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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부른 소리랬다

by 제이티

김서윤

배부른 소리랬다. 따뜻한 밥이 네 앞에 차려져 있는데 왜 숟가락을 들지 못하느냐 물었다. 그냥 숟가락을 들어서 김이 올라오는 따끈따끈하고 각각의 밥알들이 빛나는 듯한 저 아름다운 밥을 떠 먹으랬다. 입이 없느냐고 물었다. 왜 저 반찬들을 보고도 입을 열지 않느냐고 물었다. 편식하지 말라고 입을 벌리라고 했다. 떠 먹여줘야 하냐고 계속 소리친다. 그러나 나는 듣지만 듣지 않는다. 소리를 듣지만 굳이 이해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나를 이해하려고 들지 않은 이들의 소리에 따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말도 결국에는 의미 붙여진 소리와 다를바가 없었기에 말이다.

이해는 어렵다. 서로 다른 언어가 충돌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큰 충격을 야기한다. 그 충격에 내가 날아갈 수도 있는 위험을 그들은 굳이 이해하려고 시도하지는 않았으며 그저 내버려 두었다. 그렇게 남겨진 개인들은 작아지다가 쪼개저 부서지는 아주 연약한 자들이 된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도 마찬가지지 않았을까 싶다. 그는 젊은이였고 새로 시작하는 자였다. 그러나 그의 이상한 행보는 그의 주변사람 그 누구도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가장 사랑하는 이였던 로테조차도 그의 사랑을 어리석은 것으로 이해하며 그를 어리석은 개인으로 필터를 씌우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묻는다. 왜 숟가락을 들지 않느냐고 말이다. 그는 답하지 못했다. 그는 그것이 자신의 이성이 아닌 자신의 본성에 근거한 행위임을 알았지만 그런 것을 알면서도 결국에는 로테를 찾아가고야 마는 자신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 고통에 못이겨 자살하고야 만다. 그의 인생은 이해받지 못했다. 무시하고 치이기 일쑤였다. 계속 손을 흔들지만 무정하게 지나치는 사람들은 무심히 지나가고 태초의 어머니인 자연은 그저 위에서 무심히 빛난다. 베르테르의 슬픔을 이해하는 것은 이 세상 많은 청년들의 슬픔을 거의 대변하여 이해하는 것이므로 그를 이해하려는 자에게 지워지는 짐은 너무 크고 무거웠다. 그래서 결국 눈을 감고 나무와 같은 존재로 변한다. 이해받지 못한 그는 상처받는다. 이루지 못한 꿈도 로테가 될 수 있고 우리가 애원하는 많은 것들이 바로 로테가 상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로테는 이성적이고 인간 베르테르는 그에 비해서 지나치게 감성적이다. 로테는 현실도 된다. 나뭇잎이 스치면 소리가 나듯이 당연한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정당하며 기준에 어울리지 않으면 바로 무시해버리는 것, 그것이 로테라면 그 사실에 절망하고 고통스러운 것은 환상세계의 존재인 본능의 몫이다. 이해받지 못한 이들은 상처받고 더 본능적으로 변한다. 그러다가 베르테르는 짧은 삶을 끝낸다. 충돌하지 않으려 무시하고 내버려둔 이들은 한그루의 가로수가 되어 그를 무시하던 이들은 희생당하는 개인에 대한 배신을 저지르고 또한 비겁한 자가 되어서 사람들에게 또다른 절망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마음만 먹으면 그들은 따뜻한 존재가 되어 외로운 길을 가는 젊은이들에게 위로가 되는 하나의 등이 될 수 있었지만 시도가 없었고 뒤돌아서고 무시했던 자들에게는 이득이 없었지만 그 배후에서 많은 인간들이 무너져 내렸다.

인간은 사실 강한 존재는 보편적으로 아니다. 소리에 망가지고 곱씹고 멈추어서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물론 강한 사람도 있을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 동물이라도 옆에 있어야 안도하고 소속됨을 느끼기 시작한다.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 것에 상처입고 약해지는 몇 안되는 동물이다. 그리고 인간을 누구보다도 상처입히고 잘 치유하는 존재마저 인간이다. 사람은 칼과 붕대를 동시에 입안에 지닌 존재로써 이 삶에 임한다. 베르테르에게 어쩌면 조금 따뜻한 위로가 있었더라면 더 살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것이 아무도 주위에 없고 잡아줄 사람도 없어 일어났던 일이다. 그에게 관심이 있었더라면 그의 사랑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 따른 고통도 이해했다면 밀어내는 것이 아닌 이해하려는 시도가 더 필요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 베르테르 자체의 판단도 중요했다. 사실 무작정 그를 옹호할 수 없다. 사실 그는 죽으면 안되었다. 이 세상이 너무 아프다고 해서 자신이 죽어버리면 이 세계에 거대한 구멍을 만들어내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인간 그 자체만으로 인간사회를 이루지 않는다. 인간 그 자체만으로는 하나의 작은 섬과 다를 바가 없다. 그리고 그것들이 모여 인간의 사회를 형성하게 된다. 그런데 그 사이에 빈틈이 생기면 싱크홀로 변해 그 주변 일대까지 함께 무너트린다. 베르테르는 자신의 죽음에 얼마나 많은 의미가 담기는지 몰랐다. 이번 제주항공 참사로 인해 죽은 이들의 파장은 어마무시했다. 그 중 몇명이던 우리 학교는 그 아이의 죽음으로 졸업식까지 즐기지 못하였다. 생각보다 이 세상에서 죽음이란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자연에서 생물이 죽으면 곰팡이나 버섯 파리 육식동물들이 일용할 양식이 되고 그렇게 남은 찌꺼기는 결국 흙과 하나가 되며 그 기반 아래에 모든 것의 시작인 새싹이 피어난다. 그 무엇의 죽음도 쓸모없지 않다. 그 자체로 일으키는 파도는 곧 나비효과로 인해 쓰나미만큼 커질 수 있다. 칸트는 인간 개인에게 자기보존의 의무가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자신을 보존할 의무가 있다 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내가 사라지고 나서도 이 세상을 살아내야 할 개인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미안하지만 죽음은 개인에게만 효과를 미치지 않는다. 그 베르테르의 죽음 이후 그 주변인들에게는 많은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남의 사랑을 받으려고

애쓰지 말아라

먼저 사랑하라

그다음 사랑받으라


-톨스토이


그래서 누가 더 잘못한 것인지를 따지는 것은 사실 의미가 없다. 대신 모두에게 죄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그물망과 같이 하나의 네크워크를 이루는 개인들이다 적어보이는 연결고리이지만 그를 통해 여러 인물들이 연결되어있다. 초등학교때에 많이 하던 마니또도 마찬가지이다. 나의 마니또와 내가 그 대상이 되는 것 둘밖에 없는 관계이지만 다같이 그물처럼 연결될 때 낙오되는 사람들이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보기보다. 많은 의미가 담기고 따라서 오늘을 살아가는 개인들에게 감사하게 느낀다. 그저 살아주고 조금만 시선이 머물어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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