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인원 글쓰기>백지원
-
삶의 자잘한 습관은 내 처지가 바뀌어도 여전히 내 몸에 남아 숨쉰다.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 의 김부장은, 어릴적 겪은 경쟁으로 항상 자신의 형보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만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삼수를 해도 지방에 있는 대학밖에 가지 못했고, 항상 학교에서 받은 성적은 형이 훨씬 앞섰다. 일자리는 김부장이 조금 더 높은 자리에 있는 것 같다. 허나, 어른이 되어서 얻어낸 하나의 성과는, 어릴 때 겪었던 그 결핍과 관심, 우월감을 덮지 못한다. 그 탓에 김부장은 상무라는 위치에까지 도달하고 싶어했고, 자신을 크게 대우해주는 자신의 집 분위기를 갈구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갈증이 해결되지 않는듯, 그는 아낌없이 소주를 추가로 들이킨다.
드라마 첫 화에서는, 바나나라는 요소가 등장한다. 형만 먹을 수 있고, 겨우 부회장으로 떨어진 나는 못 먹는 바나나. 이 바나나가, 결국 하나의 아비투스, 즉 삶의 습관이 되어서, 여전히 좋은 조건을 갖춘 사람이 되었음에도 고작 바나나를 가장 좋아하는 사람처럼 먹는다. 어릴적 만들어진 결핍과 부족으로부터 형성된 나의 습관. 나에게 있어 바나나는 무엇인가.
항상 불안했던 사람은, 커서 편하고 안정적인 시기에 들어와서도 불안했을 때의 버릇을 고치지 못한다. 그래서 항상 그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예를 들면 거짓말을 치고 있는 듯한 상황을 자아내는 등의 오해 말이다. 아니면 큰소리에 노출되었던 탓에, 지금은 하나도 겁나지 않는 상황에서도 큰소리에 움찔하고 놀란다. 이는 금방 불안에 들어가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를 갖춘 아이가 바로 나다. 옷에 보면, 옷 밑으로 박음질이 된 부분들이 둘러싸여있는데, 나는 그 부분을 손가락으로 거의 광적으로 문지르고 만진다. 엄마의 말로는 예전부터 늘 그래왔다던데, 이는 딱 몇주는 버틸 수 있지만, 하지 말아야 한다는 강한 의지를 머릿속으로 되새기지 않는 그 무의식의 순간이 찾아올 때면 항상 내 손은 다시 그 옷의 박음질 부분으로 내려가 있다. 지금도 생각을 잠시 하며 잠옷의 밑부분을 문질렀다.
그리고 나는 금방 깜짝깜짝 놀란다. 사실 이 두가지의 것들은 자주 글에서 언급한 감이 있어 그닥 무거운 주제처럼 느껴지지는 않는다.
귀로 소리를 잘 듣지 못하는 사람들은 잘 놀라지 않는다고 누군가가 말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남들의 말을 예전부터 잘 듣지 못해 사오정이라는 별명을 자주 달았던 나는 이 말에 항상 동의하지 못했다. 왜 나는 이렇게 소리에 예민할까. 도로에서 클락션 소리가 들릴 때 다른 이들이 가만히 있을 때마다 소리 지르는 아이는 나 뿐이다. 아이들은 귀신이 붙잡은 것처럼 놀라는 나를 보면서 왜 그리 호들갑이냐고 한 마디 한다. 나는 항상 생각해왔다. 그렇게 큰 소리를 많이 들어서 움찔했으면, 지금쯤 적응해야 맞는 것 아닐까. 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기억 속 하나의 두려우면서도 짜증나고, 더러우면서도 징그러운, 소름끼치면서도 죽이고 싶은 그런 하나의 조각으로 남아서, 결국 내 안의 평생의 무섭지 않은 트라우마로 남았다. 음, 사실 정정하자면, 무섭지 않은 건 아니다.
책 ’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 의 주인공 옥주는 자신을 폭력하고 애정을 주지 않았던 엄마에 대해 묘사했다. “나는 내가 엄마를 보고 싶어서 온 줄 알았거든? 이제 좀 컸으니까 엄마가 만만해 보일 줄 알았거든? 막 드라마 같은 거 보면 자식이 커서 부모님이 작아지고 그러잖아. 그럴 줄 알았어. 그럼 내가 엄마를 이해할 줄 알았고, 엄마가 나한테 미안함을 느끼거나 막 무서워할 줄 알았어. 근데 아니더라? 하나도 안 변했더라? 엄마는 내가 아직도 애새끼로 보이고, 나는 아직도…”
이 문장을 보며, 괜히 항상 쎈 척을 부렸던 내 모습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혼자 떠는 모습을 숨기고, 괜히 불안을 티내기 싫어 옷 밑부분을 만지지 않으려 노력하고, 큰 소리에도 놀라지 않으려 표정을 관리하던 내 모습. 나는 정말로 강해진 것이 맞을까. 나는 아직 여전히 작다는 것을 느꼈다. 이 습관과 아비투스는 영원히 내 삶에서 떠나지 않은 것이었고, 내가 그 때 느꼈던 거지같은 느낌은 여전히 내 마음속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그래서 너무너무너무너무 싫었다. 혼자 겁먹은 체, 그럼에도 다시는 무시받기 싫고 똑같이 당하기 싫어 겁이 없는 척 하며 살야아 하는 내가 가끔, 아주 가끔 싫었다. 이 습관들이, 이 바나나가 내 삶에서 떠났으면 좋겠다. 나한테 있어서 아비투스는, 알레르기가 있는 김부장의 바나나였다.
이런 불안을 가지고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더더욱 불안했다. 엄마에게 받은 사랑은 너무나 커서, 항상 남들에게 명확하고 자주 표현하는 내 애정표현이 부족하다고 의심한 적은 없다. 하지만, 여전히 내 몸 어딘가에는 그 더러운 것이 남아서, 아주 많이 그 모습과 똑같은 내 모습이 나오고, 나는 항상 그 모습을 제어할 수 없음에 참 많은 생각을 갖게 된다. 책 ‘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 에서의 문장 하나가 나의 지금 이 감정을 표현한다.
“쉰 살이라는 건 너무도 완전한 어른 같았고, 제대로 된 어른이 되지 못했다면 존재할 가치가 없어보였다. 온전하지 못한 상태로 사회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염치없어 보이기도 했다. 그러니 한마디로 쉰살이 된다는 건 제대로 된 어른이어야만 한다는 것인데, 우리는 그런 어른이 될 수 없을 것 같았다. 우리는 우리 부모의 유전자를 받았으니까. 우리의 유전자에는 그들의 난폭함이 깃들어있을테니까 이런 유전자는 대물림되지 않도록 끊어내야하는 것이 우리의 숙명처럼 느껴졌다. 그러다 셋 중 누군가 쉰까지 살아가게 된다면, 저승에서라도 그 후기를 들려주자고 약속하지 않았던가.”
나는 내 유전에 대해 의심한 적이 없었다. 분명 좋은 아이를 키워낼 수 있고, 분명 나보다 더 멀리 나갈 수 있는 아이를, 그리고 나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친절과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아이를 키워낼 수 있겠다고 홀로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것만이 유전될 수 있다면, 세상의 모든 아이들은 좋은 유전자를 받은 아이들만 살아가야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유전 뿐만이 아니라, 여전히 내가 삶에서 배웠던 것들을 밖으로 배출하고 있는데, 어른이 된다고 해서 그 행동을 아이 앞에서 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무언가 끊어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문장이었다. 내가 받은 사랑을 누군가에게 전하는 것은 너무나 이로운 일이지만, 여전히 나는 내가 그 좋은 것만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겠다. 김부장이 연세대인 아들에게 재수해서 서울대에 가는 건 어떻겠냐고 묻고, 의사에게도 자신이 사교육만큼은 열심히 시켰다고 자랑한 것처럼, 결국 나도 내가 겪은 것만 더 퍼주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언젠가는 보여주지 않을까. 어쩌면 이 습관도, 그 아이에게 대물림되어 없어야 할 불안으로 자리잡는 것은 아닐까. 나는 싫다. 아이에게 이 불필요한 불안을 다시 물려주어야 한다는 것이 말이다. 위축되지 않은 척 하는 건 힘든 일이다. 이런 힘든 길을 걷게 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맨날 눈물 흘리는 아이를 모른 척하며 견뎌내도록 하는 것도 싫다.
나는 이 알레르기를 물려주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