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윤
"그들의 수려한 문장들과 단어를 내뱉는 입은 더 이상 말할 수 없게 되었으며, 항쟁을 뜻하는 강렬하고 격렬한 손과 발들은 이제 피투성이가 되어 옆구리 옆에 조용히 놓여있다. 그들에게서 보이는 세계의 어그러짐도 이제는 조용하디 조용한 무표정이 되어있었다. 이 모든 것이 "태극기"라는 국가의 상징으로 칭칭 덮이며 그들의 자발적 의미를 퇴색시켰다. 이러한 국가의 격정과 가치를 퇴화시킨 행동이 우리 역사에 있었다는 것을 당신은 언제 알았었고, 시간에 다다른 절정의 순간에서 이 문제를 접한 당신은 무엇을 느꼈던가?"
알다시피, 나는 이러한 쪽에는 박학다식하지 않으면서도 저절로 느끼지지는 않지만 살아만 있을 것 같은 혼의 모습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비록 그 영혼들의 처절한 외침을 거치며 소리치지는 않았고, 견딜 수 없는 격정과 수많은 망각들에 사로잡혀 계엄군을 향해 크게 대항하지도 않았으며, 하얗게 내린 눈꽃처럼 외친 처절한 외침이 차갑게 어는 경험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오뉴월만 되면 그러한 혼령들의 눈부시고 좋았던 찰나의 순간들을 생각해보곤 합니다. 각자만의 추억들이 빛고을에는 담겨져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만 하는 것은 그 시절 ’민주화‘라는 이념을 지키기 위해 끝도 없는 노력을 다했던 그들의 영혼들이자, 히어로라고 칭송받아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러한 고귀한 희생이 모여 그 곳은 비로소 ’빛‘을 찾아갔고, 후속되는 여러 민주적 운동들에게 ’희망‘의 신호탄이 되었던 것입니다. 소년이 온다의 "소년"은 "용감하고 정의로운" 이라는 뜻을 상징하는 뜻이라고 어디선가 박혀있던 출처 없는 지식을 꺼내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용감함을 선사받고, 부끄러움을 주고 있진 않나 싶습니다. 우린, 안타깝게도 그들의 장면들을 영화와 책같은 대중적 요소로만 만들 수 있었지, 진정한 영혼의 통찰처럼 그들의 불멸적이고 살떨리게 아름다운 본모습을 느끼지는 못했으니까요. 이는 마치 아프리카에 있던 기부 단체에게 "불쌍하다"라는 어절을 날릴 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다른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찾기 위해 채널을 돌리는 가치의 불확실성을 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향기 좋은 꽃처럼 젊었던 시절이 그들에게도 있었으리라 믿습니다. 이제는 더이상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는 형체의 시취를 풍기는 무언가를 붙잡고 우는 유가족들이 묘사된 장면들을 보며 똑같이 눈물을 흘릴 수 있었던 것은 그 장면의 사실적 연출일 뿐이었고, 난 사실 진정한 공감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장면들로 나를 울리다니, 세상은 아직까지 나같은 개미들을 마음대로 울리거나 웃기게 할 수 있는 베짱이 같은 존재인듯 하였죠. 난 그 잔인한 장면의 구절을 듣고 싶지 않아, 결국 도망가듯 귀를 막아버렸습니다. 그들의 무한한 항쟁과 뿜어져나오는 피는 나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순적의 이미지를 상상하게 해 정신착란을 일으키게 할 뿐이었습니다. 그날의 혼령들이 아련히 피워낸 열들과 눈부신 다짐들은 이제 꽃이 시들어가듯 저물어갔습니다. 아름답단 말처럼 심어둔 그들의 혼령을 기억하고 싶지만, 정작 "기억하겠다"라는 새하얗게 토씨 하나 틀리지 않는 거짓말을 늘어놓고 현생을 살기 위해 눈처럼 흩어졌습니다. "민주화"라는 단어를 들으면 정치와 부패성과 빨간색, 파란색을 먼저 떠올리게 됩니다. 꽃잎들이 모여 세계를 밝히는 우리의 남김없는 미래의 행복을 위한 노력은 사라졌고, 국민들의 청원에 동문서답을 하는 정부와 조심스레 물어본 세금 정책은 우리같은 사람들을 압박시켜왔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표정들만 봐도 살아갑니다. 우리 반의 친구들은 마치 선잠만 잔 듯 피곤한 얼굴로 하루를 살아가곤 합니다. 제자리를 도는 회전목마처럼 진전은 없는 하루와 인생이더라도, "그 안에서의 모순적인 것은 세상을 정한 규칙이 아닌 우리 자체의 혼령"이라는 생각을 하며 우리의 존재 자체를 비판합니다. 친구가 과학 시험을 망쳐서 "난 죽어야 돼"라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 것을 보고 잠시 모든 것을 잊기로 하였습니다. 우리의 혼령은 순수하고 깨끗했던 그 시대의 모든 것들을 느껴보고 싶었습니다. 비록 그곳에는 잔인한 순간들과 계엄군의 총소리와 피투성이가 된 사람들이 거리에 널브러져 있다고 하더라도. 잔인한 어떤 날이라도, 기억하지 않으면 영원히 잊혀지기에, 마치 그 장면들을 밥 먹듯 기억하도록 노력하였습니다. 내 머리속에서 최대한 필터를 씌워가며.
슬픔과 눈물, 피의 시대는 흘러가고 이제는 미처 그러한 장면이 있었다고 보기 힘들 정도로 그 언론과 모든 것이 통제되었었던 도시는 발전하였습니다. 난 물방울 처럼 새벽에 잠시 머물렀다가 낮이 되면 바싹 마른 아침의 푸른 하늘처럼 그 기억들이 잠시동안만 있는 줄 알았지만, 그들의 처절한 외침만은 광주에게 지울 수 없지만 희미해져있던 페퍼민트 차의 향처럼 어딘가에 겉돌아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광주는 아른아른한 아지랑이 덕분에 괜히 눈이 부시고, 그의 포근해진 날씨는 나를 녹아내리게 할 듯 하였습니다. 견딜 수 없었던 지난날의 시간은 사계절을 만끽하는 감정들에 의하여 눈과 낙엽들, 잎사귀들과 벛꽃의 일부들로 덮였습니다. 우리는 오렌지 햇살이 잠겨가는 세상에서 역광에 비치는 사람들과 모두의 아름다운 미소에 취해 그 모든 것을 잊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로 인해서 "역사의 중요한 순간"을 잃곤 합니다. 나름 세상에 큰 파장을 미쳤던 그 상처는 "청춘찬가"를 부른다고 해서 해결되는 쪽팔린 경험 따위가 아닙니다. 비록 엉망진창이었던 풍경들과 우연히 서양인 힌츠페터의 눈에 마주친 광주의 다른 사정들은 안 그래도 어그러진 세상을 더욱 망그러지게 하였지만, 우리는 그것을 이불킥을 하면서 잊는 경험이 아니라, 인사이드 아웃 2의 자아 나무를 모두 안아주는 것 처럼 그들을 보듬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당신은 이 세상을 만드는 원동력이 "지금 이 순간"이고, 나도 나대로 빛난다는 생각을 하며 세상을 살기도 모자랄 판에 이러한 짓거리들을 하며 시간을 낭비할 순 없다며 나에게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나의 질문을 들은 당신은 머리로는 사회시간에 잔뜩 보며 달달 외웠던 교과서들을 잠시 보고서 끔뻑거리는 기억들을 찾아 바다를 항해하고 있진 않을까 싶습니다. "촛불이 파닥거리고 타들어가듯 우리의 역사가 모두의 강제적인 기억 소각 행위로 인해 빈 공백으로 남는 것을 볼 수 없는 것이 문제일 뿐." 이라고 한 마디 추가하면 당신이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을까요? 시공의 질서를 진정으로 깨달으려면 모두가 함께 있어야 합니다. 함께 있을때만 미래는 현실이 될 것이고, 오래된 미래를 만들 수 있으며, 같은 한 방에 살아가면서 추억만큼 나이를 먹을 수 있을 테니까요. 오늘도 가만히 거울은 당신을 비추고, 애써 잘 된 머리를 한 번더 정돈하며 일상을 살기 바쁜 당신에게 이러한 제안은 딱히 달갑지는 않을 거에요. 기본적인 가치들이 몰살당했던 과거와 비교하면 현저히 자유로운 대한민국이 모두에게 익숙하고 당연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는게 맞습니다. 매일 찾아오는 아침과 매해 마다 순환하는 계절처럼 그 상처와 아픔도 우리에게 어느새 당연하게 느껴져 그 소중함을 모르는 것 같죠. 우리는 우리의 시간의 착각에 속아 소중함을 잃지 말자는 말을 유념해야 하는 시대인 듯 합니다. 시간의 착각은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못난이니까요. "어쩌다 보니 처음으로 마주하는 내일이라서"라는 현대판 청춘찬가를 흥얼거리며 오늘도 하루를 시작하겠지만, 무언가 조금 더 혼령이라는 단어에 가까워진듯한 기분이 들곤 합니다. 그들의 입과 팔 다리들, 일그러진 얼굴들이라는 추상적인 요소들이 그들이라는 이름을 대변하고, 그들의 열정적인 꽃을 피우는 행위와 피 튀긴 시간들의 놓을 수 없는 기억들이 팽팽하게 시공의 경계선을 조이는 듯 합니다. 우리도 조금은 역사를 기억해보는 건 어떨까요. 미래의 후손들에게 "2000 년도의 우리" 라는 영혼을 2100년의 사람들에게 정의받고, 대변받기 위해서, 미래에 모두에게 받아들여진 우리가 시공의 질서의 일부에 스며들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