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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유 Apr 11. 2024

심플한 게 왜 어려울까

설명 사회에 대한 피로감

오후 6시 30분. 나의 퇴근 시간이다.

1달간의 가족 돌봄 휴가로 인해 크게 바뀐 점이 하나 있다면, 내 삶의 복잡성이 극단적으로 줄었다는 점이다

즉, 심플해졌다.


그 첫 번째 증거, 칼같이 퇴근하기.

난 지독한 일중독자였다. 일이 없으면 오히려 일을 만들어서 하는, 그러다 보니 정시 퇴근이 오히려 특별한 날로 느껴지는.

간단한 업무지만 Why를 고민하며 일의 근본을 질문하는 사람. 회사에서 핵심인재로 분류되며 빠른 승진 혜택이 주어졌던 사람.

그랬던 내가 요즘 후배로부터 듣는 평은

“차장님, 휴가 이후로 분위기가 많이 바뀐 거 같아요. 여유가 있어졌달까?”라는 식이다.

그 얘기를 들을 때마다 속으론 뜨끔한다. 내가 요즘 일 안 하는 게 그렇게 티 나게 느껴졌나..


요즘 삶에서 추구하는 가치 중 하나가 ‘가장 중요한 한 가지만 하기’다. 이는 업무에도 적용된다. 전에는 문제를 MECE 하게 바라본다는 생각에 간단한 문제도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짚어봤다. 그러다 보니 상사의 질문에 ‘A-HA’ 감탄사가 나올만한 퀄리티 있는 답변을 할 수 있었고, 이는 나의 실적과 평판에도 플러스 요소로 작용했다.


문제는 이 방식이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거다. 생산성이 굉장히 떨어지기도 한다. 물론 일만 바라보고 올인한다면 가능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닌 걸 휴가기간을 통해 몸소 느꼈다.

난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성취’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지금까진 그 성취를 이룰 수 있는 무대가 일밖에 없었을 뿐이다.


두 번째 증거, 매주 반복하는 취미가 생겼다!

휴가 기간 동안 새롭게 시작한 게 ‘글쓰기’와 ‘미술’이다. 글쓰기는 지금 쓰는 브런치다. 글쓰기가 좋은 건 회사생활에서 억눌려있던, 차마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을 오롯이 배설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글을 쓰며 나의 현재 상태를 한 발짝 떨어져서 볼 수 있고, 또 떨어져서 보다 보면 그날의 분노와 답답했던 감정이 조금은 사그라든다. 다시 내일을 살 수 있는 에너지가 충전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더불어 하나씩 완성된 글은 만족감과 성취감이라는 건전한 도파민을 선물한다.


그리고 미술! 미술은 내가 가장 멀리했던 분야다. 의도적으로 멀리 했다기보단 먹고살기에 바쁘다 보니 가까이할 수 없었던 카테고리였다. 그랬던 내가 데생을 배우고 명암을 공부하고 소실점을 생각하고 있다.

태생부터 미술이 내 삶과 전혀 동떨어지진 않았다.

13살, 초등학교 6학년 때로 기억된다. 당시 방학기간 동안 학교에서 ‘크로키’로 불리는 연필화를 외부기관에서 강의하는 3주 과정이 있었다. 강의라고 적었지만 학원의 미술선생님이 와서 드로잉을 알려주는 작업이었다. 당시 출석률은 제일 안 좋았지만 “그림에 소질이 있다”라는 얘기와 함께 상도 받은 걸로 기억한다.

그때가 인생에서 그림을 ‘제대로’ 그려본 마지막이었다. 그날 이후 나의 드로잉 실력은 37살이 될 때까지 정체기이지 퇴화기를 겪었다.

그림은 잃어버린 ‘손’의 감각을 찾는 시간인 동시에,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있는 ’ 관찰의 힘‘을 길러주는 시간이었다. 단순한 종이컵 하나도 보는 각도에 따라 형태, 그림자, 반사광의 위치가 각기 달랐다. 모든 게 낯설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지금껏 당연하게 여겼던 주변의 사물들이, 정확히 말하자면 보이지 않았던 일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0.1mm만 달라져도 그림 전체의 느낌이 변화하는 걸 보며 디테일의 중요성도 실감하게 된다.

 

최근 그린 종이컵 그림 (그림자와 반사광을 표현했다)

주변 사람들은 말한다. 글도 쓰고 드로잉도 하고 그거 다 여유가 되니까 하는 거 아니냐고.

서른일곱을 살아보니 느낀 점이 딱 하나 있다. 절대 여유 있는 시기는 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게으른 것과 여유를 갖고 산다는 건 분명히 다르다. 부지런하고 성실한 사람일수록 직장 생활에서는 더 바쁘고 번아웃이 오기도 쉽다. 상사들은 일할 놈이 누군지 귀신같이 알기 때문에 별생각 없이 주는 일을 하나 둘씩 받다 보면 일이 내 하루를, 아니 영혼까지 지배하는 악마의 순간을 맞이할 수도 있다.


요즘 내가 심플하게 사는 건 일을 덜하기 때문이다. 그게 전부다. 의도적으로 일의 절대량을 줄였다. 그렇다고 해서 결과물의 퀄리티가 확 떨어진 건 아니다. 오해는 하지마시길. (물론 이전보다 퀄리티는 줄긴 했다)

대신 모든 일을 하기보단 ‘제일 중요한 한 가지 일’을 찾기 위해 고민한다.

베스트셀러 책 제목이기도 한 ‘원씽’에선 이렇게 표현한다. 단 하나, 이 하나를 통해 전체적으로 일을 쉽게 하거나 그 일들도 필요 없게 만드는 것.

모든 걸 서포트하기 위해 에너지를 산발적으로 소진하기보단, 단 하나를 찾기 위해 고민하고 그 한 가지에 응축된 에너지를 쏟아붓는다.


현재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내적인 성장이다. 건강, 가족, 취미, 일 4가지가 그걸 가능하게 하는 요소들이다.

사실 오늘 글을 쓰게 된 건 상사들이 나의 퇴근 시간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P와 L은 나의 직장 상사로 회사에서도 열정과 성실함으로 꾸준히 인정을 받아온 분들이다.


오늘 퇴근이 늦은 건 임원 보고 메일 때문이다. 내 생각엔 퇴근 시간도 지났으니 간단히 결과 위주로 금일 미팅 결과를 공유했으면 했다.

임원 M의 스타일도 두괄식 위주 핵심만 보고 받길 좋아하는 성격이다. 상사 P와 L은 평소에도 친절하게 설명해 주기로 유명하다.

그들의 이메일에는 그간의 모든 과정들이 모두 설명되어있다. 임원 M은 항상 결론만 얘기해 달라고 주문하지만, 이들의 꼼꼼한 성격때문에 글은 점점 길어진다.


초안을 작성하고 문장을 하나 둘 조금씩 더 추가한다. 처음엔 분명 심플하게 쓰자고 했는데 완성시켜 보니 빽빽하게 한 바닥을 작성한다.


이분들은 항상 일이 많다. 점심도 건너뛰고 일한다. 근데 한 번쯤은 말해주고 싶다. “그 일 모든 게 중요하신가요? 제일 중요한 단 하나는 무엇인가요…? “

모든 걸 다 해내려고 복잡하게 살지 말고,, 심플하게 가장 중요한 것만 하는 건 어떨까요?


이들에겐 오히려 심플하게 사는 게 어려운 일인 듯하다

결론은 이메일 하나로 퇴근이 늦어져 불쾌했다는 거..


그렇게 K직장인의 하루가 끝났다.

이런거 하나로 예민해진 걸 보니 잠을 푹 자야할 시점인가보다.

미술을 하며 상대를 이해하는 폭이 넓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난 먼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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