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하
앞이 보이지 않는다. 분명 눈이 있는데도 앞이 보이지 않는다. 손을 뻗으면 닿는 냉기가 있는데도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데도 보이지 않는다. 왤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엎드린다. 흐느낀다. 그러나 이내 그친다. 여기서 울어버리면 안된다는 마음에 가루가 되어 사라져버리는 이성의 끈을 다잡고 다시 일어선다. 하지만 무릎이 꺾인다. 여기가 종착점이니 조금만 더 힘내자는 생각은 이미 깜깜한 암흑 속에 묻혀버렸다. 나는 종착점이라 인식했지만, 이곳은 경유지일뿐 종착역이 아니었다. 밀려오는 잠. 얼어버린 손. 피폐해진 정신. 인간은 이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충동적으로 커터칼을 손목에 가져다댄다.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짧은 순간 속 어설픈 영화가 재생된다. 코 끝이 맵삭해지는 느낌과 함께 찾아온 단편 영화는 여기는 종착점이 아니라고 거듭 반복해 말한다. 아울렛에서 회전목마를 타며, 솜사탕을 먹었던 장면, 찰랑대는 파도 위 발가락을 집어넣었던 장면, 산타 할아버지와 함께 사진을 찍었던 장면, 생일 선물로 커다란 인형을 받았던 장면...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장면은 미세한 전율과 함께 칼을 들고 있는 순간으로 끝이 난다. 조각 조각 흩어져 있던 기억의 편린들이 순식간에 하나로 이어졌다. 머리를 박았다. 귀를 막았다. 몸을 움츠렸다. 언덕 위에서 크게 소리를 지르고 쓰러지고 싶었다. 또 다른 마음이 솟구쳤다. 지금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죽기 전에 할 일이 많았다. 날 괴롭혔던 것들을 부셔야했고, 나를 울게 만든 사람들 면상에 쓰레기를 던져야했고, 이 세상에 쌍욕을 해야했고, 유리컵을 던져야했다. 또한 바다에 가서 하루종일 파도 위에 누워있어야 했고, 해 뜨는 걸 지구 상에서 제일 먼저 봐야했다. 하지만 당장, 꺽꺽대며 울던 나는 다른 사람의 기분을 망치지 않기 위해 참아야했다. 모든 게 다 내 탓이라 말하며 나를 괴롭혀야했다.
적막 속에 들어가 빛을 찾으려고 하는 건 멍청한 짓이다. 무대의 커튼이 닫히면 비로소 공연이 끝나듯이 우리의 인생또한 커튼이 닫힘과 동시에 끝났다. 어떻게 끝 나든지 상관은 없었다. 무대 뒤에서 펼쳐지는 쿠키 영상은 결코 재미있지 않았으니깐.
있지, 사람들은 1인 2역을 하는 것 같다. 모두 노예가 되고, 모두 주인이 된다. 대본 속 노예가 잠을 잘려고 하면 대본 속 주인이 노예의 머리를 쥐어뜯고, 대본 속 노예가 잘못을 하면 대본 속 주인이 노예에게 모지리, 멍청이, 눈이 달려있는 게 수치인 아이, 외계인이라며 채찍으로 노예의 뺨을 내리친다. '아!' 노예가 외마디 비명을 지른다. 주인은 깜짝놀라 노예의 끔찍한 입을 얼른 배게 속에 파묻는다. 노예가 흐느낀다. 주인은 노예를 다시 한 번 채찍으로 때리려고 한다...하지만 주인도 운다. 둘은 같이 울면서 마음을 편하게 한다.
마음의 온도는 몇 도일까? 어떨 때는 너무 차가워 가슴이 에어지는데, 어떨 때는 너무 뜨거워서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내 마음 속에 온도계가 있다면 그건 틀림없이 고장나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