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병에 걸린 1달러

by 제이티

올인원 2025 12 28 <공정하다는 착각>


유지민




한 남성이 무대 위로 오른다. 그는 연설을 시작한다. 달러 지폐 하나를 꺼내곤 그것을 찢고 밟고 구긴다. 그는 그것을 다시 들곤 이 지폐가 달러로써의 가치를 잃었느냐고 관중에게 묻는다. 그는 목소리를 높여 한 사람의 가치는 바뀌지 않는다고 말한다. 모두가 박수를 치고 동영상은 끝나지만 그 것을 보는 나는 과연 쓰레기통에 남겨진 지폐를 발견하는 사람이 있을 것인가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종잇조가리가 1달러건 0원이건 악취나는 폐기물 사이 깔려 있다면 누가 알아줄 것인가 하고 말이다. 세상은 어떤 1달러에겐 사정 없이 관대하지만 어떤 1달러에겐 난장이 라는 이름을 붙인다.


노력하면 세상에 안되는 것이 없다고 헛된 희망을 불어넣어 주는 이들은 너무나도 많지만 기회는 평등하게 주어지지 않는 법인지, 세상은 그저 우월한 유전자의 순서로 나열되어 돌아가는 것인지 몰라도 결과는 한 사람이 애를 쓰고 훈련을 하며 잠을 참고 땀을 흘리는 만큼 항상 따라와 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저 '공정하다는 착각' 에 빠져있는 것이 아닐까?

최근에 뇌리에 꽂히는 한 학교의 미술 수상작을 보았다. 제목은 '아빠찬스' 로 그림의 위쪽에는 서울대학교 로고가 마치 지풍처럼 그려져 밑으로 4개의 집을 만들고 있었으며 순서대로 아무도 받쳐주지 않아 땅바닥에서 가장 얇은 노끈을 붙잡고 있는 아이, 공사장 옷을 입고 있는 아빠의 등에 올라 조금 더 선명한 노끈을 붙잡고 있는 아이, 갈색 외투를 입고 몸을 펴 아이를 절반 이상의 높이까지 받쳐주는 아빠를 가진 두꺼운 노끈을 잡은 아이, 그리고 정장을 입고 어마무시한 키를 뽐내며 노끈 따위는 필요하지 않도록 맨 위까지 아이를 받쳐주는 아빠를 가진 아이 까지 모두 담겨 있었다. 사실 우리 사회는 '아빠 찬스'가 전부이지 않을까 잠시 서러워 지는 작품이였다.


인간은 결코 평등을 원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 우위에 있는 피라미드를 원하는 것 뿐이다. 어느날 갑자기 지니가 나타나 소원을 빌 수 있다면 어떤 소원들을 빌면 좋을까하는 상상 속 나의 소원을 되돌아 보자니 모두 '나' 의 외모를 더 예쁘게, '나'의 지능을 더 뛰어나게, 그리고 '나' 의 부를 더 풍족하게 하는 소원들만 떠올리고 꿈꿔 봤던 것 같다. 그 사이에는 나의 친구의 행복이나 자매 형제의 성공, 지인의 ‘굿뉴스’ 는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을 한발자국 늦게 떠올리게 되었다. 지니의 소원 새개는 오로지 나를 남들보다 우월한 존재로 가꾸어 주는데 쓰여져야만 한 것이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신분 상승’을 원한다. 그렇기에 당장은 형편이 좋지 않더라도 세금, 복지의 증가를 당당하게 반대하는 것이며 ‘능력주의’를 종교 마냥 믿는 것이다. 그렇게 모두가 지금의 고통이 나중의 쾌락으로 되값아질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 하루 하루를 살아간다.


화려하게 꾸며져 안목을 집중시킬 포스터도, 정성스럽게 만든 홍보 영상도 모두 '입소문' 앞에서는 무용지물이 된다. "그 학원에서 이번에 전교 일등이 나왔대" 가 제일 센 마케팅 무기인 것이다. 그렇게 작게 시작한 학원들은 단 한번의 고사 기간이 끝나고 눈 깜짝 하는 사이 대형 학원이 되어 있기도 하다. 그런 전략을 깨닫은 후 몇 점을 받으면 다음달 학원비를 할인해 준다는 등의 학원 내 시험 성적 중심 시스템들도 자리 잡기 시작했다. 결국 어떤 특정 지역이라서, 특정 학원이라서 점수가 잘 나오는, 특별한 무언가가 존재하는 것이 아닌 그저 인구가 몰리고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성공들이 너무나도 많아진 것 뿐인 셈이다. 보여지는 것이 전부인 우리 사회와는 정말 잘 맞는 현상 이겠다.


졸음껌을 씹은 밤 만큼 시험 성적을 잘 받고 싶어서, 글씨로 녹여버린 샤프심 만큼 인정 받고 싶어서 하필이면 가장 뒷자리에 앉아 남들보다 시험지를 늦게 받는 고작 30초가 너무나도 불공평하고 서럽게 느껴진다. 공정은 그렇게 능력주의 사회의 질서와 정당성을 보호해 주는 무기이자 현대인들의 가장 큰 집착이자 병인 것 같다. 끊이지 않는 경쟁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나의 손해가 배로 커 보이는 것이고 민원은 많아지고 감독관은 욕을 먹으며 각자는 자신의 불안과 실수를 다른 누군가의 탓으로 돌려야만 하는 것이다. ‘공정하지 못하다’는 말 뒤로 숨어야지만 비로소 숨이 쉬어지는 1달러들의 시험공화국는 오늘도 병세가 깊어져만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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