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델리시무스 왕

by 제이티

박재영


카이사르는 로마 안에서 영웅이고, 왕이며,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서방의 한신과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그는 그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한신처럼 주제 넘는 경거망동으로 본인의 명을 재촉하지 않는, 현명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왕(rex)라는 칭호를 거부하고, 그저 종신 독재관으로 남았다. 그는 그의 한계, 아니 로마 전체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영민했던 카이사르는 본인의 제목, 로마의 습성을 종합한 끝에 절대 권력을 얻는 정도로 실력이 증명할 수 있는 한계선에서 멈추고, 명예로운 최후를 맞았다. 그리고, 그의 후대는 그를 기리기 위해서 그의 양자 아우구수트, 그리고 그의 이름 카이사르를 칭송했고 이는 곧 로마의 상징으로 변했다. 하지만, 로마가 점차 전성기의 힘을 잃어가고, 쇠퇴해 가는 군인 황제 시기 수 많은 아둔한 자들은 카이사르의 힘을 빌려 주제넘는 권력을 찾으려 했다. 그리고 그 권력은, 카이사르의 이름을 빌린 자보다 카이사르의 이름을 빌리게 조언한 몇몇 실력자들에게 넘어갔고 로마의 빛나는 공화정은 그렇게 전제정으로, 이제는 과두정으로 변모하며 차츰 쇠락의 길을 걷는다. 결국 카이사르의 이름은 명예로운 종신독재관에서, 절대권력은 물론 로마 시내도 확보하지 못하는 어중이떠중이들의 전유물로 변모하게 된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에서 올림포스의 신이 되기 위한 모든 과정을 통과한 미카엘 팽송은 선택된 엘리트였다. 그는 인고의 시간 끝에 인간 사회를 관찰하고 개입하며 문명을 설계하는 위대한 자리에 올랐고, 마침내 고대하던 스스로를 신이라 믿게 되는 날이 온다. 그러나 이야기의 끝에서 드러나는 진실은 미카엘에게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미카엘은 창조자가 아니었다, 그저 더 위에 존재하는 신의 신에게, 누군가의 의도에 따라 움직이는 하나의 체스판 속 폰에 불과했다. 로마 말기의 수많은 ‘카이사르’들이 실체 없는 권위를 빌려 권좌에 앉았듯, 오늘의 사회 역시 구조를 떠받치는 역할보다 이름과 위치를 탐한다. 우리 스스로의 주제를 모르고 말이다. 인간 모두는 신도, 카이사르도 될 수 없다. 결국 또 카이사르가 되기 위해 필요 이상의 자원을 쏟아부어, 실체 없는 권력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 또한 그 위의, 재능과 투자 모든 것이 결합된 또다른 윗사람에게 지배받는 자본주의 사회 속 하나의 장기말이 될 뿐이다. 모두가 카이사르를 자처하는 사회에서 국가는 과연 어디로 향할 수 있을까.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이 있다. 체스판에서, 장기판에서 졸과 폰은 직선으로 이동하며, 때로는 상과 나이트, 비숍과 룩, 차와 말의 진격로를 위해 비켜줘야 하기도 하고 그들을 지키기 위해서 희생해야 하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장기말들이 신이 되려고, 말그대로 항우가 되려고 유방이 되려고 시도한다면 어떻게 될까? 신이 되려 한 장기말과, 카이사르를 흉내 낸 군인 황제들 사이의 간극은 현재 2025년 대한민국과 종이 한 장 차이로 똑같다.


로마가 카이사르라는 이름만 남기고 실체를 잃어갔듯, 오늘의 대한민국 역시 산업의 기초와 역할의 균형을 잃어가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제조업은 여전히 국가 경제의 핵심 축임에도 불구하고, 전체 취업자 가운데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15%대까지 하락하며 역대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생산 공장은 남아 있으나 사람을 붙잡아 두는 힘은 사라지고 있는 셈이다. 동시에 국회예산정책처와 고용 관련 연구기관들은 인구 구조 변화로 인해 향후 노동력 부족이 심화될 것이라 경고하며, 특히 제조업 현장에서만 수십만 명 규모의 인력 공백이 발생할 가능성을 지적한다. 그럼에도 사회적 선택은 정반대 방향으로 흐른다. OECD와 국내 정책 보고서들이 반복해서 지적하듯, 한국 사회는 현장 엔지니어와 숙련 기술 인력의 부족을 겪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청년 인재는 제조와 기술을 떠나 소수의 ‘상징적 직위’로 쏠린다. 또한 이러한 인력난을 무조건 제한없는 외국인 노동자의 수급으로 매꾸기에는 그 비용적 손실과 사회 안전망 차원, 그리고 갈등을 봉합해야하는 사회안정 측면에서 모두 무리한 선택이다. 모두가 카이사르의 이름을 원하지만, 원로원은 현자들의 건설적 토론 장소가 아니라 동네 노인정이 되어갔고, 그토록 강력했던 로마 군은 그 말기에는 거의 군벌처럼 움직였다, 한국에서 현재 장인의 자리는 비워져간다. 결과적으로 빈 권좌와 상징적 지위만 남고 제국이 내부에서부터 무너졌던 로마의 말기는 엎어져 자면서 들은 역사 수업 속 내용이 아니다.


잔인한 말일 순 있겠지만, 우리 모두는 결국 장기말일 뿐이다. <신>에서는 엄격한 신의 과정을 겪은 사람조차 결국 협력, 지배, 중립 세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고 그 분야의 신이 된다. 그리고 그 신조차 더 거대한 누군가의 장기말이 될 뿐이다. 장기말은 판 위에서 각각의 역할이 있다. 누구는 손기술이 좋아 엔지니어가 적합할 것이고, 누구는 의지와 체력이 좋아 군인이나 체육업계가, 누구에게는 언어능력이 좋아 정치외교 분야가 탁월할 것이다. 그렇게 서로의 능력에 맞게 특화되어 살아가야 사회는 최적화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각자 위치에서 각자의 일을 할 때, 협력 중립 지배로 나뉘어서 신을 양성하는 사후세계가 더 큰 분의 지휘 아래 하나가 되고 발전해나가고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던 것처럼 사회도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 하지만 현대 한국 사회는 어떤가? 모두가 같은 학교에서 펜 대 만 잡고 있다. 그리고 누구는 45분, 50분의 수업시간동안 머릿속에 중요한 정보를 습득하고 누구는 운동계획을 세우고 있고 누구는 아예 엎어져 자고 있다. 이것은 개인의 게으름 문제라고 보기에는 이미 우리 세대 안에서 그렇게 분열된 교실이 너무나도 눈에 띈다. 모두에게 집중하고 있는 것은 다른데 강요된 환경은 하나니, 목표라도 같았던 과거보다 훨씬 혼란스러운 환경에 우리는 놓인 것이다. 결국 그 같은 목표 안에서 적성이 다른 사람들은 점차 정해진 경로에서 튕겨나가고, 우리는 그들을 병신, 탈선자, 인생패배자, 야가다 라고 비난한다. 하지만 우리는 뭐 더 잘난 것이 있는가? 그들은 일찍이 강요된 하나의 목표가 그들의 적성이 아님을 인지하고, 그들의 길을 간 것일 뿐이다. 오히려 잘 못하는, 적성에도 맞지않는 펜 대만 잡고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는 우리가, 아둔한 카이사르의 이름을 빌리던 군인 황제와 다를게 무엇인가?


아둔한 군인 황제들은 이름만 빌렸던 스스로의 주제를 감히 카이사르라는 위대한 작위, 위대한 이름에 비교했다. 우리는 그 역사를 들으며 웃었다. 하지만 우리는 의대반, 스카이반, 의대를 목표로 한다는 거창한 직위를 달아놓고 정작 수업 시간에는 엎어져 자고, 별 쓸모없는 스크롤만 반복한다. 이런 우리라고 해서, 쓰레기는 아니다. 다만 공부가 적성에 안 맞고 원하지 않는 걸 억지로 하고 있었을 뿐이다. 분명 다른 길을 찾으면 뭐라도 나올 것이다. 군인 황제들 역시도, 황제가 될 됨됨이는 아니었으나, 군대를 통솔하고 자기 사람들로 무언가를 도모하는 일에는 탁월한 재능이 있어 나름 고위직까지 올랐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온전히 군대에 있을 때, 원로원은 와인을 마시고 잡담을 나누는 노인정이 아니라 현자들의 건설적인 토론 장소가 되었을 것이고 로마군은 최강의 지휘력과 통솔력을 가진 대제국의 군대가 됐을 것이고, 로마 역시 강해졌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나라도, 우리 모두가 카이사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 독일의 경우, 중소기업 위주의 제조업/서비스업이 굉장히 탄탄히 잡혀있다. 우리나라의 열악한 일명 ‘좋소’기업과 다르게 가족중심, 지역중심의 기업임에도 정부 지원 및 직업학교에서의 인력수급으로 굉장히 시장 자체가 활기차다. 그들과 대기업의 연계 중심으로 독일 경제는 돌아가며, 독일 청년들 역시 김나지움과 직업학교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게 되며 스스로 공부가 길이 아니라고 판단했을 시에는 적어도 우리나라 같은 멸시 없이 기술자의 길을 걸을 수 있다. 현실적인 모델로 일본 역시 장인 위주의 경제가 잘 돌아간다. 일본에서는 100년, 20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기업이 굉장히 많고, 가족 위주의 노포 역시 많다. 적어도 멸시는 받을지언정, 우리나라처럼 아예 먹고살 길, 성공할 길이 막막한 일은 없는 것이다. 공부를 하지 않아야 한다는게 아니다. 이것은 운동이든 프로스포츠든 모든 것에 통용되는 이야기고, 오히려 공부보다는 그런 프로스포츠에 더 맞는 이야기다. 하지만, 가장 재능이 무시받는 영역인 공부에서 그저 모두에게 통용되는 하나의 길이 막히더라도, 그 길로 카이사르가 되는 걸 우리가 못하는 걸 알더라도 그 속에서 방황하고 비난받는 현재가 아니라, 적어도 합법적으로 뭐 하나라도 먹고 살 길을 내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초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내가 아주 영특하고 똑똑한 줄 알았다. 하지만 중학교에 들어오니 그 환상이 와장창 깨졌다. 국어도 첫 시험때는 부진했고 사회나 도덕, 기가도 하루 공부하고 시험보기엔 무리가 좀 많았다. 그걸 깨달으면서 나는 서서히 내가 카이사르가 아니라 로마의 흔한 이름 없는 군인 황제이자 독재관의 이름을 흉내낸 카리누스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내 인생이라는 제국의 역사를 써내려간 것이 아니라 남의 인생에 기생하는 존재였다는 걸 깨달았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경쟁하면서, 그걸 깨닫게 된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그걸 사회에서, 대학에서, 수능에서 깨닫기도 한다. 냉혹하고 현실적이며 염세적인 이야기긴 하지만, 우리 중 대다수는 카이사르가 될 수 없다. 그것은 오직 1퍼센트의 이야기다. 그렇다고 우리 같은 카리누스가 과연 무능하고 아둔한 존재였다고만 하나? 그건 아니다. 그도 만약 평시에 태어났으면 평범한 로마 귀족, 그저 그런 로마의 장군으로 살다가 제 명에 죽었을 것이다. 결국 카이사르가 아닌 카이사르들은 모두 제 명을 재촉했고 불안을 야기했다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카이사르가 아닌 사람들은 카이사르가 되려는게 아니라 그 자리에서 최선이 되려고, 그게 장군이든 집정관이든 원로원의 의원이든, 잘하는 걸 잘하려고 노력해야 되지 않을까. 이는 운동도, 공부도, 모든 것에서 통용되는 이야기다. 현실을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다. 결국 우리 모두는 체스판 위의 한 말이니, 그 사실을 인정하고 행동해야 하지 않냐는 말이다. 우리가 꿈꾸는 카이사르는 초기에는 위대한 사람, 대기업의 ceo이자 엄청난 부를 쥐고 있는 그런 허상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무리하게 본인에 맞지 않는 일을 벌여 될 수 있는 카이사르는, 우리의 주제에 맞게 그저 그 이름을 빌린 허황 속 성공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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