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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올라가기 위해서 하는 다이빙

by 제이티

조가람






아직도 기억이 난다. 도저히 아름답다라는 말로 부족할 정도로 찬란하게 빛나는 금메달을 작디 작은 손으로 겨우 떠받치고 눈물 고인 얼굴로 환한 미소를 지으며 사진을 찍은 그 날. 하지만, 난 그 날 이후부터 점점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이유도 모르는 채, 그저 잠에 들지 못하는 날이 많아졌다.


난 '늦은' 아이었다. 뭘 하던 간에 시기를 놓쳐버린 아이. 지금 해봤자 다른 아이들보다 부족할 거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난 무리하게 달렸다. 그렇게 생겨난 나의 바나나는 그저 조그만한 인정이었다. 나의 아비투스는 잘하는 것도, 따라잡는 것도, 무언가를 얻는 것도 아닌, 그저 인정이 고팠다. 난 항상 안될 거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는 말이 내 최선의 이유이다.


“가람이 정도면 금메달이지” “가람이 정도면 거의 1등 아니겠어?” “가람이 정도면…”

나 정도면. 나 정도면이 무슨 기준인가. 나 정도면은 대체 어떤 것을 뜻하는가. 나 정도면 1등? 나 정도면 금메달? 이런 말을 들어도 기분이 좋지 않다. 항상 ”가람이 정도면“ 이라는 뒤에는 밑으로 하강할 것이라는 유감스러운 듯한 어른들의 목소리가 이미 나의 트라우마가 되었기 때문에. 난 그들의 그 안타깝다는 듯한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고작 그 위로와 인정이 뭐가 어렵다고. 이렇게 열심히 달리는데.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그걸 보고도 왜 인정 해주지 않는 것일까. 과거의 나에게 세상은 너무 각박하고 차가웠다. 따뜻하게 보호받아야 될 어린새는 일찍부터 차가운 바람에 항상 굴복하고 날개를 피지 못했다. 남들이 전부 날아오를 땐, 난 남들의 지적에 항상 날아올라야 할 날개로 아래로 낙하했다. 모두가 그러는 줄 알아서. 다들 그렇게 날 평가해서. ”아마 가람이 정도면“ 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도 모르게 내 손가락에서 피가 날 때까지 손톱을 뜯는다. 그냥 그래야만 마음이 안정된다. 그냥 그래야만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 숨이 차오를 떄까지 뛰는 것보다, 이상하게도 그렇게 손톱을 뜯을 때마다 마음이 안정되었다. 1등을 하고, 금메달을 따도 손톱을 뜯는 것을 멈출 수가 없다. 어쩌면, 인정은 나의 아비투스가 아닌 추잡스러운 욕망이고, 손톱을 뜯는 것이 내 진정한 아비투스가 아닐까 라는 의심까지 들게 만든다.


책 <일만 번의 다이빙>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하루에 수십 번을 다이빙대 위에서 아래로 뛰어내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위태롭고 불안했다. 완벽한 연기를 선보이는 날이 있는가 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날도 있었다. 어떤 게 진짜 나의 실력인지 다이빙대에서 발끝을 떨어뜨리는 순간에도 알 수가 없었다.”

난 이 책을 읽은지 거의 1년이 다 되가도, 이 구절을 절대 잊을 수 없다. 잊지 않기 위해 필사까지 해두었다. 필사만으로는 부족해서 항상 그 구절을 읊어내린다. 읊어내리는 것만으로 부족해서 공책 작은 공백에 이 구절을 가득 채워놓는다. 난 항상 내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열심히 해도 무언가 내 몸에 남아있지 않는 기분이다. 하루에 수영코트를 100번을 돌아도, 하루에 발차기를 1000번을 차도, 하루에 교과서를 20번 봐도, 하루에 문제를 300문제 풀어도 난 항상 콩쥐팥쥐에 나오는 깨져버린 독처럼 물이 바닥으로 흘러내려 절대 채워낼 수 없는 항아리처럼 느껴진다. 그럴수록 난 내가 너무 작아진다. 작아지고, 작아지고, 한없이 작아져서, 고개를 푸욱 숙여야 볼 수 있을 정도로 작아져서 나 홀로 자책하고, 나 홀로 무너지고, 나 홀로 포기하고, 나 홀로 울부짖는다. 누군가가 이런 내 모습을 봐도 넌 여전히 높은 곳에 있어 라는 말을 해주길 바라면서. 그런 걸 바라는 것조차 이기적이라는 걸 알아도 난 멈출 수 없었다.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가, 주변에서 날 향하는 소리가 미치도록 울렁차도, 난 내 심장소리 밖에 들리지 않아서. 무대 위에 섰을 때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 밖에 들리지 않지만, 나는 내 심장소리 밖에 들리지 않는다는 후배의 말을 들어서. 일만 번을 뛰어내려도 부족할 나 자신이라 난 멈출 수 없었다. 나도, 내가 높은 곳에 있다는 걸 인정받고 싶어서. 단지 그것 뿐이었다.


좋은 직장을 가졌어도 부족하다. 조금 더 높이 올라가고 싶다. 사람들에게는 모두 그런 욕망이 있다. 끝없이 팽창하는 멈출 수 없는 욕망. 추잡스럽지만, 때론 경외스럽고 비참하지만, 때론 날 일으켜주며, 더럽지만 날 다시 일어서게 해주는 그런 욕망. 하지만, 김부장의 바나나를 우리는 욕망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는 좋은 직장과 부장이라는 계급을 달고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하나의 3천원 밖에 하지 않은 바나나를 갈망한다.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어도 멈출 수 없는 습관. 나는 그런 습관이 사회적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던 과거의 후회로부터 온다고 나는 생각한다. 김부장이 바나나를 갈망했던 이유는 집이 너무 가난한 탓에, 지금은 3천원 밖에 안하지만, 과거에는 3천원이나 했던 바나나를 먹지 못했기에. 모든 사람들이 바나나를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기에. 처음으로 바나나라는 그 흔한 열대 과일로부터 사회적 기대에 박탈당했던 김부장은 시간이 지나도 바나나를 먹을 때마다 괴리감이 들 것이다. 과거에는 먹지 못해서 바라만 보던 바나나인데, 지금은 아무렇지 않게 하나를 집어들어서 껍질을 까고 한 입 크게 베어먹을 수 있게 되어서.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한 절대 채울 수 없는 깨져버린 독으로 남았기에 그들은 깨진 와인잔에 와인을 게속해서 들이붓는다. 나에게 바나나가 인정인 것처럼. 나도 내가 운동을 못한다고 말은 안한다. 그렇다고 잘한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일종의 양심이자, 가식적인 겸손이라고 해야할까나. 그럼에도 나는 “가람이 운동 잘하네” 라는 말을 미치도록 갈망한다. “가람이 열심히 했구나” 라는 이 말을 미치도록 갈망한다. 이상했다. 나는 금메달을 얻었는데. 나는 트로피를 들어봤는데. 너무 쉽게 입 밖에서 튀어나오는 그 말들은 집을 순간도 없이 귀에 흘러들어가 사라져서 그럴까. 그건 너무 뻔한 이유이다. 그냥, 그냥 기분이 좋아서 라는 이유가 더 나을 것 같다. 잡으면 사라지는 그런 이유가 아닌, 그냥 기분이 좋아서. 이건 마치, 손에 잡을 수 있다는 터무니 없는 착각으로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나는, 당신은, 우리는 깨진 독이 아니다. 그저 이 독이 내가 품을 수 없을 만큼 큰 것 뿐이다. 무수한 가능성을 담아낼 수 있을 정도로 우리는 그 큰 독이라는 것. 그래서 채워도, 채워도 항상 부족한 것처럼 느껴질 수 밖에 없다. 난 담아내기에 충분히 크니까. 나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다. 꾸준히 채워지고 있었고, 난 독을 채우면서 내 모든 것을 쏟아내고 왔을 뿐이다. 모두가 마찬가지이다. 사회적 기대는 그저 우리가 일관적으로 바라보는 주관적인 기준이지, 그 누구도 정해주지 않은 허공의 기준일 뿐이다. 그것에 못미치면 우리가 죽나. 서울대 못가면 죽나. 대기업에 못들어가면 죽나.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다. 사회에 맞춰서 살다보면, 우리는 우리의 색을 잃는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별이다. 모양도, 질량도, 색깔도, 온도도 전부 미세하게 다른 세상에 딱 하나 뿐인 별. 그런 사회적 기대라는 허공의 기준으로 무너져서 그 결점으르 가지고 자신의 후대에게 물려줄 것인가. 그런 내 허점을 계속해서 이어나갈 것인가. 당연히 글로 풀어써내리는 것은 쉽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우리가 갈망하는 바나나가 모두가 갈망하는 바나나라면, 누군가는 얻을 것이고 누군가는 못얻을 것이 당연하다. 그런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피가 나도록 손톱을 뜯었던 나도, 이제는 고쳐낼 것이다. 너무 과하게 갈망하는 바나나를 오래 곁에 두고 있으면, 그저 나만 힘들어지니까. 조금 멀리 떨어트려두자. 하나의 트라우마로 생긴 채워낼 수 없는 빈자리를 홀로 두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지만, 그 다음 것을 채워내기 위해서, 우리는 채워낼 것이 너무 많기에 그런 것에 내가 모아둔 것을 쏟아붓기엔 아깝지 않냐는 말이다.


“하늘 좀 봐라. 우리는 너무 바닥만 보고 뛰어. 그래서 가끔 우리 머리 위에 저렇게 근사한 별이 있다는 걸 까먹어.” 별을 보았다. 아직 여물지 않아 작지만 반짝이는 별을. - <일만 번의 다이빙>


그거 알고있나? 다이빙을 하기 위해서는 위를 봐야한다. 아래를 보면서 착지하는 것이 아닌, 위를 보면서 떨어지면서 두려움을 극복한다. 웃기고 모순적이지만, 누구나 아래를 보는 건 두렵고, 다이빙은 내가 직접 아래로 뛰어내리는 일이기 때문에, 나는 항상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 다이빙을 한다는 코치님의 터무니 없는 말을 믿어왔다.


누군가의 기준에 맞지 않아, 항상 움츠리던 나도, 누군가와 동등한 높이가 되고 싶어 바닥만 보면서 뛰어온 누군가도 우리가 정말 갈망하는 것이 하늘에 있는지 땅 위에 있는지 다시 주위를 둘러봤으면 한다. 높은 곳에 서있으면서 아래를 보는 건, 누군가의 실패를 갈망하는 이들의 군침을 돋을 뿐, 높은 곳에 서있다면 더더욱 높은 곳으로 가기 위해 위를 보는 것이 당연한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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