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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독서천재 정태유 Mar 29. 2020

세상은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글은 쓰는 것이 아니라 써지는 것이다.

  "나는 마흔일곱 살이 돼서야 글을 쓰기 시작했다. 오래전부터 글을 쓰고 싶었지만 어떤  학위가 있어야 하거나, 어떤 집단의 일원이 되어야 하는 줄 알았다. 물론 아무도 내게 그 집단에 가입하라고 요청하지 않았다. 그저 시작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 애비게일 토머스 (미국의 작가)


  몇 년 전, 첫째 딸이 초등학교 3학년 때에 스마트폰을 처음 사주었던 때였다. 네 살 터울 아래의 남동생에게는 아직 스마트폰이 없었기 때문에 아내의 것을 가지고 둘이서 함께 놀곤 했었다. 어느 날 집 근처 공원에 갔을 때였다. 갑자기 둘 다 마치 사진을 찍으려는 듯 휴대폰을 허공에 대고 열심히 뛰어다니는 것이었다.

  “뭘 찍으려고 저 난리인 거지?”

  아내에게 물어보았다. 아내는 씩 웃으면서 답하길,   

  “포켓몬스터를 잡고 있대.”

  ‘아하, 그 게임을 말로만 들었는데…. 우리 아이들이 하고 있던 거였구나.’

  이후로 비슷한 게임이 계속해서 생겨났고, 그때마다 어딜 가든 아이들은 휴대전화를 허공에 대고 360도 돌려가면서 놀곤 했었다.

  글을 쓰는 것도 이와 똑같다고 생각한다. '쓸 만한 거리'는 곳곳에 있다. 다만 우리가 그 순간 눈치채지 못하고 그저 스쳐 지나가고 있었을 뿐이다. 특히나 전문작가도 아니고 그저 평범한 사람이 글 좀 쓰려고 책상 앞에 자리 잡으면, 몇 시간이 지나도록 한 글자도 쓰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나 역시 매일 겪었던 일이기도 하다.     


  막상 글을 쓰려고 했을 때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고 머릿속이 하얘지는 경험, 그것은 누구나 겪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다만 그 순간에 계속해서 '멍함'을 겪을 것인지, 아니면 한 글자를 쓸 것인지를 선택하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많은 사람이 글쓰기를 하려고 할 때 가장 큰 착각을 하는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평범함'에 대한 두려움이다. '지극히 '평범한' 내가 글을 쓰게 된다면, 그 글 또한 '평범'할 것이다. 누구나 겪는 그런 평범한 일들을 누가 읽고 싶어라 한다는 걸까?' 하는 걱정이다. 그러면서 자꾸 내가 겪었던 일 중에 '평범하지 않은', 즉 '뭔가 특별한' 것을 찾게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겪어보지 못했던, 아주 특별했던, 더군다나 나만이 할 수 있었던 경험. 그런 걸 생각해 내서 글을 쓰려고 하니 아무것도 쓸 게 없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책을 쓰는 것은 '저자'의 일이지만, 읽는 것은 '독자'의 몫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멋진 글도 독자가 감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보았을 때, 저자가 감동하는 가장 첫 번째 이유는 '공감(共感)'에 있다. 저자의 글에 얼마나 공감을 할 것이냐에 책을 읽는 목적이 있는 것이다. 글을 쓴 저자의 혼자만이 겪었던 '특별한 경험'을, 독자의 관점에서는 '신기함', 어쩌면 좀 특별한 '존경심'은 느낄 수 있을지언정 '공감'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독자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 바로 조금 전까지 내 옆에 있었을 것 같은 사람의 글에서 '공감'을 느낀다. 나처럼 아침을 먹고, 나처럼 전철을 타고, 나처럼 하루를 살고, 나처럼 맥주 한잔을 마시는 사람. 나와 같은 사람들의 걱정거리와 삶에서 겪는 갈등, 그리고 어떻게 그것들을 이겨내는지 등. 여기에 바로 책을 읽는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담겨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어찌 글을 쓰지 않을 수 있을까?



  글감은 내가 읽은 책 속에 있다

  세상에 책이 탄생하고 난 이후의 세계. 그것을 우리는 역사(歷史)라고 한다. 언제 어느 곳이든 책이 있었기에 우리는 감사하게도 그 시대 사람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의 생각을 읽는다는 것. 그것은 곧 그 사람들의 경험을 내 것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처음 생겨난 것은 해와 달 지구 외에는 없다. 모든 것은 이전에 있던 것의 재탄생이고 모방이다. 책도 글도 마찬가지다. 책을 많이 읽어보지 않고 글을 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수많은 책을 읽어보고, 그 책에서 내 마음에 울림을 전하는 문구를 만나고, 마치 내가 쓴 글인 것처럼 수없이 써보는 것. 그것이 곧 책을 쓰는 기본 연습이 된다. 멋진 문장 한 줄을 쓰기 위해서 노트북에 손을 올려놓고 망설이다가, 갑자기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훌륭한 한 문장을 만났을 때, 나도 모르게 손가락은 그 문장을 쓰고 있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다. (아니 자주 있다) 멋진 문장이라고 나 스스로 만족감에 흥분해 있다가도 문득 어디선가 읽어본 적이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럴 때 십중팔구 예전에 읽었던 책의 문장이 마치 내가 만들어 낸 문장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손가락으로 옮겨진 것이다. 하지만 그런데도 많은 책을 읽는다는 것은 곧 많은 문장을 경험한다는 것을 뜻한다.

  '필사'는 책을 쓰려는 방법 중에 최고의 연습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의 최고로 멋진 작품 한 권을 통째로 베껴 쓰는 것. 책 쓰기에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을까? 한 권을 통째로 '필사'를 끝내 보라. 마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자신이 된 것처럼 기쁨의 순간을 만끽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쓰는 글을 똑같이 베끼라는 말은 절대 아니다. 그렇게 수많은 연습을 하다 보면 어느새 자연스럽게 글들이 머릿속에 자리 잡게 된다. 이제는 글을 쓰지 않으면 못 배기게 되는 순간이 온 것이다.     


  글감은 우연히 눈앞에 나타난다.

  내가 쓰고 있는 글에 적합한 '명언'을 찾고 있을 때였다. 다른 건 몰라도 특히나 명언의 경우, 인터넷에서만 몇 번 검색어만 넣어봐도 눈앞에 곧 나타난다. 그만큼 찾기 쉬운 것 중의 하나다. 그런데 왜였을까? 수많은 명언 중에서 딱히 마음에 드는 명언이 없었다. 그렇게 며칠이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다. '당분간은 고민하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을 멀리하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회사 일로 광주광역시에 출장을 가게 되었다. 터미널에 도착해서 화장실에 가게 되었을 때, 많은 사람과 소변기 앞에서 지퍼를 내리는 순간, 눈앞 벽면에 내가 찾던 명언이 붙어 있는 게 아닌가? 정말 순식간의 일이었다. 마치 아르키메데스가 밀도(密度)를 발견한 순간이 이와 같았을까! 발가벗고 '유레카'를 외쳤던 순간 말이다. 나 또한 흥분한 나머지, 휴대폰 카메라를 들고 소변기마다 눈앞에 적혀 있던 명언을 연신 카메라에 담았다. 아마도 그런 나를 두고, 당시 주변 사람들에게는 미친 사람이거나 변태와 같은 모습으로 보였을 것이다. 머릿속으로 몇 날 며칠 동안 찾아 헤매던 '명언 한 마디'가 이 순간에 눈앞에 나타나게 될 줄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쓸 거리'는 이렇게 순간적으로 눈앞에 나타나기도 한다.


 


 

  글감은 잠재의식에 숨어 있다

  평소 내가 꼭 쓰고 싶은 글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막상 글을 쓰고자 했을 때는 머릿속 깊은 곳에 숨어 버릴 때가 있다. 아무리 티를 내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글을 쓰려고 해도, 점점 더 머릿속으로 숨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럴 때는 내 마음속 잠재의식 속에 부탁해 놓아야 한다.

  예를 들어, 이가 아팠을 경우를 생각해 보자. 치과를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면서 길을 걸으면 생전 보이지 않던 '치과'만 계속해서 눈앞에 계속해서 나타난다.

  '저 건물에 치과가 있었나? 언제부터 있었지?'

  매가 아플 때는 화장실만 보이고, 돈이 필요할 때면 은행만 보인다. 이사를 생각하면 부동산만 보이고, 나처럼 책에 미쳐있을 때는 세상엔 온통 서점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눈에만 보이는 것. 그것이 바로 잠재의식의 효과다. '글감'도 이와 같다. 그냥 막연하게 '글감'이 생각나지 않는다고 불평할 필요가 전혀 없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막연하게 '아무거나'라는 식으로 기다려서는 안 된다. 잠재의식은 말 그대로 숨겨져 있는 또 하나의 나 자신이기 때문에 주제가 뭐가 되든 명확하게 부탁해야 한다. 예를 들자면, '집', '가족', '강아지', '볼펜', '컵' 등 주제가 뭐가 되든 상관없다. 잠재의식 속에 주제를 명확하게 입력해 놓아야 한다. 그러고 나서 일부러 애써 생각하지 말고 잠깐 잊어버리자. 정말 쓰고 싶은 주제라고 한다면 시간을 독촉해서는 안 된다. 내 잠재의식 속에서 준비가 되었다고 한다면 곧 내 손끝을 통해서 나타나게 될 것이다.

     

  무엇이든 좋다. 쓰고 싶은 글을 써라. 마음속 욕망이 꿈틀대는 순간, 쓰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그런 기분으로 써라. 썼다 지웠다. 썼다 지웠다 할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거의 모든 명문들도 거의 다 형편없는 초고로부터 시작된다.'

  미국의 소설가 '앤 라모트'의 이 말은 모든 초보 작가에게 있어 꼭 필요한 말이 아닐 수 없다. '글에 대한 감각'이 곧 '글감'이다. 당신의 마음속에 숨겨져 있는 감각을 믿어야 한다.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는 아이는 '물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저 하얀 도화지와 연필 한 자루만 쥐여주면 된다. 그 연필 한 자루로부터 해와 달, 토끼와 거북이, 그리고 공룡과 고래가 태어나는 것이다. 당신도 마찬가지다. 애써 '글감'을 찾아내기보다는 손가락을 올려놓은 키보드를 보라. 그 속에서 당신의 책이 나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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