. 사람들을 피해 다녀. 알았지.



  동물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고양이에겐 유독 박한 사람들도 안다. 내가 자란 동네의 어른들은 고양이를 요물이라고 불렀다. 길을 걷다가 차에 치여 죽은 고양이를 봐도 어른들은 그게 별 일이 아니라는 듯 지나갔다. ‘캣맘 사건’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던 날, 단톡방도 시끄러웠다. 단톡방에 찍히는 글자를 읽기만 했다. 사람들이 그랬다. 그건 잘못이지만 고양이 밥 주는 사람들도 잘한 건 없다. 고양이가 얼마나 시끄럽고, 더럽고, 그러니까 민폔데.



  스물 여름, 빗소리에 자다가 깼다. 천둥이 치고 창문이 흔들릴 정도로 비가 내렸다. 잠에서 깬 엄마랑 아빠가 복도로 달려 나가 창문을 전부 닫는 걸 보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디 가냐고 하는데도 들리지 않았다. 큰 우산을 손에 쥐고 매일 가던 곳으로 달려갔을 뿐이다. 잠옷 바지는 축축하게 젖었고, 내가 놓아둔 물그릇은 흙탕물로 엉망이 된 상태였다. 그 애는 없었다. 비를 피할만한 곳을 찾아다녔다. 편의점 의자 밑, 파라솔 밑, 커다란 나무 밑, 쓰레기 소각장 안. 



  지붕이 달린 쓰레기 소각장에도 비가 흠뻑 들어와 바닥이 축축했다. 사람들이 버리려 쌓아둔 종이박스 사이에 고양이 몇 마리가 있었다. 셋, 혹은 넷. 개중에는 아주 작은 새끼고양이도 있었다. 그 애 말고도 너무 많은 고양이가 이곳에서 살고 있었다. 걸치고 있던 오래된 셔츠를 덮어준 뒤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도 비는 그치지 않고 내렸다. 비는 다음날에도 왔다. 비가 너무 많이 내리는데 그 애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엉망이 된 물그릇 앞에 쭈그리고 앉아 비가 내리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열아홉은 스물이 되고, 스물은 금방 스물 둘, 스물 둘은 다시 스물일곱이 되었다. 그동안 나비는 치즈가 되고 치즈는 하양이가 되고 하양이는 콩이가 되었다. 그 애들은 어디선가 나타나 어디론가 가버린다. 우리가 보낸 시간은 어떤 기록으로 남아있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는 나쁜 일이라 하고, 누군가는 의미없는 일이라 한다.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저녁, 벤치에 앉아있으면 발치에 와 몸을 기대는 그 애를 보며 세상이 그냥, 조금만 다정했으면 좋겠다고 바랄 뿐이다. 


 

* 매거진 <오보이>에 수록된 글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