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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주아 Feb 02. 2017

경계를 넘는다는 것

포토그라피스카와 4개의 전시


그 너머엔 무엇이 있을까?




포토그라피스카는 화려하진 않지만 잊히지 않는 곳이다. 빛바랜 붉은 벽돌 위에 'Fotografiska'라는 검은 글씨가 붙어있는 빈티지한 첫인상부터 마음에 들었다. 그 앞에 도착한 순간 비에 온통 젖었다는 사실은 하얗게 잊혔다. 뭔가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알 수 없는 설렘이 느껴졌다. 사실 무슨 전시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찾아간 것이었다. 여행자인 내겐 어차피 기다릴 수도 바꿀 수도 없는 프로그램이니 굳이 고를 필요도 없었다. 전적으로 우연에 기댄 일정이었다. 그날 그곳에서 나와 인연이 닿은 전시는 총 4개다. 아무런 정보 없이도 나름대로 즐기면서 감상했던 전시들이었지만 돌아와서 작가와 작품에 대해 알아보고 나니 더욱 고개가 끄덕여졌다. 현대 예술은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는 보아야 -눈에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사랑할 수 있다. 때문에 나는 여행을 다녀오고 그날 만났던 전시에 대해 좀 더 알게 된 후 그날의 경험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포토그라피스카 건물은 1906년 스웨덴 건축가 퍼디난드 보베르그(Ferdinand Boberg, 1860~1946)에 의해 아르누보 양식으로 설계되었다. 이 아름다운 건축물에는 고작(?) 세관청이 들어왔는데 역사적 가치를 훼손하지 않기 위해 개조는 법적으로 절대 금지였다고 한다. 내 편견으로는 세관청으로 쓰기엔 너무 감성적인 건축물이라 여겨지지만, 스톡홀름 시청의 아름다움을 생각하면 세관청도 이 정도는 아름다울 수 있다는 점이 이해가 된다. 아름다운 관공서로 볼 일을 보러 가는 기분은 어떨까? 나쁠 것은 없는 듯하다.

어쨌거나 2010년 5월 21일, 이곳은 드디어 포토그라피스카로 재탄생하게 된다. 그러면서 현대 사진 전시관에 어울리도록 인테리어는 바뀌었지만, 아름다운 붉은 벽돌로 디자인된 파사드만큼은 원형의 매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비가 오는 날씨에도 포토그라피스카를 찾은 사람은 제법 많았다. 나이를 불문하고 성별에 관계없이 다양한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유모차 손잡이를 끌며 다섯 살쯤 되는 딸의 손을 잡은 어느 젊은 부부 뒤에 나도 섰다. 초롱초롱한 아기의 눈망울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낯섦도 경계도 없었다. 그래 그렇게 평안할 수만 있다면, 하고 나는 바란다. 어쩌면 나는 다시 그 눈빛으로 돌아가려고 애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부모들의 시선은 내 키보다 한참 높았고 아기의 시선과 더 가까웠던 나는 둘만의 까꿍놀이를 했다. 까꿍은 전 세계 어딜 가나 다 통하나 보다. 줄은 금세 줄어드는 듯했고 어느새 내 차례가 다가왔다. 스톡홀름 카드로 입장료를 대신하고 간단히 전시장으로 입장.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커다란 스크린이 하나 서 있다. 홀로 조용히 흘러가는 영상이 눈과 귀를 사로잡는다. 발길을 주춤거리다가 스크린으로 다가갔다. 모래사막에서 불어대는 바람 소리. 휘이- 하는 소리뿐이다. 장면이 바뀐다. 사막 한가운데에서 갖가지 색깔의 깃발들이 세차게 펄럭인다. 그뿐이다. 하지만 단순하기 그지없는 이 영상은 묘한 끌림으로 나를 긴 의자에 털썩 주저앉게 만들었다. 하염없이 영상을 바라보고 소리에 몰입한다. 그러자 비바람을 헤치고 걸어온 몸도 좀 풀리고 마음도 편안해진다. 그 순간 나는 아무것도 이해하는 것이 없었기에 마치 언어가 통하지 않는 외국인과 마주하고 있는 듯했다. 무슨 말인지는 몰랐지만 마음이 따뜻하다는 것만은 느낄 수 있었다.


눈 앞에 보이는 사막 같은 허허벌판과 그 사이를 비집고 위태롭게 서있는 나뭇가지들. 앙상한 가지에 서로 엉킨 채 펄럭이는 빨갛고 파랗고 하얀 천 조각들. 대체 뭐였길래 그리도 마음을 건드렸을까? 이 작품들은 미국 브루클린 출신의 포토그래퍼이자 비디오 아티스트인 리사 로스(Lisa Ross)의 사진과 영상,‘Living Shrines(살아있는 성지)’라는 주제의 전시였다.


그녀는 과거 중국을 여행하던 중 신장 위구르 지역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낯선 표식들-막대기, 천조각들, 동물의 뼈대 같은 것들-을 발견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그 표식들로 인해 독특한 풍경을 연출하는 크고 작은 모래 언덕들이 그곳 민족의 성스러운 장소라는 것도 알게 된다. 그때부터 더욱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 그녀는 이후 10년여 동안 매년 방문하면서 그 뜻을 이해하고 느낌을 흡수하려 노력해왔는데, 그 흔적의 기록이 바로 이번 전시라고 한다. 거대한 중국으로부터 분리 독립을 원하는 한 소수 민족의 이야기와 그들 고유의 종교적, 민족적 혼이 그녀에게는 예술적 영감으로 다가간 듯했다. 현실에 그어진 경계 너머를 바라보는 그들의 간절한 기도가 나까지도 위로해 주는 듯했다. 그 끊임없는 펄럭임이 희망의 몸짓인 듯하여.  


두 번째 전시로 이동하는 길목에는 빛이라고는 몇 개의 핀 조명 밖에 없는 캄캄한 공간 가운데 까만색 가벽만이 세워져 있다. 벽의 중앙에는 눈부신 하얀빛을 내며 Dana Sederowsky라는 철자만이 강렬하게 존재한다. 뭔가 시작부터 어둠이 느껴진다.

다나 세데로브스키(Dana Sederowsky, 1975~ )는 스웨덴 헬싱보리 출신의 주목받는 포토그래퍼 및 비디오 행위 아티스트로, 특히 자신의 목소리와 얼굴, 몸을 직접 사용하여 작업하는 작가다. 이날 전시는 데뷔 시기인 1998년부터 시작해서 2013년까지 그녀의 15년 커리어를 통틀어 선별한 대표적인 작품들과 이곳에서 처음 선보이는 신작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중 가장 먼저 만난 것은 마치 전쟁 폐허 같은 낡은 건물의 텅 빈 실내 한가운데에서 차렷 자세로 서 있는 무표정한 간호사 시리즈였다. 사진 속의 간호사는 모두 작가 자신으로‘닥터 다나’라고 스스로 이름을 지어 놓았다. 사진 속 배경은 이탈리아의 아름다운 빌라, 뉴욕의 도심, 독일의 폐요양원 등 때로는 아름답고 때로는 괴이하다. 독특한 사실은 닥터 다나에게서 환자를 치료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그녀가 이런 연출 사진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상식적인 간호사가 아니었다. 이 지점에서 작가는 경계를 넘는 듯했다. 그녀가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간호사라는 존재가 발산하는 자신감, 간호사가 됨으로써 환자를 향해 행사할 수 있는 일종의 권력과 권위, 환자로부터 신뢰를 획득하게 되는 효과 등 묘한 정신적 차원이었다.

관람 당시 이런 심오한 의미를 이해할 리 만무했던 나는 무뚝뚝하게 서 있는 수많은 간호사 기념사진 퍼레이드 앞에서 난감할 뿐이었다. ‘컨템퍼러리’라 불리는 현대 예술 세계의 정신적 미로 속에서 서서히 혼미해지기까지 했다.



급기야 다나 세데로브스키의 다음 작품은 나의 미로를 유령의 집 차원까지 데리고 갈 만큼 음울했고, 공포감마저 조성하는 ‘HEAD’라는 제목으로 나타났다.

암흑 속에서 눈가에 검은 아이라인을 짙게 그린 한 여성이 자기 머리 크기의 일곱 배는 되어 보이는 커다란 돌 덩어리를 정수리에 올려놓고 있다. 왜 저렇게 하고 있는 걸까? 이건 뭘 표현하려는 걸까? 사진 속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 순간 눈이 깜빡거린다! 그리고 미세한 움직임! 숨을 죽이고 쪼그라들어 있던 심장이 소스라치게 놀란다. 맙소사! 이건 영상 작품이었다.


과거 어느 날 그녀는 가장 가까운 누군가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는다. 순간 그녀의 세상은 갑자기 멈추고 만다. 소리까지도 모두 정지. 그녀는 한참 동안 멍하다. 칠흑같이 컴컴한 공허감과 어마어마한 상실의 무게만이 짓눌렀던 그때, 그녀는 그러한 깊은 슬픔을 예술적인 방식으로 해석해 볼 길을 찾으려고 애를 썼고, 그 결과 탄생한 것이 ‘D.E.A.D 프로젝트’였다.

이 비디오 아트는 그녀 자신이 직접, 죽은 이에 대한 영원한 기억을 상징하는 거대한 돌을 머리에 올려둔 채 시작된다. 중력이 잡아끄는 거부할 수 없는 엄청난 무게를 지탱하며 고통을 견디는 과정을 통해 비탄에 빠져드는 감정의 진행을 표현한다. 영상이다 보니 고통을 느끼는 그 표정과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 어그러지는 말소리까지 너무나도 생생하게 체험하게 된다.

당시 의문의 자학 장면으로만 보고 -나는 그렇게밖에 볼 줄 모르는 사람이었고- 작품이 주는 그로테스크한 분위기 때문에 얼른 지나치려 했던 것이 의미를 알고 보니 미안해진다. 나 또한 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한 뒤 오랫동안 슬픔의 감정을 겪어보았기에 그녀가 느낀 깊은 슬픔의 무게와 그 아픔을 공감한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러할 것이다. 그 무형의 느낌을 자신의 몸을 빌어 유형의 고통으로 옮겨 표현한 그녀의 희생에 뒤늦게 박수를 보낸다. 그녀의 고통은 죽은 이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애도였다.




스웨덴 화폐로 120크로나(SEK), 한화로 약 18,000원의 입장료를 내면 네 가지의 모든 전시를 다 관람할 수 있으니 살인적인 스웨덴 물가를 생각하면 비용 대비 꽤 양질의 문화를 즐길 수 있는 곳이 바로 포토그라피스카다.

리사 로스와 다나 페데로브스키의 전시를 본 뒤 가라앉게 될 관람자의 마음을 미리 알기라도 한 듯, 이해하기 위해 열심히 돌려야 했던 뇌의 가동을 잠시 멈추어 갈 시간이라는 듯, 이어지는 세 번째 전시는 세바스치앙 살가두(Sebastiao Salgado,1944~ )의 GENESIS(창세기)전이었다. 직관적이고 원초적이며 즉각적으로 마음에 와 닿는 사진들일 것이다. 금방이라도 첨벙거리며 바닷속으로 사라질 듯한 거대한 고래의 꼬리. 그의 아내이자 큐레이터인 렐리아 와닉 살가두의 전시 설명과 함께 대표로 마중 나와 있는 사진이다. 그 곁에서 어서 오라는 듯 열려 있는 문을 통해 전시관으로 들어간다.


세계적인 거장, 현존하는 최고의 다큐멘터리 사진작가인만큼 그의 사진들은 경이로움 그 자체다. 2004년부터 약 30개국을 돌아다니며 만난, 현대 문명의 영향과는 동떨어진 장소와 사람들. 그 8년간의 여정을 통해 완성된 놀라운 사진들 속에서 그는 태초부터 이 땅에 존재해 온 인류의 기원이 담겨 있는 원시 자연을 찬미한다. 물질적인 행복만을 쫓아가다가는 언제 잃어버릴지 모르는 이 아름다운 지구를 보존하고 지켜나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토록 아름다운 세상에 살고 있음을, 그냥 평범한 여행으로는 볼 수조차 없는 광경을 보여준다. 잠든 줄도 몰랐던 정신을 다시 깨어나게 만들어 준다.



장엄한 극 지대, 열대 우림과 초원, 광활한 사막 등 생각할 수 있는, 아니 생각조차 못한 가장 멀고 깊은 미지의 장소들을 두 눈에 담는다. 상상해본 적도 없는 신비롭고 낯선 장면들. 그의 눈은 대체 어디까지 볼 수 있었던 것일까? 그 경계는 어딜까. 내가 절대 볼 수 없는, 아마 앞으로 볼 수 없을 것들을 그는 보여주었다. 막상 내가 그곳에 가 있다고 생각하면 겁부터 나는 오지이지만, 그가 삶을 바쳐 헌신한 덕분에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자연 속에서 치열한 생존을 이어가는 야생 동물들의 모습과 원시 부족이 문명의 이기로부터 자신들을 지켜내고 있는 그들만의 세상. 환상적인 빛의 표현과 기발하고 멋진 구도, 피사체의 아름다운 배치가 너무나도 훌륭하게 담긴 사진들을 애정과 감탄으로 들여다보았다. 사진은 가까이 보면 볼수록, 오래 보면 볼수록 살아나는 듯했다. 그리고 나는 현실이라고 너무나도 분명히 말하고 있었다. 나도 너처럼 지구 어느 한 모퉁이에서 매일 살아가고 있다고. 

'사라지면 안 돼...' 어느새 나도 모르게 되뇌고 있었다. 우리의 지구는 아름답다... 인정하고, 기억하고, 보호해야 할 가치가 있다... 그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 그의 소리 없는 메시지에 이미 나는 한참 전에 설득된 것 같았다. 어느 등기소에 내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지 않아도, 지구가 아껴야 할 내 땅인 것 같았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연이어 전시 3개를 본 건 처음이다. 머리는 머리대로 심장은 심장대로 충분히 채워졌다. 하지만 아무리 채우는 게 좋아도 4개 연속은 무리였다. 휴식이 필요했다. 인터미션.

3층에 카페가 있다는 표시를 따라 올라갔다. 카페에는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통창이 근사한 액자처럼 펼쳐져 있었다. 액자 속에는 호수 너머 회색 빛 하늘 아래, 감라스탄과 셉스홀멘 그리고 유르고덴 풍경이 차례로 펼쳐졌다. 얼마 후면 다시 사진 속 장면이 될 터이기에 사진전 못지않게 직사각 프레임 속의 살아있는 사진이 반가웠다.

카푸치노 한잔을 주문해서 받아 들고는 자리를 잡으려는데 마침 창가에 앉은 한 커플이 일어나려 한다. 이런 운이 좋은 편이 아닌데 웬일인가 싶다. 자리를 옮겨 창가 자리를 차지한다. 흐린 날의 스톡홀름 풍경은 그 나름대로의 감성이 있다. 불과 몇 시간 전 뺨을 때리는 비바람을 맞으며 걸어왔던 생각을 하면 그렇게 말하기 머쓱하지만 막상 아늑한 실내에 앉아 있으니 다 잊히고 만다.


문득 내 앞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잔 하나가 쓸쓸해 보인다. 동행이 있다면 이런저런 사소한 대화를 나눌 텐데 싶다. 리사 로스의 영상이 너무나 평화로왔다고, 다나 세데로브스키 그 돌덩이 영상 보고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고, 세바스치앙 살가두의 흑백 사진은 너무 환상적이라고 말했을 텐데 말이다.

커피가 조금씩 줄어든다. 혼자서도 무슨 생각을 하든, 뭘 끄적이든 지루해하지 않는 편인데, 웬일인지 아무런 집중도 되지 않는다. 이 순간, 이 풍경을 반드시 그리워하게 되겠지, 하며 보고 또 보기만 한다. 그런데도 돌아와서 이때를 되돌아보면 창밖의 풍경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묘하게 외로웠던 느낌만 선명하게 떠오를 뿐.  





오늘의 마지막 전시를 보기 위해 다시 전시관으로 내려왔다. 방금 전 겨우 쓸쓸함을 떨쳐내고 오는 길인데, 아이러니하게도 대놓고 우울한 제목의 전시가 나를 맞이한다. 루 코브스키(Lu Kowski, 1986~ )라는 신예 작가의 ‘Melancholia(우울증)’라는 전시다.


우울하고, 우울하다. 이런 걸 왜 보고 있어야 하는 걸까? 이런 걸 왜 찍는 걸까? 현대 사진이란 뭘까? 지금보다 사진 예술에 대한 이해가 한참 부족했던 그때의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이게 나야, 나에게 의미 있는 순간이야, 너에게도 의미 있길 바랄게... 만으로 예술이 될 수 있는 걸까? 나는 수많은 물음표들로 무거워지는 발걸음을 조금씩 옮겨 갔다.   


스웨덴 북부에 위치한 도시, 우메아(Umea)에서 출생한 뒤, 세 살 때부터 그리스 아테네에서 살아온 그녀는 아날로그 기법의 촬영을 즐긴다고 한다. 그녀의 작품 중에는 때로 형체를 알아볼 수 없고, 포커스가 맞지 않은 사진들도 있지만 자신의 사진에서 중요한 것은 테크닉이 아니라 사진에 담긴 바로 그 순간이라고 말하는 그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자신의 내면세계와 느낌을 표현한다는 그녀의 흑백 사진들은 대체로 클로즈업으로 확대된 신체부위, 사람들의 표정과 눈빛, 자세 등으로 모두 기괴하고, 어둡고 때로 무섭고 역겨움까지 느끼게 한다.

하지만 자신과 자신의 삶 속의 깊고 어두운 면을 구석구석 바닥까지 파고드는, 철저하게 다 벗고 그 혐오스러움 까지와도 대면할 수 있는 용기와 열정이 그녀를 예술가로 승화시키는 듯했다. 그녀는 보여주기 어려운 경계의 안쪽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었다.


자신의 사진을 감상하는 사람들이 그 속에서 감상자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하기를 바란다는 것이 그녀의 제안이다. 각자의 처해 있는 상황이나 과거의 경험에 따라 주관적인 해석을 하면 되는 것이라며.

그녀가 표현해 놓은 수많은 작품 속 몇몇 고독한 풍경의 이미지들은 나에게도 인상적으로 보인다. 내 잠재의식 속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듯 익숙하고 이끌리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진들은 주관적인 해석은커녕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이토록 노골적으로 우울하고 괴상한 사진들을 줄줄이 보고 있자니 한 가지 독특한 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흠칫 뒷걸음질 치던 것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익숙해지는 것. 익숙함에 힘이 있는 것 같았다. 부정하거나 외면하고 있다가 자신도 모르게 우울의 습격을 당하기보다 오히려 이렇게 직면하고 이해하며 한걸음 물러서서 바라볼 수 있는 것이 어쩌면 더 건강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진은 당연히 아름답고 예쁘게 찍어야 한다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내 안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다. 누구나 사진을 쉽게 찍을 수 있게 된 요즘 같은 시대에 SNS나 블로그를 통해 -나를 포함하여- 사람들이 내보이고 싶어 하는 사진은 모두 예쁜 장면들이다. 그런데 현대 예술 사진작가들은 그와는 정반대로 시선을 돌려놓는다. 엄밀히 말해 그들은 실재를 촬영한다기보다, 사진을 통해 인간의 감정을 그리고자 하는 것 같다. 나아가 모두들 쉬쉬하는 경계를 넘어서는 과감하고도 창의적인 도전에 이를 때면 비로소 그 가치가 빛을 발하는, 그런 것이 현대 예술의 매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스스로에 대한 의심의 경계를 넘고 싶다.

타인을 의식하는 시선의 경계를 넘고 싶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의 경계를 넘고 싶다. 


그 너머엔

무엇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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