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영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외고에 떨어진 사람과 좋은 학군지 고등학교에 붙은 사람, 둘은 친구가 없다. 왜 그들은 우리나라에서 친구가 될 수 없는가? 그 까닭은 우리나라가 너무 좁고, 경쟁의 분야가 단 하나에 몰두되어 있기 때문이다. 당장 우리나라의 경쟁은 모두 공부로 모인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그 모든 것들이 대학이라는 하나의 수단으로 귀결된다. 대한민국 학생이라면 모두 경쟁을 해서 공부 순위를 정해야 하고, 집단을 강조하면서도, 개인주의를 강조한다. "결국 인생에 친구는 너 하나 밖에 없다' 라는 사상을 계속 주입한다. 그게 대한민국 사회다. 그렇기에 결국 그 둘은 아무리 친한 친구라고 해도, 끊임없이 동네 일반고와 학군지 일반고라는 타이틀로 비교받고, 동네 일반고에 다니는 쪽이 공부를 잘해도 "저쪽은 내신따기 쉬우니 그러지" 라는 비교를 당한다. 그렇다고 학군지 일반고에 다니는 경우가 쉬운 것도 아니다. "경쟁에서 밀리면 안돼." "너 그러다 일반고 애한테 내신 따여서 결국 대학은 걔가 더 좋은데 간다?" 같은 반협박 같은 조언으로 둘의 사이는 점점 멀어진다. 애초에 경쟁 조건을 동시에 붙여놓고, 성공이라는 민감한 주제로 경쟁자화되기 시작한 둘은, 이미 시작부터 친구라기보다는 친구의 형태를 가장한 경쟁자 아니었을까?
나는 규민이와 수환이를 시기하거나 경쟁 심리를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성적보다 피지컬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규민이는 조금 부럽긴 하다. 하지만 나는 그들과 비교하면서 불행함을 느끼고, 우울함과 무기력함을 느끼는가? 아니다. 그 까닭은, 그들과 내가 살아가는 삶의 가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시험끝나고, 하루도 빠짐없이 운동을 나갔던 것 같다. 솔직히 말해서 요즘 운동이 잘 안된다. 아파트 헬스장이 너무 낡고,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자극도 잘 안먹는다. 하지만 여전히 그렇게 언젠가는 오게 될 자극을 찾기 위해서 빡세게 당기고 오면, 다음날 침대에서 욕 없이는 일어날 수 없게 되는 그 뻐근하고 뭉치는 근육통, 그 느낌이 너무 좋다. 운동은 귀속지위가 아닌 오직 성취지위다. 내가 노력하면 된다. 아무리 멸치여도 식단을 잘 하고 벌크업을 하다보면 살이 붙고 근육이 붙어서 멋진 몸이 되고, 나같이 돼지도 먹는거 좀 줄이고 운동하다보면 80kg에 가까운 체중에서 70kg로 감량하고 어느정도 힘도 붙을 수 있다. 그 노력에 따라서 공정하게 보상받는 운동의 그 느낌. 나는 그 온저한 성취지위 그게 나에게 되게 크게 다가왔다. 공부도 그렇다고, 수환이도 그렇게 따지면 성취지위로 노력을 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공부도, 앉아있는 것도, 배우는 것도, 수를 머릿속에서 굴리고 기하와 방정식들을 손과 머리의 정교한 티키타카 연계 플레이로 풀어나가는 것은 과연 노력만으로 될까? 운동은 다르다. 직관적이다. 내가 멸치여도, 핑크 덤벨밖에 못들어도 당기다보면 어느 순간 '무조건' 는다. 나는 그 공정함이 좋았다. 이 세상이 너무 불공평하기에, 나는 그 공정함에 떠욱 집착한 것 같다.
나는 결국 강제성이 자유의지를 만든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운동, 항상 그것만 생각하는 운동은 왜 시작했는가? 방학 동안 정탄 선생님 집에 가있을 동안 선생님이 운동을 시키면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방학 내내 그걸 하다보니까 프라이드, 여기서 탑을 찍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게 자유의지로, 가지말라 가지말라 해도 운동을 기어이 가고야 마는 나라는 사람으로 변해있었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다. 시작에서는 강한 강제의지가 필요하다. 국가의 경우도 경제발전과 같이 시작 스퍼트가 중요한 사업에서는, 강력한 강제성이 매우 필요하다. 우리나라 역시 과거 1960~80년대 경제 발전 시기, 박정희 대통령이 강력한 중앙통제,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하고 경제와 기업, 노동자에게 강제성 즉 국가차원에서의 일종의 '탄압'을 가하자 결국 경제 발전에 있어서 큰 효과를 보았다. 하지만 그 강압은 오래 유지되지 않는다. 결국 강압으로 효과를 내던 것은 우리나라에서도 87년 6월 항쟁 이후로 무너졌다. 다른 분야에서도 강압은 초반 스퍼트에서는 매우 좋은 효율을 보여주나, 결국 실패한다, 나는 부산에서 사실 운동을 배우러간게 아니라, 공부를 배우러 갔다. 그곳에서는 매일 강제로 150에서 200문제, 많으면 250문제까지도 찍어본 날이 있다. 그것은 강압에 의한 것이었다. 하지만 집에 돌아오고 강압이 사라지니, 그 스퍼트는 없어졌다. 결국 내가 하려던 자유의지가 강제성의 종료 이후에도 수반되지 않으니, 발전이 이뤄지지 않은 것이다. 결국 강제성과 자유의지는 상호대립이 아니라, 상호의존적 관계를 띄는 것이다.
교육은 낙인을 찍는게 되면 안된다. 우리 사회에는 많은 사람이 있다. 당장 운동으로만 따져도 운동하는 스타일이 다르다. 프레임이 좋아서 거기다가 붙이는 사람, 아니면 처음부터 만드는 사람, 중량 잘 드는 사람, 가동범위 좋은 사람, 깡이 좋은 사람... 당장 좁은 헬스장 하나에서도 많은 인간군상이 있다. 하지만 그 모든 인간군상을 하나의 시험 제도 안에서 평가하고, 그걸로 사람들을 낙인찍으면 어떻게 될까? '낙인 효과' 라는 학설이 있다. 사람을 패배자로, 사회실패자로, 인생실패자로 낙인을 찍기 시작하면 그 사람은 진짜 낙인처럼, 그 패배자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jt 스쿨에서 교재제작을 하시다 그만 군입대를 하신 김동욱 선생님께서는 군대에서 지랄하는 새끼들은 꼭 고졸이라는 명언을 남기셨다. 나는 동욱 선생님의 그 말씀에 동의한다. 고졸들은 지랄맞다. 하지만 고졸들이 왜 지랄하는지, 우리는 생각해보았는가? 나는 그 까닭이 우리가 고졸을 낙인찍고, 지잡대와 전문대생들을 급을 나누고 낙인효과를 부여하니 그들이 더욱 열등감과 모멸감, 수치심을 가지고 동욱 선생님과 같은 좋은 학벌의 사람들에게 화를 내고, 갈구고, 가혹행위를 하는 것이다. 독일의 경우, 어린 애들을 나눠서 원하는 경우에는 공부 대신, 직업학교로 보내서 bmw나 다른 중소기업 등에 취직 시키는 제도를 유지하고 있다. 솔직히 모든 사람이 공부를 할 수는 없다. 공부할 수 있는 애들은 반에서 한명 아니면 두명, 많아도 세명을 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남은 27명은 모두 패배자인가? 아니다. 그들은 모두 각각 재능이 있고 운동 스타일이 다르듯 개인의 특성이 있다. 그리고 물론 현실적으로 그들의 특성을 각각 나눠서 해줄 순 없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나라처럼 한 구멍에 몰아넣고 구멍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을 패배자라고 욕하기 보단, 그들에게 구멍을 하나 더 만들어주는 것. 그게 교육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교육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학교는 사회화를 위해서 만들어진다. 학생을 건실한 사회인으로, 학생을 적어도 본인의 인생 앞가림을 잘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학교의 목적이다. 하지만 지금 학교는,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가? 딸배, 양아치, 고졸을 양성하고 있다. 그들도 한때는 꿈이 있었을 것이고 무엇이라도 잘하는게 하나쯤은 있었을 것이다. 그게 공부가 아니라면, 적어도 그들에게 하나의 길을 더 열어줘 사회를 건실히 살아갈 가능성을 높이는 것. 나는 그게 교육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