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윤
거리에서 걸어가는 사람들을 본다. 한결같이 일정한 자세로 폰을 보며 걸어가는 사람들을 돌계단 위에 앉아 보다보면, 난 항상 그 "돌계단 위에 앉아서 생각하는 나"와는 별개된 자아로 한 번 더 생각을 하곤 하였다. 그러한 생각들은, 나의 모습이 이러한 사람들의 모습에 잘 끼여 맞추어질 수 있는지, 하나의 아름다운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는 것이 과연 당연한 사실인 것인지 같은 쓸모없는 상상들이었다. 우리는 모두 다른 능력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 그리고 지겹도록 세상과 다투어가며 자라나는데, 그 과정에서 "천재는 떡잎부터 남달랐다"라는 그 한 문장은 나를 주눅들게 하는 문장이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어렸을 때부터 이상한 사람 취급받는 아이였고, 퇴학을 당하자 특허청에 취직해 열심히 공부하여 자신만의 이론, "특수 상대성 이론과 일반 상대성 이론"을 만들어냈다.
아직 우리 주변에 그러한 편향적 시선을 가진 사람들은 많다. 상대성 이론은 전세계에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10명 남짓 될 정도로 아주 어려운 이론이자, 루소나 칸트같은 철학자들을 제치고 "우리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천재" 1위로 이름을 새기게 되었다. 이러한 논문들을 보면서 우리는 찬양하지만, 천재라는 떡잎이 없는 일반인들이 자신만의 이야기를 썼을 때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넌 사람들이 좀 이해할 수 있게 쓰는 게 좋아, 그것은 자신만 알 수 있는 글이니까 어떠한 글의 주제를 정해서 쓰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아인슈타인도 파란만장한 자신의 어린 시절의 특별한 계기를 열어간 것이 퇴학이라는 이유로 그것은 서사가 되었고, 나 같은 일반인들은 퇴학을 당하면 "문제아"라는 취급을 받으며 사회에서 평생 조리돌림 당해야 하는 신세이다. 그들은 그들만의 특별한 서사를 만들었지만, 난 그것을 만들지 못했다는 것이 문제일까, 어쩌면 그들이 물려받았던 유전의 문제일까?
너무 비판적으로 나갈 수도 있었던 내 글도 너무나 많은 조건들이 내 글을 덮어쓰고 있다. "나 같은 일반인들은"이라는 어절을 통해 난 아직도 천재와 다르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세상에 실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천재성을 구성하는 요인에는 직관과 남다른 시각 등 여러가지 요소들이 있지만, 난 그것 중 어느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예전 글에서 우리나라를 "기술 없는 선진국이 아닌 선진국들의 기술이 만들어져 생긴 하나의 결합물"이라고 정의한 적이 있다. 그래서 인재만이 목적인 우리의 사회의 교육이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는 사실에 대해서 한 번 검증해보고 싶었다. 인재를 목표로 하는 우리가 교육적으로 발전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큰 포부일 뿐,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몇 달 동안 우리 학교 수업을 잠시 떠올려보면, 주로 암기과목 위주의 수업이 있고, 토론이나 통찰력을 키워주는 인문학 수업이나 창의적인 수업들은 하지 않았다. 독일이나 미국 학교 등 재미있고 흥미로운 위주의 학교들이 많았지만, 그들은 자원이 많기에 그렇게 재미있는 수업을 한다는 생각이, 그 다음은 내가 나라를 잘못 골라 사교육에 물들어있는 규격화된 인재들이 모여있는 곳에서 태어난 것을 탓하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이쯤되니, 학교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고 싶었다. "당신들은 고정관념 덩어리인 사회에서 한 번쯤의 반항을 해본 적이 있나요, 아니, 그것은 찰나의 몸짓이었던가?"
아인슈타인은 ‘천재는 문제의 본질을 누구보다도 간결하게 이해하는 사람’이라 말하며, 천재성이란 단순한 학습이 아니라 세계를 새로운 방식으로 보는 독창적 시각임을 강조했다. 우리는 그러한 독창적 시각을 강조할 수 있었던 능력이 있었지만, 사회의 신념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나는 한글을 조금 빨리 뗐던 아이이자, 어렸을 때부터 우리 유치원이든 집에든 보편화되어있는 한글판을 보고 또 보았기에, 책에 있는 새로운 문체를 머릿속에 새기고 또 새겼기에 그 언어가 머릿속에 익혀진 것이다. 그것은 좋게 말하면 하나의 학습된 자아일 수 있지만, 나쁘게 말하면 사회의 틀에 물들어가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어릴 때 부터 누구나 보던 뽀로로를 보던 나였고, 누구나 먹던 음식을 먹고 자란 나이기에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자랄 수 밖에 없었고, 그 자발적인 본능은 누군가의 강제적 행위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해 보았다. 독창적 시각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상 옹알이 시절밖에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진정으로 우린 어릴 때 부터 "사회화"가 되어가고 있고, 사교육을 위해 흔히 말하는 "영유"나 "사립초" 등을 보내는 안일한 부모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천재성을 표현할 수 없는 공간에 애초부터 있었던 것이 아닐까. 아인슈타인은 인생에서 퇴학이라는 기점을 기준으로 자신의 출발점을 되돌리는 계기를 만들었지만, 우리는 점점 사회에서 빌드업을 하고, 나라의 인재인 우리가 어긋나는 기회를 만들어서는 지당코 안 되기에 엄중하고 진지한 교육을 어릴 때 부터 학습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든, 전 세계든 자신의 자아를 펼쳐가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소말리아의 해적들은 조금 좋지 않은 방식이기는 하였고, 나라가 지불한 거래의 대가로 가난과 식민지배 등을 얻고 폐허가 되었지만, 어쩌면 "해적질"이라는 새로운 시각을 통찰하였기 때문에 우리 사회에서 그들 쪽으로 여론을 돌릴 계기를 만들게 된 흥미로운 파장이 생긴 것이었다. 천재는 흔히 이상한 생각과 엉뚱한 생각을 하곤 한다고 배웠다. 이것도 물론 배운 지식이라 그렇게 정확하다고 말할 순 없지만. 나는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모두가 전부 다 천재였다고 생각한다. 아직 날것의 자아와 순수한 야성을 가지고 있는 그들이 정말 천재라고 말할 수 있는지 사람들은 의문을 표출할 것이다. 그들에게 천재란, "아이큐가 높고 말을 독특하게 구사할 수 있으며 기운에서 느껴지는 어려운 사람이라는 것"이 바로 그들의 기준이기 때문에. 아직 아무것도 모르면서 옹알이를 하는 아이들이 그들에겐 그저 "챙겨줘야 하고 젖병을 물려줘야 하고, 안아주고 쓰다듬어주어야 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 아이들이 찰나의 몸짓을 할 때, 자신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아가야"라며 다정한 목소리로 그들을 다 해주고, 자신을 그 아이와 동등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야성"으로 키운다. 양육방식의 차이일 수도 있으나, 천재를 키웠던 사람들의 방법은 아이의 찰나의 몸짓을 알아차리는 부모의 넓은 통찰력이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