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대책 없이 마냥 좋은 기분이었다
소렌토에서 시타 버스를 타고 포지타노로 향하는 중이다. 아침 일찍 아시시에서 출발하여 로마와 나폴리를 거쳐 소렌토까지 왔더니 시간은 벌써 저녁 무렵이다. 포지타노로 들어가는 전망이 좋다고 하여 버스를 타자마자 운전사와 대각선 쪽 맨 앞자리를 차지했다. 나폴리도 그랬지만, 지나가면서 차창밖으로 보이는 소렌토는 굉장히 낡은 모습이다. 안 그래도 오래된 건물들인데 칠까지 벗겨진 풍경이 천지다. 항구 도시의 거친 특색인지 아니면 아름다움을 돌 볼 여력이 없는 것인지, 사연이 있어 보이는 거리를 지나친다.
교통체증이 심했던 소렌토를 벗어나자 물결치듯 굽어지는 해안도로가 나타났다. 탁 트인 지중해가 드러나자 사람들은 웅성웅성하다가 일제히 낮은 탄성을 지른다. 주변 사람들에 대한 배려와 본능적으로 튀어나온 감탄, 그 사이 어디쯤의 볼륨이다. 졸고 있던 옆사람도 깨우고 갑자기 소곤대는 말소리가 빨라진다. 모르긴 해도 그 자잘한 말들은 모두 같은 뜻일 것이다. 마침내 포지타노에 도착했다는 사실이 몹시도 설렌다는 외침.
이 버스의 운전사는 얼마나 뿌듯할까. 어느 지점에서 턴을 하면 우와, 하는 소리가 터져 나올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포지타노의 버스 운전사라는 것이 으쓱할 것이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이런 곳에 살면 누구라도 '나의 도시'라는 자부심을 갖게 될 것 같다.
구름이 낮게 깔려 수평선마저 흐릿한 바다를 옆에 끼고 버스가 달리는 동안 해는 빠르게 저물어 간다. 해안도로는 끝나고 포지타노의 그 켜켜이 쌓인 그림 같은 집들이 나타난다. 하나 둘 오렌지색 불빛을 켜기 시작하는 하얀 보석 상자들. 짙은 초록의 산과 그 품에 안긴 빛바랜 해안 마을을 보며 흥분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갑자기 버스가 멈춘다. 정류장도 아닌 것 같은데 무슨 일일까 궁금하던 그때, 맞은편에서 차 한 대가 천천히 다가오더니 우리 버스 옆으로 조심히 지나간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도로가 1차선이었다. 이런 도로에서는 누구도 후진을 할 수가 없다. 언제나 한쪽이 먼저 양보를 해 주어야 하는데, 내가 탄 버스는 늘 먼저 멈춰 서서 상대편 차를 배려해 주었다. 바쁠 것 없는 포지타노에서는 마주침이 곧 인사가 되곤 했다.
포지타노 마을에는 두 개의 버스 정류장이 있다. 첫 번째 정류장은 비교적 높은 지대에 있고 거기서 내리면 끝내주는 전망을 감상할 수 있다고 한다. 첫 번째 정류장에 버스가 정차하자 한 커플이 긴가민가 하는 느낌으로 하차를 한다. 버스 앞문이 미끄러지듯 닫히는 사이로 '여기가 포지타노 맞죠?' 하는 소리가 엷은 날갯짓을 한다. 그렇게 재차 확인을 하면서도 -확실히 포지타노가 맞긴 맞다-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어째 불안불안 하다. 부디 그들의 숙소가 그 언덕 쪽에 가까웠길 바란다.
얼마 후 도착한 두 번째 정류장은 스피자 해변이 가깝게 내려다 보이는 '스폰다'라는 이름의 정류장이다.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함께 이곳에 내렸다.
어스름한 저녁의 푸른빛 속에서 포지타노의 근사한 모습이 나를 맞이한다. 숨소리만 내는 듯한 바다의 부드러운 살결이 눈 앞에 펼쳐진다. 파도가 간지럼을 태우는 해안가에는 저녁 장사가 한창인 레스토랑들이 환한 불을 밝힌다. 차곡차곡 쌓아 올라간 집들마다 켜놓은 조명은 티 라이트 장식처럼 아름답게 빛난다. 기대하던 프러포즈라도 받는 듯 가슴이 벅차오른다.
이런 광경을 눈에 담으며 숙소를 향해 걸었다. 걷다가 한참을 바라보고, 걷다가 사진을 찍고. 몇 번이나 가다 서다를 반복하다가, 얼른 짐을 던져놓고 나오리라 다짐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포지타노의 숙소는 Hotel Savoia. 배정받은 방으로 들어와서 나는 또 한참 감탄을 이어갔다. 바닥에는 상큼한 과일과 꽃문양의 페인팅이 파랗고 노랗게 어우러진 타일이 깔려 있고, 사방은 깨끗하고 하얀 회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오른쪽 벽 중앙에는 둥근 곡선의 오렌지색 침대 헤드가 붙어 있고, 그 앞으로 하얀 퀼트 침구가 덮인 퀸사이즈 침대가 놓여 있다. 침대 왼편에는 높은 천장으로부터 드리워진 하얀 커튼이 달려 있고, 커튼 뒤에는 높다랗고 하얀 한 쌍의 문이 서 있다.
나는 양손으로 커튼을 젖힌 뒤, 문에 달린 매끈한 금색 손잡이를 돌려 문을 당겼다. 순간 펼쳐진 포지타노의 발코니! 이 선물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아까워서 꾸물꾸물 조심스레 밖으로 나가보았다. 깜깜해진 밤, 빛나는 포지타노의 풍경이 그대로 쏟아질 것만 같다. 불빛들이 하나하나 줄을 서서 차례차례 내 가슴에 박히고 지나간다. 포지타노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나는 또 홀린 듯이 되뇐다. 이곳에 산다면, 이곳에 산다면, 하고.
꿈같은 방에서, 잠들기에도 아까웠던 밤을 보내고 아침을 맞이했다. 일기예보 앱은 내가 머무는 동안 내내 흐릴 거라 엄포를 놓았다. 아무리 '새로고침'을 해도 결과는 같았다. 심지어 비가 올 수도 있으니, 포지타노의 파란 하늘을 볼 생각은 하지도 말라는 듯 구름 모양만 내어 놓았다.
이불을 밀어내고 일어나 발코니로 다가갔다. 그렇게 무심코 발코니 도어의 덮개 문을 연 순간, 아... 감탄이 밀려온다. 하늘이 흐리긴 해도 나무가 무성한 산 중턱에 하얗고 아담한 집들이 층층이 쌓여있는 포지타노가 나의 코앞에서 이마를 대고 있다는 건, 역시 믿을 수 없을 만큼 두근거리는 일이다. 침대 끄트머리의 담요 위에 앉아 멍하니 발코니 창밖을 바라본다. 포지타노에서는 딱히 찾아갈 명소도 없으니 3박 4일 동안 나는 내내 이렇게 입을 헤 벌리고 포지타노를 바라볼 작정이다.
한참을 앉아있다가 부스스한 머리카락과 잠옷 차림을 한 채 발코니로 나갔다. 새벽엔 비가 왔던 것 같은데 하늘이 조금씩 개이고 있었다. 샤워를 한 듯 말끔한 포지타노의 냄새가 상쾌하다. 화이트, 피치, 로즈핑크 등 몇 개의 색깔만이 섞여 있는 집들은 뽀얀 얼굴에 수줍게 볼터치를 한 여인의 얼굴처럼 청초하다.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가느다란 도로는 아직 한적하다. 이탈리아 남부의 해안 마을. 이곳의 아침은 느긋하게 시작되지만 나로서는 조금 급한 마음이 든다. 하늘의 파란 조각이 사라지기 전에 어서 나가보아야 한다. 매끈하고 시원한 타일 바닥을 밟으며 부지런히 욕실로 향한다.
포지타노의 길은 좁다. 특히 도로가에 있는 인도는 두 사람이 나란히 걷기가 불가능할 정도다. 인도는 한쪽밖에 없고 반대편에서 사람이 오면 마주칠 수밖에 없다. 그럼 서로가 너무나도 잘 아는 그 상황을 미소로 공감하며 한 사람이 벽 쪽으로 기댄다. 때로 두 사람 다 그런 배려를 보이는 바람에 훈훈한 웃음이 터지기도 한다. 포지타노에서만 일어나는 일인 것 같아서 여행자는 괜히 즐겁다.
어젯밤 시타 버스 정류장 쪽에서 내려다보았던 풍경이 너무나 좋았던 까닭에 나의 발걸음은 자연스레 다시 그쪽으로 향했다. 늘어선 가게 앞에서는 옷걸이에 걸린 원피스가 나풀거리며 아침의 정적을 깨운다. 가끔씩 차들과 오토바이가 다닐 뿐 거리는 한산하고 여유롭다. 햇살은 조금씩 고개를 내밀기 시작하고, 아침 산책을 나온 여행객들의 표정은 밝게 들떠 있다.
골목이 끝나고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지중해의 수평선을 보려는 나의 눈 앞으로 포지타노의 꽃과 나무들이 앞을 다투어 나타나 매력을 뽐냈다. 발걸음을 멈추고 철제 난간 위에 두 팔을 올린 채 한없이 먼 바다를 바라본다. 아득한 바다를 보면 그리움이 떠오르고, 곁에 앉은 꽃을 보면 그리움이 채워진다. 신기하게도 정말 그렇다. 꽃이 가까이에 있기 때문일까, 꽃이 웃고 있기 때문일까. 그러고 보면 예전엔 마음이 울적한 날 꽃을 사곤 했던 기억이 난다. 꽃은 언제나 곧 시들고 말았지만 꽃이 버텨주는 동안 나도 버텨낼 수 있었던 것 같다.
아래쪽 스피자 해변에는 잔잔한 파도가 철썩이고 있다. 포지타노의 높은 산과 마을이 소중하게 품고 있는 듯한 이 작은 해변은 소박하지만 완벽한 낙원인 것 같다. 이렇게 아늑하게 안아주는 해변이 또 있을까 싶다. 시원하게 펼쳐지는 지중해를 향해 오렌지색 썬 베드들이 줄을 맞추어 누워있다. 비수기라 그런지 인기는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해변엔 썬 베드가 있는 게 어울린다.
해변으로 향했다. 길을 아는 건 아니지만 대충 무조건 아래로 내려가면 될 것 같았다. 내리막길을 따라 걷는 동안 포지타노의 일상을 구경한다. 이 동네는 길 위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이 아담하다. 앞바퀴가 하나, 뒷바퀴가 둘인 세 발 트럭도 재미있고, 소형차보다 훨씬 작은 미니 자동차도 신기하다. 가장 귀여운 주유소, 가장 소박한 성당을 이곳 포지타노에서 만난다. 아담한 소도시의 아담한 모든 것들이 포지타노에 매력을 더한다.
해변으로 내려가는 길목에는 '물리니 거리'를 포함한 포지타노의 쇼핑 거리가 해변까지 이어진다. 옷가게가 가장 많고, 도자기 공예품이나 레몬 테마의 가게와 기념품점 등이 있다. 레스토랑도 충분히 많아서 먹고 즐기는 데에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조건이 갖추어져 있다.
포지타노는 원래 중세시대 아말피 공국의 한 항구로 17세기까지는 번영한 도시였다. 하지만 19세기 중반에 인구의 반이상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가난한 어촌 마을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그러다 1953년 5월, 하퍼스 바자에 존 스타인벡의 포지타노 에세이가 실린 뒤부터는 엄청난 관광객이 몰리게 되었고, 그 덕에 지금까지도 관광산업이 도시를 먹여 살리고 있다고 한다.
가벼운 차림으로 운동화 바닥이 탁탁 튕기는 리듬을 따라 포지타노의 계단을 내려간다. 걷는 속도가 빨라지면 왜 기분이 좋아지는 걸까. 나는 무슨 놀이를 하는 것 마냥 신나게 아래쪽으로 향했다. 그린 듯이 휘어지는 곡선의 길이 좋았다. 걷는 길목마다 초록의 식물들이 뒤엉켜있어 좋았다. 이 길 끝에 바다가 나온다는 것이 좋았다. 그렇게 대책 없이 마냥 좋은 기분이었다.
니스에서 보았던 지중해의 짙고 푸른 바다를 다시 볼 수 있었으면 했다. 해가 잠시 얼굴을 내밀었을 때 바다도 파란빛을 드러내려는 걸 분명히 보았다. 하지만 바닷가까지 나오는 그 사이 하늘은 내가 너무 늦었다는 듯 온통 회색빛으로 변해버렸다.
그래도 바다는 좋다. 아담한 해변에는 다 합쳐도 오십 명이 되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이 제 각각 흩어져 흐린 바다를 향해 앉아 있었다. 아이들은 물속으로 자갈을 던지며 놀고 부모들은 자식들이 다칠까 노심초사 지켜보았다. 나는 조약돌이 깔린 해변 위로 걸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바다를 바라보며 넋을 놓고 있어도 의외로 추운 기운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산이 감싸고 있는 지형의 특성상 바닷바람 대신 오히려 부드러운 온기가 등을 쓰다듬어 주는 듯했다. 이런 포근한 해변은 처음이다.
스피자 해변에서는 10월 말에도 낮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 한 두 사람이 돗자리 위에 엎드려 쿨쿨 자기도 했다. ‘저렇게 세상모르고 자도 되는 걸까 ‘싶다가도, ‘그래요 뭐 어때요. 맘껏 자버려요’ 하는 식으로 내 마음도 이내 바뀌어 버렸다. 이런 곳에서는 좀 느긋하고 게을러야 어울려 보였다.
나는 몸을 뒤로 젖히고 팔꿈치로 기댄 채 두 다리를 쭈욱 뻗어 보았다. 자갈이면 아파야 하는데 이상하게 편안하다. 그대로 눕고 싶은 마음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그만큼 포근하다, 이곳은.
등 뒤에는 절벽을 타고 쌓여있는 파스텔톤 집들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고, 눈앞에선 지중해의 수평선이 아득히 시선을 데려가는 곳. 귓가로는 잠든 사람 깨울까 봐 조심조심 왔다가는 얌전한 파도 소리가 올라오고, 코끝에는 옅은 바다 냄새가 은은하게 스치는 곳. 나는 지금, 포지타노의 해변에 있다.
두둑두둑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오늘은 햇살 한번 없이 비가 내린다. 그래도 좋다, 포지타노는. 좋은 곳은 비가 와도 좋은 것이다. 빗소리를 들으며 침대 위에서 뒹굴뒹굴 게으름을 피운다. 여행이 끝나가고 있다는 게 아쉽다. 여행 중에 가장 좋았던 것 중 하나는 걱정할 게 없다는 현실이었다. 과거를 후회하지도 않았고 미래를 대비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좋았다. 그냥 그날을 즐기면 되었으므로. 지금 나에게 이 빗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챙길 것이 없는 것처럼.
오후가 되자 비가 그쳤다. 우산을 가방에 넣고 산책을 나섰다. 부드러운 바람 속에 비 내음이 묻어 있었고 꽃잎마다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비가 와서 그런지 거리는 조용했다. 물리니 거리마저도 한적했다. 해변까지 단숨에 내려갔다.
포지타노에 머문다는 것은 -별다른 뾰족한 수가 없는 한- 하루 종일 여유를 부리며 골목을 기웃거린 뒤 스피자 해변에 들렀다가 돌아오는 그런 하루를 뜻한다. 그 단순한 루틴이 지루하지 않은 곳이 포지타노다. 존 스타인벡이 보았던 포지타노와 오늘의 포지타노가 얼마나 다를지 모르겠지만 ‘꿈의 장소’인 것만은 변함이 없는 것 같다.
"It is a dream place that
isn’t quite real when you are there and
becomes beckoningly real
after you have gone.”
-John Steinbeck, 1953
“그곳은 당신이 머무는 동안에는
그다지 실재하지 않다가
떠난 뒤에야 손짓하듯 현실로 나타나는
꿈의 장소이다.”
-존 스타인벡, 1953
꿈속에서 우리는 그것이 꿈인 줄 모른다. 꿈속에 있을 때 사실 우리는 실재하지도 않는 곳을 헤매는 것이고 깨어난 뒤에야 기억 저편에서 '꿈'이 손짓을 한다. 존 스타인벡의 말은, 그곳에 머무를 땐 너무도 비현실적이어서 꿈을 꾼 듯했다는 뜻이 아닐까. 떠나고 나서야 더욱 선명한 현실로 다가와서는, 다시 손에 붙잡히지 않는 꿈이 되었다는 뜻이 아닐까.
부슬부슬 다시 비가 흩뿌리기 시작한다. 비 오는 스피자 해변은 몽환적이다. 짙은 갈색의 모래 위로 보트들이 널브러져 있고 그 뒤로 희뿌연 하늘이 백지처럼 펼쳐진다. 거기에다 무슨 말이라도 써넣었으면, 싶다. 그럴 거라면 아마 그건 시가 되어야 할 것 같다. 사실 시는 사방에 맴돌고 있지만 누가 그걸 낚아야 하는 법이다. 언젠가 나도 이런 날 시를 써내려 갈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대신 오늘의 나는 시 같은 사진을 찍으려 애를 써 본다.
Ristorante Bruno. 포지타노에 도착한 첫날 저녁, 숙소와 가까운 이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열심히 메뉴판을 보다가 결국 봉골레 스파게티를 선택했다. 주문을 마치자 '감사합니다' 하고 한국말로 인사하는 서버. 브루노에 와서 봉골레 스파게티를 시키는 동양인은 한국인이라는 식이 성립되어 있는 듯했다.
브루노는 시타 버스가 지나는 도로가에 위치해 있는데, 야외테이블 자리는 포지타노의 해변과 마을의 아름다운 풍경이 아주 잘 보이는 끝내주는 스폿이다. 레스토랑과 야외테이블 사이의 일 차선 도로로 차가 쌩쌩 지나가고 서버는 본능적으로 그 사이를 오가며 일을 한다. 접시를 들고 차가 지나는 도로를 건널 땐 내 심장이 다 철렁, 한다.
봉골레 스파게티는 맛이 좋다. 발라낸 조갯살과 쫄깃한 스파게티 면을 돌돌 말아 입속으로 쏙 넣으면 짭조름한 바다 냄새가 입안에서 마구 파도를 친다. 시원한 저녁 바람을 맞으며 꿈같은 포지타노를 바라보며 먹는 한 입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가 없는 맛이다. 식사는 끝났고 함께 시켰던 생수(750ml)가 꽤 남았다. 호텔방에 물이 없기 때문에 따로 사는 것보다 그냥 가지고 갔으면 싶은 마음이었다. 계산을 마치고 일어서면서 -좀 민망했지만- 그냥 테이블 위의 생수병을 멋쩍게 집어 들었다. 그러자 건너편에 있던 서버가 엄지를 척 올려주었다. 순간 정말 고마웠다. 그의 '엄지 척'덕분에 나는 뭔가 공식 인증이라도 받은 듯 당당하게 초록색 물병을 들고 호텔로 돌아갈 수 있었다.
둘째 날 저녁에도 브루노를 찾았다. 어둠 사이로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뒤로 하고 우산을 접으며 레스토랑으로 들어섰다. 오렌지빛 조명이 은은한 실내는 텅 비어 있었고 내가 저녁 장사의 첫 손님이었다. 아늑한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창밖으로 비 내리는 포지타노를 바라보며 서버가 오길 기다렸다. 메뉴는 시푸드와 멜란자네를 곁들인 홈메이드 뇨끼를 주문했다. 뇨끼란 감자나 세몰리나 밀가루로 반죽을 빚어 만드는 요리로, 말하자면 이탈리아식 수제비 같은 것이다. 얼마 후 깨끗하고 하얀 테이블보가 덮인 식탁 위로 주방의 팬에서 방금 옮겨 담은 근사한 해산물 요리가 올라왔다. 나의 포크와 나이프가 유리그릇으로 달려들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고요한 레스토랑을 가득 채운다. 하루가 배부르게 저물어가는 행복한 소리였다.
비가 내리는 몽환적인 해변으로 산책을 나갔던 오후였다. 늦은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해변의 한 레스토랑으로 무작정 들어섰다. 처마 끝으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테라스에 앉아 지중해를 바라보며 커피 한 잔도 마셔볼 참이었다. 그런데 앉고 보니 5성급 호텔 레스토랑이다. 그래도 비 오는 날 주머니 사정 생각하며 가게를 찾아다니고 싶지가 않았고, 무엇보다 그 자리가 맘에 들어서 그냥 머물기로 했다. 뭔가 좀 다른 것을 먹어보려고 치킨 브레스트와 포테이토 요리를 주문했다. 얼마 후 내 앞에 등장한 커다란 접시 위에는 치킨 요리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플레이팅이 펼쳐져 있었다. 마늘처럼 썰어놓은 구운 감자 조각들 위로 안심 스테이크처럼 컷팅된 닭가슴살 네 조각이 우아하게 얹혀 있고, 그 위로 올리브 오일과 허브가 어우러진 향긋한 소스가 촉촉하게 감싸고 있는 자태. 그야말로 내 생애 가장 고급스러운 치킨 요리가 아닐까 싶었다. 나는 구운 감자와 치킨을 오물거리며 조용히 느릿느릿 식사를 했다. 식사 후에는 커피까지 한 잔 마시며 일어나고 싶을 때까지 여유를 부렸다. 이런 호사는 기회가 왔을 때 실컷 누려야 하는 법이니까.
마지막 날에는 새벽같이 일어나 날이 밝는 것을 지켜보았다. 어스름 속에서 불빛이 하나 둘 사라져 갔다. 나는 옷을 개어 캐리어에 집어넣다가 밖을 한 번 보고, 또 화장품 파우치를 싸고 나서 발코니로 한 번 나가보고 그랬다. 3유로를 주고 산 레몬 캔디를 하나 꺼내어 입에 넣었다. 달달하고 새콤한 레몬의 맛과 향이 혀끝에서 춤을 추며 아쉬운 마음을 위로해 준다. 이 사탕의 개수만큼이나 포지타노를 기억하게 될 것 같다. 입안에 사탕을 굴리며 짐싸기를 마쳤다. 캐리어의 지퍼가 닫혔고 자물쇠까지 단단히 채워졌다. 나의 사소한 물건들로 어지럽던 책상 위는 다시 텅텅 비었고, 활짝 열린 옷장 속으로 앙상한 옷걸이들만 제 멋대로 걸려 있다. 쓰레기통은 나의 흔적들로 메워져 있고, 바닥은 나의 발자국들로 채워져 있다. 나의 이불들이 잘 가라며 기지개를 켠다. 나의 창이 그리울 거라며 가슴을 열어 보인다. 버스 시간이 다 되었다. 이제 정말 가야 한다.
느리게 보고 느끼며
걷다가 머물고 즐기면 되는 곳
시타 버스가 구불구불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 나갔을 때, 나는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하며 멀어지는 포지타노 마을을 향해 연신 고개를 돌리곤 했다. 심장이 아직 껌딱지처럼 거기에 붙어서 나를 자꾸 잡아당기는 것만 같았다.
아침에 아무 걱정 없이 일어나 그대로 발코니로 나가서 눈곱 낀 눈으로 숨이 멎는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게 되는 곳. 여유를 부리다가 어슬렁어슬렁 물리니 거리를 돌아다니고, 이 가게 저 가게 구경하다가 식사 때가 되면 아무 레스토랑에나 들어가 맛난 시푸드를 먹게 되는 곳. 늦가을 스피자 해변에 앉아 하염없이 지중해를 바라보아도 차갑게 몰아치는 바람 대신 포지타노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는 곳. 그렇게만 하루하루를 보내도 이상하게 죄책감이 들지 않는 곳. 뒤쳐질 일이 없는 곳. 그저 누리면 되는 곳. 느리게 보고 느끼며, 걷다가 머물고 즐기면 되는 곳. 도저히 불평이라고는 떠오르지 않는 곳. 마음에 쏙 드는 선물 같은 곳. 그런 곳이 포지타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