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 X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문제>
정서윤
-Fine-
"꿈에서라도 다시 만나고 싶은 잔인한 모습을 띤 그 혼령이 마치 일정한 시간을 알리는 괘종시계처럼, 마지막이라는 구절을 통보하기 시작하였다. 난 그때부터 혼령 없이 살아왔던 단순 "피조물"에 불과한 것이었던가? 언제나 제각각 알아서 학교에 가고, 눈치껏 조용한 학교생활을 이어왔으며, 함께한 계절의 변질된 색을 보여주듯 예민하게 변화하였다. 지금의 시간이 지나가고 그 기억도 힘들었던 추억들도 모두 다 잊을 수 있는 약물이 내 앞에 있었다면, 지금의 나는 예전의 나와 같이 그 약물에 손을 뻗게 되었을까? 자주적인 죄책감에 이끌려 모든 걸 잊고 싶다는 생각에 베토벤처럼 자신의 악보를 구겨 쓰레기통에 던지게 될까?"
죄책감이라는 것을 단순히 내 삶에서만 느꼈다고 정의하면 무언가 지루하다. 무언가 깊었고, 심미적인 고통이 컸다는 것 쯤은 이번에 뇌파 검사를 하면서 알게 되었다. 난 정신적 피로와 육체적 피로가 극심했던 "사교육의 피해자"일 뿐이었고, 꾸준히 나 자체의 혼령을 비판하며 살아갔던 사람이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베르테르는 모두에게 촉망받던 세상을 마치 판도라의 상자처럼 열어보고 싶지만 열 수 없는 "로테"라는 존재를 대가로 독창적인 시각과 고통스러운 통찰력을 얻어 그 능력으로 세상을 비판할 수 있었지만, 난 그저 내 혼령의 비중을 나에게서 점점 줄여갔다. 모모에서 사람들이 서서히 회색인간이라는 정신적 지주에게 스며들어 모모라는 "거지 여자아이"를 마음속에서 지우는 것 처럼.
범죄를 저지른 동기를 물어보는 것은 어딘가 아픈 심장의 빛내림을 자극하는 듯 하였다. 라스콜리니코프와 조지나는 물론 사회에서 매장당할 법한 행동을 감행하였고, 국가 권력이 개인의 삶을 정의하는 사회에 위반되는 인간이었기에 벌을 받는 것이 마땅했다 말하면 어딘가 일리가 있지만, 둘은 범죄를 저지른 방식이 다르기에 이를 어떻게 판명해야 될지는 의문이다. 조지나는 단순한 자신의 열정적 욕망으로 인해 500달러를 가지고 자신의 좋은 미래를 꾀했다. 이로인해 위트모어가는 전혀 손실이나 이러한 큰 타격을 입지 않았다는 결과를 초래했지만, 결국 이는 조지나에게 상처만 남기고 앞으로의 악몽처럼 계속 생각이 나게 만드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라스콜니코프같은 경우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설득을 통해 자신의 죄책감을 만회하려는 듯 보였다. 오로지 "노파는 많이 살지도 못하고, 돈이 있다는 것 빼고는 사회에서의 가치를 증명하지 못했기에" 자신이 그 돈을 훔치고 노파를 죽여도 이것은 세상을 향한 일종의 정신 승리를 내보이지만, 이마저도 그리 좋은 결과를 초래하진 못하고, 둘 다 공통적으로 정신적인 상처와 공백기를 마주하고 살게 되었다.
"난 나쁜 사람이 아니야.’라고 스스로 위로했다. ‘이것 멋진 계획이야. 결국은 모두 다 행복해질 거야.’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되뇌었다. 이렇게 생각하다 보면 다 진실이 될 거라고, 나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난 인사이드 아웃의 기쁨이가 되려고 노력했다. 어떤 면에서는 라스콜니코프의 장점을 베끼려고 하기도 했다. 언제나 죄책감을 가지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샤덴프로이데 같은 마음은 생애에서부터 오늘까지 베토벤의 구겨진 악보처럼 다시는 보지 않으려고 필사적인 행동을 선보이고 있었고, 녹슨 세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은 한계가 정해져있고, 그 작은 행동마저도 결국은 수많은 미로와 벽들에 틀어막혀 주저앉는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행동을 제 3자의 입장에서 보는 것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부끄러웠고, 무지를 티 내는 것 같은 소름돋는 느낌에 그만두려고 했던 적도 많다. 그럼에도 이러한 행동을 멈출 수 없었던 이유는, 지난날의 내 삶에서 느꼈던 극심한 양의 죄책감을 어떻게든 청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리고 이미 "기쁨이"라는 이미지는 내 강화의 작업 중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었고, 친구들 사이에서 "기쁨이"라고 불리고 있었기에, 난, 그에 관해 일그러진 마음의 주름들은 뒤로하고 맞다고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행동을 계속 이어나갔다. 비록 헤라클레스는 헤라의 저주에 의해 아내와 아이를 죽이게 되었지만, 그 마저도 죄책감이 들어 13개의 어려운 과제를 해결하려 떠난 것 처럼, 이젠 사람의 부질없고 생각할 가치도 없는 죄책감에 관한 퇴화된 퀄리티의 상상력이 느껴지는 듯 하였다.
보통 이러한 죄책감들은 어디 분야에서나 느낄 수 있는데, 결국 이러한 자신의 사회에 대한 정의의 오류를 느낄 수 있는 경우는 많다. 자신의 선한 행동이 누군가에게는 악으로 느껴질 수 있는 것이고, 아전인수의 행동만을 하다가 결국은 길바닥에 나앉지만 이제 더 이상 우리는 그에 대해 도와줄 방도가 없는 것 처럼, 자신의 정의에 따라 자신이 행동한다는 것은 지극히 맞는 말이다. 우리나라는 개인주의 사회를 거치면서, 점점 사회에 대한 범죄의 인식은 "개인의 탓"으로 돌아갈 뿐, "사회가 범죄자들을 양성할 명분을 만든다"라는 하나의 주장은 이제 세상에서 완전히 소멸해가고 있는 상태이다. 범죄는 자신을 대변할 수 있는 하나의 키워드이자 깨달음이 아니며, 잔인한 혼돈과 정신이상으로 인한 무기력함과 사회적 매장을 초래할 뿐이다. 우리 학교에도 학교폭력이나 이러한 사건들로 시끄러운데, 이러한 상황에서 내 친구는 해선 안될 짓을 그때 해 버렸다. '자신이 친구가 먼저 한 짓을 앙갚음할 뿐이었다'라는 진술은 그곳에서 통하지 않고, 내 친구와 싸운 친구의 부은 뺨이 유일한 증거가 될 뿐이었다. 난 시공의 질서를 떠돌다 무언가 가는 실금의 틈을 발견한 것처럼 사소하고 어이없는 것들도 결국은 이것들이 모여 사회의 골칫거리를 만들게 되는 것이라 여기게 되었다. 핸드폰의 액정에 작게 나있는 실금을 모르고 놔두었다가 나중에 액정 전체가 그 실금 하나 때문에 깨지게 된 일화를 들으면 나의 주장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예전부터 계속 느끼는 것인데, 우리 인간은 선을 무조건적으로 중시한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은 중대한 범죄로 우리에게 인식된다. 그리고 그로 인한 사회의 인색한 태도와 모두의 비판, 오렌지보다 진한 죄수복을 입고 감옥에 수감되는 상상을 하면 저절로 몸이 움츠러들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인간은 동시에 범죄를 저지르고 싶다는 열망 앞에서는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게 되지만, 범죄를 저지르고 나면 자신의 행동에 대한 상상력이 증폭되어 결국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는 아이러니한 결말을 가지고 있다. 쓸데없는 죄책감을 현실에서 가지게 되는 사람들도 많다. 그렇지만 이러한 행동에 대한 절대적인 청산도 그렇게 좋지만은 않다. 비록 범죄라는 이름의 뿌리를 제거하는 것이 좋지만, 왜 아무리 손봐도 이미 한 번 틀어지고 영원한 공백기의 바다로 빠져든 나의 영혼은 건져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음은 무너지고, 시름시름 아프기 시작한 나는 오늘 수학학원을 빠지고 집에서 무기력하게 누워만 있을 뿐이었다. 계속 그렇게만 바라봐주어도 고마울 판이지만, 집에는 아무도 나의 행동을 신경쓰지 않는 사람, 나의 고충과 고민을 알아차릴 사람은 없었다. 나의 삶은 어쩌다 손 쓸수도 없게 되었을까. 시리도록 눈부신 햇살을 받고 새롭게 태어나는 듯 하였지만, 작은 빛의 돛단배를 힘껏 미는 나의 손길은 너무 약해서 돛단배는 아무것도 비추지 못하였다. 바다 속 물고기도, 섬들 사이에 경계에서 살고 있는 원주민의 모습들도. 난 마침표를 맞이하는 듯 점점 잠겨갔다.
"이 모든 게 죄책감이라는 생각을 해도 멈출 수 없는 격정의 욕망을 통해 세상을 연명해나가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자 숙명이었다. 비록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 아닌, 점이 하나 더 추가되어 영원한 도돌이표가 될지도 모르는 악보 속 예상 못할 변수는 마치 사회라는 음악에서 생기는 한 인간의 잔인한 나락을 표현하는 너무나도 작은 표시이다. 그래서 우리가 죄책감을 안 느낄 수는 없냐 - 당연히 그럴 순 없다. 우리는 깊은 곳에 새겨진 인간의 숭고한 숙명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기에 중도포기할 수 없는 마라톤에서 숨이 차도 계속 달리고 있는 것이다. 영원한 공백기의 바다에 빠지는 것이 추호도 두렵지 않다는 구절은 거짓말이며, 조지나와 라스콜니프도 그랬으리라 믿는다. 마침표를 찍을 수도 없고, 중도포기할 수도 없는 우리의 인생은 한 방향으로 등을 떠민다. "그냥 가라." 아직 마침표를 찍기에는 너무 이른 14살의 생활에서의 죄책감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적어도 무채색의 존재감 없는 반짝이 보단 크고, 몸 전체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물의 비중보다는 적을 것이라고 믿고 싶었으나, 예민한 친구가 오늘도 짜증을 내는 것을 들으면서 생각하였다. "지극히 개인적으로 범죄를 저지른다는 내 안의 주장과 그 마침표를 하나하나 따지며 믿고 싶었지만, 세상의 모든 것이 우리를 마침표라는, 음악에서는 끝이라는 "피네(Fine)" 의 표시로 우릴 이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