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전 미술과는 달라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일까? 피카소 이후 이제 화가들은 뭘 그려야 할지 고민을 한다. 마치 미켈란젤로 이후 화가들이 고민과 비슷하겠다. 세잔이 현대 미술의 문을 열었고, 피카소가 활짝 열어 놓았다면 이제 그 문을 열고 화가들은 날개를 달고 날아간다.
칸딘스키 우연이 만들어 낸 역사적 순간
밖에서 스케치를 하다 돌아와 골똘히 생각에 잠긴 채로 작업실 문을 열었다.
그 순간,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이젤 위에 놓인 그림이었다. 말로 하기 어려운 묘한 아름다움을 가진 그림을 보면서 떠오른 게 설마 내가 그린 건가?’였다. 이젤 위에 놓여 있으니 내가 그린 것인데 도무지 무엇을 그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가까이 다가가고서야 나는 내가 그린 그림이 맞다고 확신을 했다. 이젤 옆으로 눕혀둔 것인데 깜박 잊었던 것이다. 잊을 수 없는 이 순간의 경험으로 분명히 깨달은 것이 있다. 그림에서 대상이 굳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그때 무언가를 흉내 내 그리는 것이 그림에 얼마나 해로운 것인지 그때 알게 되었다.
칸딘스키의 회고를 풀어쓴 것이다. 이때 이젤 위에 놓은 그림은 무엇이었을까?
아마 <집들이 있는 풍경>이 유력하다고 한다. 이 그림을 시계 방향으로 돌려 그림을 보면 앉은 사람과 이어진 집들 그리고 마을 풍경이 보인다
대상이 없는 그림 칸딘스키는 드디어 ‘추상’ 눈을 뜨기 시작한다. 화가에게서 대상이 없는 그림을 그리라고 하는 일은 마치 우주선이 중력 밖을 벗어난 것과 같다. 우연하게 의도치 않게 그림을 그리려고 해도, 막상 그 결과를 보면 우리가 아는 익숙한 뭔가에 닮기 마련이다.
대상도 없고 메시지도 없고 있는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구성하는 것을 그리려고 하는 그의 시도는 <중심인 녹색인 그림>에서 결실을 맺는다. 도저히 무엇을 나타내려고 하는지 알 수 없는 그저 재료인 물감과 선만 보이는 완전한 추상에 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림의 끝에 서다 추상미술
몬드리안의 추상화는 얼핏 보아도 선, 점, 면 등 기하하적인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고, 색깔 또한 서너 가지만 사용하고 있다. 우리 주변의 모든 사물이 제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이것저것 다 빼고 공통적인 것만 남기면 결국 기하하적인 모양만 남는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을 잘 보여 주는 게 바로 <나무> 작품이다. 점점 대상이 해체되고 색채 역시 점점 단순화되어 결국 마지막에 남는 건 선과 점 면. 처음 그림은 강렬한 원색으로 그려지긴 했으나 잎이 떨어진 나무가 어느 정도 실히 ‘재현’되어 있다.
두 번째 그림부터는 재현은 줄어들고 표현이 강해진다. 색과 형태가 단순해지고 화면이 격자형으로 나눠진 것이 보인다. 세 번째 그림에 이르면 과감한 생략으로 인해 선들만이 그림을 채우고 있다. 나무의 느낌이 여전히 남아 있으나 이 그림은 더 이상 나무의 재현이라 보기 어렵다.
거추장스러운 모든 껍데기를 제거하고 남은 본질이 점, 선, 면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 역시 사물을 원통형 삼각뿔로 사물을 단순해서 표현한 세잔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굳이 대상이 필요한가?’ 대상을 없애고 형태와 색조로만 그릴 때 보다 완전한 의미 표현이 되지 않을까? 한 발 짝만 더 나가면 되는 것이었지만 대상을 없앴다는 것은 매우 두려운 일이었다. 세잔도 고흐도 피카소도 “대상” 그 자체를 없애진 않았다.
대상을 없애는 건 어쩌면 그림의 끝에 선 것과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추상 화가들은 피카소를 넘어 그림에 끝에 도전한다. 칸딘스키와 몬드리안 말레비치 등은 멈추지 않고 ‘순수’에 접근한다. 특히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은 액자 안에 검은 사각형만 보인다.
이 검은 ‘느낌’은 무엇일까? 극단적이고 더 단순해진 이 그림의 끝은 무엇일까? 대상이 없이 느낌을 줄 수 있을까?
외형을 지닌 대상을 완전히 해체해서 순수하게 선, 색채, 질감 등으로 화가가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리는 이 추상의 움직임은 기존의 전통 미술을 완전히 전복시켜 버린다. 이제는 카메라와 눈으로 보지 않아도, 그릴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기존의 르네상스가 중세의 평면성을 벗어나 ‘환영’을 시도해서 600년간 기준이 되었지만, 인상주의 균열과 세잔의 그림에 의해 허물어지고 피카소의 입체주의 한발 더 나아갔다.
이제는 궁극적으로 추상의 시대가 열리면서 새로운 미술을 향한 경쟁은 치열하게 진행된다. 이는 현대미술의 빅뱅을 예고하기도 한다.
잭슨 플록의 ‘액션 페인팅’이라 불리는 물감을 마구 흩날리는 기법 또 한 추상의 영역에서 예술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진이 할 수 없는 것을 향해 도망친 화가들은 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 야수파 입체파를 거쳐 결국 그 종착점이 추상이 아니었을까? 이제 추상미술을 탄생시킨 화가들은 그림에 쓰였던 마지막 족쇄를 풀어헤침으로써 동시에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이제 현대 미술은 더 새로운 것을 위해 치열한 정글의 세계로 들어가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