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리스트 쿠르베
19c 후반은 정치적 시민혁명, 경제적 산업혁명 ‘민주주의+산업자본주의’가 태동하는 격동의 시기였다. 이 시기 도시화 바람은 농촌의 농부를 도시의 노동자로 바꾸어 놓았다. 산업화는 물질적 풍요를 가져왔지만, 그 풍요는 소수의 것일 뿐 노동자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또 한 전통적 공예는 장인의 손을 거쳤기 때문에 예술성이 있었으나,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물건들은 실용성만 있을 뿐, 예술성의 자취를 찾아볼 수 없었다.
또 한 그동안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던 ‘종교’는 그 자리를 ‘과학’에게 내주게 된다. 이제 보이지 않는 것을 무조건 믿는 시대에서 벗어나 내가 직접 관찰하고 경험하는 분위기가 조성된 것이다. 바로 카메라의 발명과 철도 및 기계 문명의 보급에 따라 과학적인 사고방식이 유행한다. 이제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이유는 하늘이 노하여서가 아니라 수증기가 증발해서 내리는 것이라는 걸 모두가 알게 된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는 법
기계는 노동자의 숙련된 솜씨를 졸지에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었고 기계의 부품이 되어 영화 ‘모던 타임스’에서 찰리 채플린처럼 단순 반복만 하게 만들었다. 당연히 기계로 찍어낸 물건들은 획일적이며, 품질은 역시 장인의 손을 따라오지 못했다. 기계로 만든 초밥이 장인이 만든 초밥을 따라오지 못하는 것처럼 가격은 저렴했으나 품질도 역시 저렴했다. 또 한 독한 매연은 도시의 풍경을 추악하게 바꾸어 버렸고 목가적인 도시 풍경은 이제 점점 사막 같은 도시로 바뀌어 갔다.
이러한 급속한 환경의 변화는 사고방식과 지각의 변화를 가져오고 이는 곧 다시 미적 취향의 변화를 가져온다.
19c 들어와 전통적인 아름다움은 이렇게 사라져 가고 있었다.
이 새로운 상황에 예술가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먼저 쿠르베와 같은 사실주의자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리려고 했다. “추하면 추한 대로 묘사해야지 결코 미화해서는 안 된다.”라는 게 그의 신념이었다. 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미’가 아니라 ‘진실’ 이기 때문이다. 사실주의자는 신화·성서·역사 과거의 ‘허구’가 아닌 지금 당대의 현실을 그리려고 했다. 이는 르네상스 이후부터 내려오는 전통회화의 아름다움이란 이념을 무너뜨린 것이었다.
대다수가 절대적 빈곤에서 허우적대고 있는데 이를 무시한 채 보이지도 않은 여신이나 천사를 그릴 순 없었다. 마치 분위기 좋은 카페에 앉아 콜롬비아산 커피를 즐기면서 그 커피가 내 혀에 닿을 때 풍미를 기억하지만 공정하지 않은 무역으로 인한 아동 노동의 ‘착취’의 과정이었다는 것을 보기 싫은 것처럼 말이다.
휴일 아침의 아메리카노가 보고 싶은 ‘허구’라면 그 속에 담긴 콜롬비아 원두가 ‘진실’이다.
쿠르베와 같은 사실주의자는 그럴 수가 없었다.
“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그리지 않는다.”
“천사를 내 눈앞에 데려오면 천사를 그리겠다”
그의 말에서 엿볼 수 있듯이 그는 철저히 눈에 보이는 것만 그렸다. 상상과 과거가 아닌 지금 여기에 있는 현실을 목격하고 그렸다. 비록 그것이 아름답지 않더라도 추한 진실을 그리기 시작한다.
쿠르베의 고향인 오르낭에서 동네 사람이 죽었고 장례를 치르는 중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무려 가로 6m가 넘는 매우 큰 그림이다. 사실 이렇게 큰 캔버스에는 영웅이나 왕 소위 말하는 잘 나가는 사람들을 그려야 한다. 아는 사람이 있나? 실제로 평범한 사람들을 거의 실물 크기로 그려 넣었다. 심지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저기 멀리 보이고 강아지가 맨 앞에 등장한다. 성직자나 시장, 재판관이라도 더 크고 부각 되게 그리지 않았다.
“진정한 역사란 영웅의 것이 아니라 바로 평범한 시민들의 일상”이라는 그의 신념이 잘 드러난 그림이다.
1855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전시를 거부당했던 [화가의 작업실]을 보자. 가운데 화가는 캔버스 앞에서 풍경화를 그리고 있고 그의 옆에 모델과 하얀 고양이가 보인다. 그림 왼쪽의 상인 신부 창녀 무덤 파는 사람들 오른쪽에는 친구들인 철학자 작가 시민 등이 보인다. 그리고 사냥꾼으로 보이는 폭군 나폴레옹 3세가 보이고 맨 오른쪽에는 책 보고 있는 남자는 보들레르다.
그림을 절대 못 사는 사람들이 바로 그림의 대상이 된 당시 모순된 시대상을 보여준다. 모든 계층을 그려 넣어 부조리한 사회상을 보여준다
<체질하는 사람들>
체질하는 사람 돌 깨는 사람들은 주인공은 당시 최하의 계층이다. 학교에 못 가고 아버지를 따라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오늘도 책 대신 망치를 들고 있는 소년이 보인다. 옆에는 체질하는 여자의 힘찬 팔뚝과 지친 표정이 노동의 힘듦을 볼 수 있다. 이전까지는 절대 예술의 주인공 일 순 없었던 최하층 빈민이 당당히 캔버스 위의 주인공이 되었다.
신고 전주 의자들은 말한다.
“예술을 빈민굴에 처박았다”
하지만 쿠르베는
“예술이란 빈민굴에 처넣어져야 하는 것”이라 대답한다.
당시 소외되고 처참한 사람들 즉 <레미제라블>의 주인공이 될만한 사람들을 그렸다. 비록 그들이 아름답지 않고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계층이 아님에도 역사상 처음으로 평범한 사람을 넘어 빈민계층까지 주인공으로 말이다. 쿠르베를 비롯한 사실주의자들은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꿈을 캔버스에 몸소 실천했다.
당시 기득권층에게는 날카로운 풍자를 가하면서도 민중에게는 따스한 손길을 내밀었던 사실주의자들은 어쩌면 진정한 ‘이상주의자’ 였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