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원
기말고사 문제가 가장 어려웠던 과목을 물어본다면, 나는 점수는 꽤 후하게 나왔던 국어를 말할 것 같다. 정말 말 그대로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 즉 학생들의 분별력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과목 중 하나가 국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문제를 정말 꼼꼼히 읽어야 하고, 밑줄을 치며 한 번 더 읽어야 하는 그 과목. 나는 이 시험에 대해서 쌓인 것이 굉장히 많았다. 또한 나의 문해력이 이것밖에 되지 않았나 라는 실망감도 느꼈다. 그림은 분명히 그 인물의 시점을 나타내는 것이었는데 실제 질문은 저 인물의 시점을 물어보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나 헷갈리게 문제를 내면, 우리들은 얼마나 정신을 더 차려야 하는지, 커피를 2개는 준비해야 할 것만 같다. 첫 교시에 하나, 국어시간에 하나.
무엇보다 이 국어라는 과목은 1학기 기말고사 때 가장 논란이 되었던, 그래서 선생님의 안색이 좋지 않고 매우 울기 직전의 표정을 했던 문제가 딱 하나 나왔었다. 정말 딱 하나, 심지어 이 문제는 내 기억으로는 두 번째 장에 나온 문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맨 뒤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태연하게 문제를 풀어가던 딱 그 순간에 그 킬러문항은 우리들의 펜촉 아래로 내려왔다. 정말 답답하게 답은 하나가 아닌 두개가 남았고, 문제에 답이 2개라는 말은 없었다. 어렷품하게 국어 공부를 하면서 아주 짧게 보았던, 그리고 선생님이 정말 딱 몇 초 설명했던 그 단어가 나온 그 답 중 하나는 보자마자 떠올라서 나는 더 머리를 부여잡았다. 분명 봤었는데, 근데 선생님이 중요하다고 말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과연 그 단어가 답이 될까. 그 문제를 건너뛰고 모든 문제를 다 푼 다음 다시 그 문제를 펜 밑에 두고 밑줄을 마구 쳐보았지만, 두가지 답 밑만 지저분하게 줄로 그어져있었을 뿐이었다. 결국 결과적으로, 내 답은 틀렸다. 아주 짧게 들었던 것처럼 기억된 그 단어가 들어있던 것이 정답이었다. 사실 솔직히 얘기하자면, 나는 시험이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아서 이 문제가 잘못된 것인지, 그리고 내 답도 일리있는 답이었다는 것을 몰랐다. 인지조차 하지 못하고 있을 때, 복도 앞에 우는 소리와 일제히 나가는 학생들이 눈에 띄었다. 그래서 나가보니, 어떤 한 학생이 울고 있는 것 아닌가. 그 문제만 틀리지 않았다면 100점이라며, 평균이 깎였다며 울고 있었다. 모든 학생들은 핸드폰을 들고 복도로 나와서 큰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이게 네이버에 쳐보면 백과사전이든 뭐든 다 이게 맞다고 한다니까?”, ”문제집에서도 이게 정답으로 나온다고. 이거 출제 오류아니야?“ 나는 그 사이에서 혼돈했다. 내가 틀린 게 아니었나. 모든 학생들은 3명에서 4명 짝을 지어 교무실로 들어갔다. 마치 한 건 해내겠다는 그런 자신감 넘치는 발걸음으로 말이다. 그렇게 내적 기쁨과, 겉모습으로도 보이는 슬픔이 뒤섞인 복도를 교무실에서 나온 초췌한 얼굴을 한 국어선생님이 지나갔다. 모든 학생들은 마치 그 선생님이 논란의 연예인이라도 된 듯이 시험지를 카메라처럼 들이밀어 해명을 요구했다. 그러자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여기서 묻는 건 그게 아니며, 출제자의 의도에 따르면 5번보다는 3번을 더 정답이라고 칠 수 있다.“ 그 말 한마디에 학생들은 당연히 뒤집어졌고, 예민한 모든 학생들이 나와서 시위라도 벌이듯 4반 앞에서 복수정답으로 인정해달라는 말을 크고 빠르게 4반 안 쪽으로 흘려보냈다. 이렇게 킬러문항이라는 것은 모든 학생들을 혼란스럽게 만들며, 동시에 미움을 사게 만드는 문제이다.
우리가 이렇게나 킬러문항에 집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앞서 말했듯 그 문항이 그렇게나 크게 문제가 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애초에 나에게 있어서 시험이라는 것은 중요하지도 않았었으며, 이미 시험 점수는 우월한 남들에 비해 매우 초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균이 거의 100점 가까이 되는 학생들은 나와 반응이 전혀 달랐다. 20분, 아니 그 이상은 더 울었을 것이다. 눈가는 눈물 범벅으로 젖고, 젖은 그 부분들은 빨갛게 물들었다. 이 학생들의 처절한 울음소리와, 불만 가득 섞인 적극적이며 위협적인 태도들을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도대체 왜 우리들은 이렇게나 경쟁을 해야하고, 짐승처럼 남들을 헐뜯어야 할까. 선생님도 가끔 이렇게 어려운 문제를 내서 학생들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싶지 않았을까? 물론 그 시도는 예민하고, 성적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학생들에게는 매우 불안정하고 위험한 시도지만 말이다.
점점 학생들은 수업을 그저 ‘시험을 치기 위해 듣는 것’ 으로 바라보고 있다. 시험 문제에 나올 가능성이 있으니까, 선생님이 유독 이 단원을 하면서 빨간색을 더 많이 썼으니까 공부하고 집중하는 것이다. 들어오지도 않는 것들을 우리들은 집중하여 듣고, 시험기간이 끝나면 우리들은 떡볶이를 먹으면서, 그리고 영화를 보면서 꽉 찼던 뇌를 느슨하게 풀어서 그 지식들이 모두 나올 수 있도록 입구를 열어준다.
”교육이란 첫째, 개인의 잠재력을 ‘끌어내는’ (educate) 것이며, 둘째, 인간의 존엄성(dignity)에 대한 감수성을 높이는 것, 즉 자신의 존엄성을 자각하고 타인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셋째, 개인적 차원에서는 개성적인 인간을 기르고, 넷째, 사회적 차원에서는 성숙한 시민을 키우는 것이다.“ 교육의 원래 뜻은 이러하다. 그렇지만 교육의 형태는 전혀 이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험기간만 해도, 아니 가장 심한 것은 시험 당일이다. 시험 기간만 되면 학생들은 수업을 들으면서 ‘시험’ 이라는 얘기만 나오면 밤늦게 도서관에 있다 오느라 피곤해서 머리를 책상에 박다가도 고개를 급히 든다. 잠재력을 끌어내기는 커녕, 정해진 내용만 탁탁 머리 위로 털어줄 뿐, 수업시간에 발견한 숨어있는 학생의 힘이 있다면 그건 시험 출제 가능성 문제를 말하기만 하면 잠을 자다가도 귀신처럼 알고 머리를 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시험 당일만 되면 한 과목을 끝내고 찾아오는 쉬는시간마다 자리에서 일어나 시험지를 들고서 친구들과 쓸데없이 답을 맞추면서 희비가 갈린 소리를 지른다. 야생 속 짐승처럼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고 날뛰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고도 존엄성을 띄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또한 학교와 학원만 다니면서 점점 단순화되고, 시간을 뺏겨 공교육 이외의 행위를 할 수 없어진 우리들을 보면 어떤가. “아 나 오늘 학원 때문에 노래방 못 가.” 노래를 마음대로 부르지 못하면서 스트레스만 묵혀가는 우리들의 단순화된 스케줄 속에서 우리들은 개성적인 인간이 되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들은 성숙하고 어른스러운 사람이 되지 못한다. 승자는 오만함을 지니게 된다. 그저 종이에 불과한 자신의 성적표를 자랑이랍시고 들고다니며 자신보다 낮은 아이들을 놀릴 자격을 스스로 부여한다. 패자는 그런 대우 때문에 점점 더 스스로 위축되고, 얼굴을 들지 못하는 수치를 느껴야 한다.
이런 모습들을 보았을때, 과연 우리들에게 킬러문항이라는 것이 있어야 할까 싶기도 하다. 물론 경쟁은 중요하다. 우리가 펜을 잡을 때는 항상 인스타 그램 속에 공부하는 친구가 올라올 때이다. 나도 왠지 모르게 해야할 것만 같은 생각을 하면서 공부할 결심을 다진다. 그렇지만, 킬러문항이라는 것은 학생들이 울면서 마음 속의 상처를 느끼게 만들며, 사실상 현실에서는 전혀 필요하지 않는 문제로, 있어야 할 이유를 알지 못한다. 경쟁심과 승리감, 문제를 출제한 선생님과의 싸움을 의미하는 것인가? 학생과 선생님이 말싸움 경쟁을 하여 승리를 거두게 하는 것이 바로 킬러문항의 실존 이유일까? 학생들이 덜 울어서 눈가가 붉은 색으로 물들지 않기를 바라며, 선생님이 우리들의 사정을 더 이해해주었으면 하고 바란다.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해야 하는 학생의 마음을 왜 그 문제를 직접 출제하는 선생님들은 파악하지 못할까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