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라서 좋은 날
내가 아는 경계 안에서만 산다면
얼마나 많은 기쁨의 가능성이 죽어버릴지
모르는 일이다.
여행 다섯째 날이 밝았다. 가장 기대하고 있는 로망의 숙소로 이동하는 날이다. 아침식사 전에 미리 짐을 싸놓기로 했다. 옷가지와 화장품 등을 하나씩 캐리어에 던져 넣다가 꼼꼼하게 만들어온 일정표를 발견했다. 헛웃음이 나온다. 생애 처음으로 나 홀로 떠나온 여행. 욕심이 많았다고 해야 할까, 의욕이 앞섰다고 해야 할까.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몰랐던 것 같다. 빽빽한 일정표에서 술술 빠져나간 장소가 한 둘이 아니다. 드로트닝홀름 궁전과 궁정극장, 그 유명한 노벨박물관, 스칸센, 바사호 박물관 그리고 꼭 가보고 싶었던 밀레의 공원과 우드랜드 묘지공원...... 스톡홀름에 뭐 볼 게 있어서 가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나로서는 할 말이 참 많다.
여행을 떠나기 전 기대감은 황홀했지만 여행에도 현실이 존재했다. 꿈을 꾸는 데에는 필요하지 않았던 체력이라는 현실이 가장 먼저 나타났다. 게다가 불편한 점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장거리 비행과 좁은 좌석, 어떤 사람일지 모를 옆 좌석 동행, 입에 맞지 않는 음식과 사진에는 보이지 않는 매서운 바람까지 마음에 안 드는 현실은 어디에나 있었다. 여행에 대한 감성적 환상만을 기대하고 있던 단순한 초보로서 실망은 이미 예약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내 돌아서면 미소를 번지게 하는 감라스탄의 숨 막히는 풍경이 있었고, 한없이 바라보고픈 멜라렌호의 평화로운 물결이 있었으며, 새로운 세계가 선사하는 심장의 두근거림은 여전히 존재했다. 불평할 새도 없이 감탄이 이어졌다. 무엇보다 이전에는 몰랐던 낯선 내가 거기에 있었다. 이곳에 오지 않았더라면 만날 수 없었을 나의 어떤 조각들... 문득문득 그것을 발견하는 느낌은 고유하고 특별한, 그리고 기대한 적 없는 감탄이었다. 이러한 감탄을 위해 불편은 감수할 수 있는 것이 되어 갔다. '여행의 보편적 불편’이라는 이름으로 늘 짐가방 한구석에 넣어가야 할 필수품으로 인정하게 된 것이다.
보편적 불편... 삶에도 있지 않았을까? 세금을 내야 하는 일, 지옥철에 시달려야 하는 일, 맞지 않는 사람과 일해야 하는 일, 사랑하는 사람과 부딪히는 일... 나는 그런 일들을 보편적으로 여기지 못했던 것 같았다. 그래서 나에게만 일어나는 듯한 불편함에 집중하느라 삶이 주는 감탄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날들이 많았던 것 같았다. 뭘 그렇게 칭얼대고 있었나 모르겠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는데 말이다.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은 왜 그리도 힘들었을까. 누가 뭐라 하지 않는데도 선뜻 벗어나지 못했던 지난날들이었다. 남들과 다르다는 것은 자부심이 아니라 두려움이었다. 그곳만 벗어나면 이토록 수많은 '다름'이 존재한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조금 더 일찍 이렇게 왔더라면, 조금 덜 두려웠을 것을. 하지만 아직 기회는 있다. 너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너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위협하는 목소리에 더 이상 사로잡히지 말자. 사로잡히지 않으면 저항할 필요도 없다. 그저 마음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어가자, 자유롭게.
오늘 내 마음의 화살표는 셉스홀멘이다. 그리고 이날 이후로 지금까지 그 화살표는 방향을 바꾼 적이 없다. 사실 스톡홀름 여행을 통틀어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곳이 셉스홀멘이었다. 여행을 다녀와서도 한 달 동안 매일매일 그리워했을 만큼 잊지 못할 장소이기도 했다. 얼마나 대단하길래 그러느냐고 묻는다면 화려하게 나열할만한 명소는 없다. 다만 그 섬의 소소한 모든 것이 좋았을 뿐이다.
감라스탄 동쪽에 있는 작은 섬 셉스홀멘은 정말 작은 섬이다. 작다는 말로도 가늠이 안될 만큼 아담하다. 가로지르는 직선거리가 500미터, 한 바퀴 다 돌아도 1.5킬로미터밖에 안 되는 정말 귀여운 섬이다. 아름다운 숲과 산책로 사이로 현대미술관을 비롯해 건축디자인 뮤지엄, 동양 앤틱 뮤지엄, 아트 스쿨, 도서관, 뮤직홀 등으로 가득한 예술의 섬이기도 하다. 그러니 좋은 것만 가득한 꿈의 섬일 수밖에 없다.
두근두근. 셉스홀멘을 향해 뻗어있는 다리 앞에 섰다. 청명하고 새파란 하늘이 눈부시게 아름답다. 여전히 바람은 불지만 괜찮다. 바람도 친구로 삼을 수 있을 만큼 화창하니까. 다리 건너편에는 울창한 초록의 숲이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여행의 오후...... 완벽한 순간이다.
소박하고 운치 있는 다리를 향해 한발 한발 내딛기 시작했다. 삐걱삐걱 나무소리에 기분이 들뜬다. 길지 않은 다리지만 그냥 지나쳐 가기엔 아까운 풍경들 때문에 좀처럼 속도가 나질 않는다. 늠름한 자태의 선박들과 아기자기한 보트들이 섬의 가장자리를 따라 정박해 있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느슨해지고 기분이 여유로워진다.
다리 중간쯤 도착하니 모두들 기념사진 찍기가 한창이다. 대단한 스폿인가 싶어 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 너머로 보니 아- 하고 피식 웃음이 난다. 다리 난간 중앙에 장식되어 있는 금빛 왕관. 사진에서 많이 봤던 장식이다. 근데 좀 실망이다. 표면도 낡았고 크기도 매우 작다. 내 차례가 되어 속았다는 생각으로 카메라 렌즈를 들이대 본다. 그런데 프레임 속에 들어가자 이야기가 달라지기 시작한다. 중세풍의 건물과 멜라렌호의 잔잔한 물결이 배경으로 나타나자 순간 낡은 왕관이 매력적인 주인공으로 변신한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멋진 배경을 갖는다는 건 중요한 일임에 틀림없는 모양이다. 내가 지금 살아가는 날들도 아름답게 쌓여서, 내가 낡은 몸이 되었을 때 나를 더욱 멋지게 만들어주는 배경이 되었으면, 싶다. 그럴 수 있도록 살아야겠다, 한다.
다리 위의 그림 같은 풍경이 끝나고 이어서 셉스홀멘의 찬란한 초록숲이 시작되었다. 높다란 나무 위 연두빛 잎사귀들 사이로 하얀 햇볕이 쏟아져 내린다. 은은한 한낮의 고요함 속에서 수줍게 지저귀는 낯선 새소리에 두 귀가 쫑긋거린다. 아름다운 자연은 존재만으로도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이자 환희다. 참으로 오길 잘했다. 가슴이 설레고 심장이 두근거린다. 믿기지 않지만 그냥 이곳에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말이다. 이런 느낌은 뭘까? 대단한 장관도 아닌 평범한 산책길에서 그토록 가슴이 벅찼던 까닭은 아마도 그날 내 마음이 원하던 바로 그 무언가를 만났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알았던 것은 아니고 이끌린 것은 맞다. 이런 식이 되고 보니 대체 내가 안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보잘것없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아는 경계 안에서만 살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 기쁨의 가능성을 막아서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라는 생각도.
현대미술관을 향해 걷는다. 지도를 볼 필요도 없이 걷다 보면 자연스레 미술관으로 향하게 되어 있다. 입구로 이어지는 길 초입에 들어서자 기묘한 인상을 풍기는 캐릭터가 시선을 끈다. 나무로 만든 이 조각은 비를 가려줄 지붕까지 마련된 자신만의 좁은 공간에서 다리를 쩍 벌리고 난간에 걸터앉아 있다. 5대 5 가르마 밑으로 커다란 눈망울이 돋보이는 그는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한 오묘한 미소를 짓는다. 귀엽지도 아름답지도 않지만 쉽게 잊히지않는, 독특하고 강렬한 인상이 예사롭지 않다. 여기서부터 벌써 현대미술이 시작되는 듯하다.
미술관 정원에 들어서자 시원하게 뿜어내는 분수의 물방울들이 공중으로 퍼져나간다. 파릇파릇한 잔디와 나무들 사이로 알록달록한 야외 조각상들이 눈길을 끈다. 실상은 조용하지만 내 마음속에선 파티가 벌어진다. 분수는 샴페인처럼 터지고 조각상은 케익처럼 시식을 기다린다. 그리고 드디어 눈에 익숙한 알렉산더 칼더(Alexander Calder,1898~1976)의 모빌을 만난다. 근데 어라? 아차, 그렇지! 나는 늘 사진으로만 봐서 생각지 못했던 풍경에 잠시 놀란다. 칼더의 모빌 작품을 처음으로 보는 아니 경험하는 순간이다.
바람의 일렁임을 따라 거대한 4개의 모빌이 제 각기 움직인다. 생긴 모양과 높이에 따라 각기 다른 박자를 연주한다. 그야말로 살아있는 그림이고 그 자체가 춤이며 공연이다. 맑은 날과 흐린 날, 눈 오는 날과 비 오는 날, 해가 뜰 때와 해가 질 때 등 다양한 캔버스 위에서 펼쳐졌을 수많은 조합을 생각하니 한꺼번에 수십 개의 그림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각각의 모빌이 얼마 만에 한 바퀴씩 돌아 제자리로 돌아오고, 또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만나는지 궁금했다. 이들의 이야기를 지켜보기 위해 나는 한동안 그 앞에 멈춰 서 있었다. 어느새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돌아가는 묵직한 움직임과 무심한 쇳소리에 나도 모를 평안만을 느꼈을 뿐......
현대미술관은 그리 현대적으로 보이지 않는 외관과는 달리 내부시설은 쾌적하고 모던하다. 로비와 복도를 지나 시작되는 첫 전시. LP판, 지팡이, 티셔츠와 잡지, 사진과 조각, 우산 등 잡다한 것들이 여기저기 붙어있다. 작가의 의도에 따라 편집하고 따로 또 같이 붙여놓은 각양각색의 콜라주 작품들 앞에서 무엇을 느껴야 할지 난감하다. 현대미술은 작가가 표현하고자 결심한 그 무엇이 가장 중요한 핵심일 텐데 작품이라는 표면만으로 그것을 느끼기엔 내가 많이 부족할 따름이었다. 왜라고 묻기 시작한다면 아마 대혼란에 빠질지도 모르니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지나간다. 하지만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구나, 하며 내가 생각해본 적 없는 모든 것들로부터 받는 자극만으로도 충분히 신선한 만남이다. 피카소나 마티스, 달리나 앤디 워홀 등 익숙한 화가들의 작품들도 일부 있어 반갑고, 낯선 스웨덴 예술가들의 작품들도 나름대로 감성과 위트가 돋보여 흥미롭다. 사진과 회화, 조각, 비디오 아트 등 다채로운 전시 구성에 감상은 지루할 틈이 없다.
그렇게 감상을 즐기다 자연스레 바라보게 된 커다란 창. 그곳에서는 아니나 다를까 살아있는 그림이 펼쳐지고 있었다. 시청 앞 정원에서, 그랜드 호텔 앞 벤치에서 그리고 포토그라피스카 카페에서도 보았던 바로 그 파노라마. 의도적으로 이렇게 박스형 창을 내어 마치 깊은 액자처럼 만들었음이 분명할 것이다. 누구라도 이 아름다움을 벽으로 막아놓고 싶지는 않으리라.
미술관 감상을 마치고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카페에 들렀다. 감자와 달걀이 곁들여진 새우 샐러드와 루이보스 차 한잔을 주문했다. 따사로운 햇볕이 내려앉은 초록빛 정원에 이끌려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지만, 이내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 아, 이 바람은 나에게만 불어오는 것인가. 어째서 다른 테이블의 사람들은 너무나도 초연해 보이는 걸까. 하긴 그들 눈엔 조용히 혼자 샐러드를 먹고 있는 내가 초연해 보일 수도 있겠다. 어쩌면 인생을 살아가며 초연해 보이는 사람들도 그저 내색을 하지 않는 것뿐인지도 모른다.
이번 샐러드는 대성공이다. 새우가 여전히 짜긴 하지만 대신 매우 신선하다. 감자와 달걀, 샐러드가 함께 조화를 이루는 맛이 일품이다. 달달한 뒷맛을 남기는 루이보스도 맛이 좋다. 아름다운 정원에서 맛난 점심을 즐길 수 있어 기분이 좋은 건 사실이지만, 점점 시려오는 손 때문에 결국은 샐러드 접시를 비운 뒤 남은 차를 들고 실내로 들어갔다. 뜨거운 물을 조금 더 부탁해 다시 찻잔을 가득 채운 뒤 아늑한 창가 자리에 앉았다. 두 손으로 찻잔을 감싸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내가 앉아 있었던 빈 테이블에 괜스레 눈길이 갔다.
셉스홀멘섬에 있는 다른 박물관들은 과감히 포기했다. 박물관보다 섬 자체가 마음에 들어서 여기저기 무작정 걸어보고 싶었다.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예쁜 건물들이 하나씩 자리하고 있었다. 딱 이런 마을에 살았으면 좋겠다 생각하고 있는데 이내 멜라렌 호수가 나타났다. 건너편으로 펼쳐진 감라스탄을 바라보며 산책을 이어간다. 물가에 늘어선 나무를 따라 천천히 걷고 있자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다. 햇볕의 온기마저 적당하다. 내 심장이 딱딱했었던 모양이다. 무언가 말랑말랑하게 녹는 듯 따듯해져 온다.
이번엔 나무들이 울창한 섬 안쪽으로 들어가 본다. 이곳의 나무들은 모두 색깔이 밝아서 마음까지 화사해진다. 어느 잔디 위에서는 한 남자가 유모차를 곁에 두고, 아기를 품에 안은 채 책을 읽고 있다. 온라인 속에서 보았다면 ‘좋아요’를 눌렀을 것 같다.
한참을 걷다 나뭇가지에 밧줄로 매달아 놓은 그네를 발견했다. 보는 이도 없고 그네도 튼튼한 것 같아 그 위에 털썩 앉았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나뭇잎들이 사이에 끼어든다. 그네를 묶어놓은 굵은 나뭇가지와 나뭇가지로부터 내려오는 그네의 줄도 보인다. 몇 발자국 뒷걸음질 친 뒤 두 다리를 들고 그네에 몸을 맡겼다.
왔다... 갔다... 왔다... 갔다...
삐걱거리는 나무그네 소리만 있을 뿐 고요한 순간이다. 눈을 감는다.
스스스스스슥......
바람이 나무 이파리들을 쓰다듬으며 지나가는 소리...... 그리고 어디선가 지저귀는 새소리가 숲을 채운다. 나는 거친 밧줄에 고개를 기댄 채 다시 바람이 돌아오기를, 새들이 몇 마디 더 노래해주기를 기다리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이 순간과 나. 그것만으로 충만할 수 있는 세상이 잠시 찾아왔다. 혼자라서 더 좋을 때가 있다면 바로 지금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