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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티 Dec 30. 2024

나만 찌질한 인간인가 봐

정서윤


 


"살아가다 보면 나만 찌질한 인간처럼 느껴지곤 합니다. 티비 속 당당하고 힙해 보이는 사람이 "나답게 살으라고" 춤을 추며 말할 때 난, 그 사람 나다운 게 멋있어서 좋겠다고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진정으로 나다운 것을 좋아할 사람이 있는지 모색해보곤 합니다. 있는 그대로 아름답다는데, 그대로의 난 아무것도 안 좋아할거잖아."


모두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단한 사건들에 대해서 주목합니다. 이번 윤석열 계엄 사태에 대해서 여러가지 모순적인 사건들이 일어나고 나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잘못들만 덮기에 급급합니다. <서울의 봄>을 모티브로 한 영화는 전두광을 주제로 쿠데타라는 단어에 대해서 주제를 담아보았는데, 45년만에 그러한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에 모두 댓글만을 쓰면서 하루를 보냈습니다. 아무도 그 사람이 왜 한지조차, 그럴 의도조차 모른 채 그저 비방적인 댓글만을 남겼습니다. 이것이 내란을 수괴하려는 지도자의 파멸적인 행동이라는 것은 우리 모두가 인지하고 있었으나, 야성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찾으려는 인간들은 사람들을 비난하고 여러가지로 뜯어갈길려는 생존 본능으로 진화하였습니다. 그들은 아무도 이러한 동기에 대해서, 어떠한 큰 사건에 의해서 그 근원에 대한 마녀 샤냥만을 주제로 시작하였죠. 이번 무안 항공기 사고의 경위도 소방당국은 아무것도 모른 채 "버드 스트라이크"로 명명하였으며, 그곳에서 살아남았던 2명의 승무원들에게 "왜 너네는 사라져가는 99명의 실종자들과 80명의 사망자들을 살리지 못했냐"며 이송되는 중에도 어디선가 욕을 먹고 있었습니다. 단지 생존한 것 만으로도 엄청난 축복을 받은 그들이 그저 자신의 직업적 특성을 지키지 않았다고 비난을 받는 사회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해리포터와 불의 잔에서도 모두가 주인공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해리와 론, 헤르미온느는 어떻게 해도 살아남으면서 독자에게 아름다운 연결성과 돈독한 우정으로 우리에게 감동을 주죠. 소박하고 깨끗하면서 웅장해 보이는 티비 속 연예인의 삶과 달리 지금 이 순간에도 제 방은 심각하게 어질러져 나뒹굴고 있는 장면들이 많이 보입니다. 주인공들은 어딘가에서 조용히 사는 법도 없으며, 그저 그 세계관에 중심에 서서 사람들을 구원하고 도와주는 역할을 합니다. 있는 그대로 아름다운 사람이란 건 애초에도 없으면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5000만의 국민을 적으로 돌리면서까지 문화적 투쟁을, 아내를 지키고 싶었던 윤석열 대통령의 마음을 아무도 모르듯이, 해리 포터에서 많은 사람들의 죽음과 여러 종류의 마법들을 촬영하며 불의 잔 때 진정으로 자신의 자아와 주인공의 본성을 결합시켜버린 다니엘 래드클리프.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 아름다운 엔딩만을 바라보면서 "나도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라는 주인공 본능을 자신의 내면에 작동시키면서도, 다들 자기가 너무 좋다는 듯, 다들 생각이 분명하다는 듯, 다들 자기가 너무 올바르고 누군지 아는다는 듯, 교복을 사 입고 여러 기숙사의 마크가 새겨진 코트를 입으며 양껏 웃는 그 모습이, 망상에 젖어있는 당신에게 비치는 거울의 모습이라는 것을 아직도 모르시나 봅니다.


그들만의 역할이 있듯, 역사에 강한 피를 묻힌 "아돌프 아이히만"도 그랬습니다. 그는 홀로코스트라는 이름의 끔찍한 대학살을 저지른 요주의 인물이기도 하자, 히틀러에게는 충신이기도 했죠. 한나 아렌트는 자신의 자아를 배제한 권력의 순응의 위험성을 강조하면서, 이러한 모순을 우리가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는 대답해주지도 못한 채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그 사람은 사람들이 끔찍한 고통으로 죽는 것에 대해서 어떠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적어도 히로시마에 리틀보이를 터뜨린 오펜하이머처럼 일련의 죄책감 정도는 느낄 수 있었을까. 모두가 사람에 관한 부정적인 기사가 뜨면 그 기사의 내용을 전부 요약해서라도 그나 그녀를 비판하듯, 사람들은 너무나 끔찍하게 그의 살육 행위의 대가를 돌려주듯 비난했습니다. 법정이나 법원에서도 그는 마찬가지였죠. 사람들에게 아무도 그의 결백함은 주장되지 않았고, 세기의 주인공, 비운의 주인공이라 부르고 싶은 그는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져갔습니다. 아무도 그의 살육 행위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다고 대답합니다. 아무도 "위험한 주인공"에 대해서는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 않아하고, 쫄쫄이를 입고 세상을 구원하는 좋은 주인공에 대해서만 열렬한 관심을 보이며 환호를 하죠.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배제된 소박한 진실들은 인간들이 극도로 싫어하는 보편적 규범이나, 주인공은 그런 소박한 것들은 지키지 않지라는 사회적 인식이 가방의 꼬리표로 바뀌어 있다는 것입니다. 주인공이라면, 단순히 미래에 세상을 구원한다는 이유로 법을 지키지 않고 학교 교칙을 어기는 해리 포터 같은 주인공들이야말로, 아돌프 아이히만을 욕하고 해리포터를 선과 악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그럴 여부를 가지고 있는지 조차 의문입니다. 저녁 메뉴나 고민하다가 오늘 하루도 지나보내는 우리의 일상은 그저 의욕감 없는 철없는 삶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러한 주인공들에게 댓글을 매개로 한 간접적 접근을 통해 그들의 평판을 좌우하곤 합니다. 이는 우리가 소비를 받는 대중으로써 대단한 권력 자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여, 그로 인한 자존심의 정점을 찍은 소비자들은 아돌프 아이히만과 같은 인물들을 한나 아렌트 같은 철학자에 비유하여 그들의 행적들을 낱낱이 짓밟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주인공들도 세상을 구한 것은 잘 한것이지만, 그로 인해서 망가진 도시들과 이러한 무대 속 뒤 엔딩은 도대체 어떻게 전개되는 것인지 생각을 해보시지 않으셨습니까? 이 상황까지 완벽하게 해결하는 주인공은 없을 것이죠.


아무도 대단한 것들만을 바라보기만 하지, 귤에 붙어 있는 하얀 줄 이름이 귤락이라는 것과, 병뚜껑 톱니 개수가 21개로 세계 규격으로 정해져 있다는 것과, 누워서 발로 박수치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에 대해서 주목하지 않습니다. 찰떡 아이스는 원래 3개였고, 하와이안 피자는 사실 캐나다에서 만들었다는 것을, 내 친구의 꿈이 어렸을 때 자판기였다는 것을, 사실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주인공들의 아름다운 모험들과 나쁜 사람들의 루머를 퍼뜨리는 것에나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소박한 사실들은 우리에게 좋은 기분을 만들게 하면서 동시에 힘든 인생에 잠시의 쉬는시간을 부여해줍니다. 열등감으로는 남들보다 월등하고, 그것조차 추월하여 이젠 거의 일등감인 우리 소비자들과 대중들에게, 우리 모두는 다른 사람들에게 참견하는 사람들과 열등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으니, 그것은 그러려니 합니다. 그렇지만, 아무도, 주인공에 대해서만 생각을 하지 그 무대 뒤에서 열심히 준비하는 스태프와 무대 조명사를 생각하지 않듯, 조명에 비치는 스포트라이트 위의 스타들만 생각하면서 그들에게 엄청난 압박감과 엄청난 관심을 주곤 합니다. 모두의 부처입니까, 모두의 하나님입니까, 모두의 석가모니입니까? 우린 그러한 신의 존재를 뛰어넘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란 말입니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가족들과, 따뜻한 밥들이, 어쩌면 전해지지 못할 슬픈 눈물들이 어딘가에 묵어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린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고, 좋아하고, 열망하다시피 갈망했다.

그러나 지난 상처에 너무나 많은 뒷걸음질을 쳤던 나는

남들이 웃는 것이 나의 즐거움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랄 수 밖에 없었다.

음, 나만 찌질한 인간인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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