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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타 Feb 27. 2023

[Reading] 아몬드

알면서도 알지 못하는 척하는 사람들을 이해하는 법

'고통과 공감의 능력을 깨우치게 할 강력한 소설'이라는 한줄평을 보고 집어든 책이었다. 표지 일러스트의 무미건조하고 공허한 표정이 어쩐지 한줄평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제목도 아몬드라고 하니 어떤 내용이 펼쳐질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기대 반, 의심 반으로 한 장, 한 장 읽어 내려가면서 나도 모르게 몰입되었고, 어떤 페이지에 도달하자마자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구나. 하고 한 대 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책을 다 읽고 난 후에도 그 장면만은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생각을 깨웠고, 여전히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지만 확실히 이 책을 읽기 전보다는 마음을 쓰는 일에 행동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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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몬드의 의미

누구나 머릿속에 아몬드를 두 개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귀 뒤쪽에서 머리로 올라가는 깊숙한 어디께, 단단하게 박혀있다. 크기도, 생긴 것도 꼭 아몬드 같다. 복숭아씨를 닮았다고 해서 '아미그달라'라든지 '편도체'라고 부르기도 한다. 외부에서 자극이 오면 아몬드에 빨간 불이 들어온다. 자극의 성질에 따라 당신은 공포를 자각하거나 기분 나쁨을 느끼고, 좋고 싫은 감정을 느끼는 거다. 그런데 내 머릿속의 아몬드는 어딘가가 고장 난 모양이다. 자극이 주어져도 빨간 불이 잘 안 들어온다. 그래서 나는 남들이 왜 웃는지 우는지 잘 모른다. 내겐 기쁨도 슬픔도 사랑도 두려움도 희미하다. 감정이라는 단어도, 공감이라는 말도 내게는 그저 막연한 활자에 불과하다. - 본문 29p


이 책의 주인공인 한 소년은 아몬드가 고장 난(?) 상태로 태어난다. 최근에 방영했던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라는 드라마가 생각났다. 영우의 아빠는 감정을 읽지 못하는 영우에게 사람들의 표정을 통해 감정을 인지할 수 있도록 다양한 표정 사진을 찍어 영우의 방에 붙여두었다. (사진참고) 이 책의 주인공인 윤재의 엄마/할머니도 다양한 상황을 예시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려주고 윤재는 그 모든 과정을 학습하며 배워나간다. 엄마와 할머니가 갑작스러운, 끔찍한 사건을 당하기 전까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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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구도 재단하지 않는 인생을 그냥 산다는 것

삶이 장난을 걸어올 때마다 곤이는 자주 생각했다고 한다. 인생이란, 손을 잡아 주던 엄마가 갑자기 사라지는 것과 같다고. 잡으려 해도 결국 자기는 버림받을 거라고. (중략) "내가 그동안 널 왜 찾아간 줄 알아?" "아니." "두 가지 이유가 있었어. 하나는, 적어도 너는 다른 사람들처럼 날 쉽게 판단하지 않더라고. 네 별난 머리 덕에. (중략)" - 본문 168p​


"나한테 그건 있지, 살아서 뭐 하려고, 하는 질문이랑 비슷해. 넌 무슨 목적이 있어서 사니? 솔직히 그냥 살잖아. 살다가 좋은 일 있으면 웃고 나쁜 일 있으면 울고. 달리기도 마찬가지야. 1등 하면 좋고 아니면 아쉽겠지. 실력 없으면 자책하고 후회도 하겠지. 그래도 그냥 달리는 거야. 그냥! 사는 거처럼, 그냥! -본문 187p


이 책의 주인공인 윤재에게는 곤이라는 친구와 도라라는 친구가 있다. 어려서 엄마 손을 놓친 그 한순간으로 평생의 인생이 뒤바뀌어 버린 곤이. 다시는 엄마를 볼 수 없게 된 곤이. 본인을 지키기 위해 거칠게 살아왔던 인생이, 이제는 화살이 되어 본인에게 돌아올 때, 또다시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굴레에 갇힌 곤이의 인생에 윤재는 의도치 않게 처음으로 곤이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친구가 되어준다.


달리기를 꿈꾸는 도라의 인생에 "달려서 뭐 하려고?" 하는 질문을 던진 윤재. 윤재에게 도라가 "그냥 사는 거처럼. 그냥"이라고 말하며 웃고, 울고, 좋고, 아쉽고, 자책하고, 후회하는 모든 감정들을 그냥의 범주에 묶어 이야기한다. 과연 윤재는 그걸 "그냥" 사는 거라고 받아들였을까? 정의된 모든 감정을 윤재는 머리로 알고 있겠지만 "그냥"처럼 가볍게 받아들이지는 못했을 것 같다. 오히려 가장 어려운 곤이와 같은 아이들을 받아들이는 게 윤재에게는 "그냥"의 범주라는 것이 모순적이면서도 새삼 다르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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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한 페이지로 정리되는,

심박사를 찾아간 어느 날이었다. 텔레비전 화면 속에서 폭격에 두 다리와 한쪽 귀를 잃은 소년이 울고 있다. 지구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전쟁에 관한 뉴스다. 화면을 보고 있는 심 박사의 얼굴은 무표정하다. 내 인기척을 느낀 그가 고개를 돌렸다. 나를 보자 다정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내 시선은 미소 띤 박사의 얼굴 뒤로 떠오른 소년에게 향해 있었다. 나 같은 천치도 안다. 그 아이가 아파하고 있다는 걸. 끔찍하고 불행한 일로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걸. 하지만 묻지 않았다. 왜 웃고 있느냐고. 누군가는 저렇게 아파하고 있는데, 그 모습을 등지고 어떻게 당신은 웃을 수 있느냐고. - 본문 244p

너무 멀리 있는 불행은 내 불행이 아니라고, 엄마는 그렇게 말했었다. (중략) 멀면 먼 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외면하고, 가까우면 가까운 대로 공포와 두려움이 너무 크다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껴도 행동하지 않았고 공감한다면서 쉽게 잊었다. 내가 이해하는 한, 그건 진짜가 아니었다. 그렇게 살고 싶진 않았다. - 본문 245p


이 책에서 윤재를 통해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아마도 이 한 페이지로 요약되는 게 아닐까? 싶었다. 고통과 공감을 깨우치게 할 강력한 소설이라는 한줄평이 절로 떠오르는 장면이었다. 저 장면은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그려졌다. 우리의 일상에 너무 가까운 장면이기 때문이었을까


​​얼마 전 있었던 꽤나 충격적인 사건들도 함께 떠오르면서 여러 생각들이 들기 시작했다. 감정을 학습했다면, 이론적으로는 누군가 고통스러워하는 장면을 뒤로하고 웃을 수는 없는 거 아닌가? 하는 윤재의 질문에 어떻게 답을 할 수 있을까. 저 장면 속의 심박사와 나는 다르다고 과연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도 아몬드의 어딘가가 고장 난 채로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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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는 감정이 더 소중해지는

"친하다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거죠?" "예를 들어, 이렇게 너와 내가 마주 앉아 얘기하는 것. 같이 무언가를 먹기도 하고 생각을 나누는 것. 특별히 돈이 오가지 않는데도 서로를 위해 시간을 쓰는 것. 이런 게 친한 거란다." - 본문 129-130p

언젠가 공을 들여 '愛'를 쓰고 있는 할멈에게 엄마가 물은 적이 있다. "근데 엄마, 그거 무슨 뜻인지 알고나 쓰는 거야?" (중략) "사랑" "그게 뭔데?" 엄마가 짓궂게 물었다. "예쁨의 발견." - 본문 179p


중간중간 끔찍하고 폭력적인 장면들 속에서도 윤재에게 주어지는 심박사/엄마/할머니의 순수한 애정과 사랑이 아스팔트에서 피어난 꽃처럼 유독 더 예쁘게 다가왔다. 왜인지 서울체크인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이옥섭 감독이 누가 너무 미우면 사랑해 버린다고 말하는 장면과 사랑에 관련된 성경 구절들이 떠올랐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 제일은 사랑이라.'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사실은 감정의 인지를 담당하는 아몬드에게 사랑이 배터리 같은 역할을 하는 게 아닐까? 효율을 중시하고 원인과 결과, 사실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바쁜 일상을 보내며. 사랑이라는 감정을 소홀히 하는 텅 빈 마음을 평온으로 여기면서. 그저 무미건조하게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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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교류라는 건 쉽지 않다. 남녀를 떠나, 친구사이에도. 가족끼리도. 감정을 표현하고 교류하는 데는 꽤나 큰 에너지와 노력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년에는 조금 더 노력해보고 싶어졌다.


좋아하면 좋아한다고 마음을 표현하고, 따뜻한 말 한마디를 더 건넬 줄 아는 아몬드가 말랑말랑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준 책이다. ​​


그래서 너무 먼 불행에도 진심 어린 애도를 표하고, 가까운 공포와 두려움에도 용기를 내어 맞설 수 있는 어른으로. 메마르지 않은 마음을 가진 어른으로 살아가고 싶다. '봄이면 식물이 자라듯 감정도 자라고, 감정이 자라면 세상도 자랄 것이다.'라는 소설가 공선옥 님의 표현이 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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