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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알고리즘'이 없어서

한 달간 읽은 책들 소개

by 조정환Juancho

다시 책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독서가'라 불리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하지만 난 책읽기를 꽤 좋아하는 편이다. 평소 가방에 책 한 권씩 넣고 다니기도 하고, 안중근 선생처럼 '하루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을 정도는 아니지만 주기적으로 글을 안 읽으면 불안해진다. 한창 바쁠 때에도 '책 읽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했다.


왜냐면 그때의 일상은 아웃풋으로만 가득 차있었기 때문이다. 날마다 편집/자막/CG 등 결과물을 뽑아내야 하는데 새로운 인풋은 없고, 가지고 있던 아이디어로만 해야 했다. 머릿속이 텅 빈 곳간처럼 헛헛해진 기분이 들었고, 막판에는 약간 '쥐어짜내는' 느낌으로 일을 했다. 독서는 머리에 뭔가를 집어넣는 대표적인 행위 아닌가. 인풋이 필요하다.


좋아하는 음악도 보통 그 뮤지션의 초창기 앨범에 쏠려 있다.


인풋. 이 단어엔 '지식 습득'의 의미도 있겠지만 내가 원하는 인풋은 '나와 다른 생각과 관점'이다. 나는 좀처럼 편협하고 싶지 않다. 태생적으로 그런 욕심이 있다. 포용력을 키우고 싶고 뇌도 좀 말랑말랑하게 살고 싶다. 그런 점에서 독서라든지 친구들과의 대화는 유용한 활동이자 소중한 취미이다.


둘을 묶어서 얘기하긴 했으나,

독서는 '말로 주고받는' 대화와도 전혀 다르다.


비언어적 표현이 섞여있는 대화는 내용만큼이나 감정이 중요하다. 그래서 대화에는 정처가 없다. 말을 하다가도 상대방 기분을 살피느라 주제를 돌리기 일쑤고, 무슨 이유에선지 하려던 말을 까먹기도 한다. 때때로 내용이 전혀 중요하지 않을 때도 있다. 상대방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즐겁기 때문에 대화를 시작한 목적도 까먹는다. 웃거나 울면 그만이다. 무엇보다 대화는 만나지 않으면 성립이 안 된다.


하지만 책이란 건 저자가 쓰고 지우고를 반복하면서 본인이 생각하는 최적의 방식으로 정리해 놓은 형태의 글이기 때문에, 독자는 그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저자의 생각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사실' 어느 정도'가 아니라 꽤나 내밀한 모습까지 엿볼 수가 있다. 심지어 독자로서는 부담도 없다. 며칠에 걸쳐, 커피 한잔 마시고 딴생각하면서, 여러 권을 병렬적으로 보면서도 가능하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독서가 대화보다 더 좋다는 건 전혀 아니다. 각각의 장단점이 있으니까. 어쨌든 난 휴가로 여유가 생긴 만큼 여러 책을 읽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너무 오랜만이다 보니 뭐부터 읽을지 막막했던 것이다.


10년 전만 해도 책을 고르는 데에 어려웠던 기억은 없다.

대학교 수업 때 들은 내용과 관련된 키워드로 찾는다거나, 지금은 사라진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 페이지에 접속해 명사들의 추천 도서를 참고하면 그만이었다. 그마저도 시원치 않으면 오프라인 알라딘 중고서점에 찾아갔다. 그러면 십중팔구 만족스러운 대여 목록이 완성됐다.


하지만 지금은 글쎄. 온라인 오프라인 따질 것 없이 서점 베스트셀러 페이지도 대부분 출간한 지 채 1년이 안 된 신간들 뿐이고 (그마저도 주제들은 거의 '돈 벌기' '힘든 하루를 위로해요' '일 잘하는 방법' '정치인 일대기'다.)

나부터도 검색할 뚜렷한 키워드가 없다.


한편으론 책의 인기가 확연히 떨어졌구나 싶기도 했다.

[소비자에게 책 추천 해주는] 콘텐츠가 좀처럼 없었기 때문이다. 유투브에선 내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추천 영상이 뜬다. 심지어 반응이 없으면 자동으로 재생시킨다! 2025년에 큐레이션 시스템은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진다. 인스타는 물론 음악 스트리밍 사이트도 마찬가지.


하지만 도서 분야에 한해서는 난 비슷한 콘텐츠를 찾지 못했다. 물론 엄연히 존재하는데 내가 모르는 걸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그 자체로도 심각한 상황 아닌가? 뭐 어쨌든, 활자물은 경쟁에서 완전히 밀린 모양새다.


아쉬운 대로 yes24와 디시인사이드 독서 갤러리, 대학교 온라인 커뮤니티, 독서모임 카페 등을 돌아다녔다. [너무 얇거나 두꺼운 책은 피한다] [장르는 적당히 섞는다] [구매하기보다는 되도록 도서관에서 빌린다] 같은 몇 가지 원칙을 두고 탐색했고, 그 결과 25년 1분기 열한 권 정도의 도서 목록이 만들어졌다.


책을 선별하는 과정은 즐거웠다. 하지만 시간이 없거나 나와 같은 불편함을 느낀 분들이 있을지 모르니, 올겨울 읽은 책 목록을 공유한다. 다시 강조하자면 대단한 기준을 가지고 선정한 게 아니다. 오랫동안 궁금했거나 문득 다시 읽고 싶어졌거나, 우연히 알게 된... 등의 다양한 이유로 선정한 것임을 밝혀둔다. (순서는 작가 가나다 순)



고레에다 히로카즈 <작은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나는 '고레에다 영화'가 던지는 불편한 질문이 좋다.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들>을 몇 번 뒤적이고서도 더 읽고 싶어서 골랐다. 그의 팬이라면 どうぞ~


김원영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제목에 매력을 느꼈다가 작가님의 이력을 보고 홀린 듯 빌렸다. 명심하자. 장애인도 그냥 사람일 뿐이다.


김정선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주기적으로 빌려 읽는, 나의 글 선생님이자 길잡이 책. 내용 자체도 재밌다.


마이클 샌델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2012년의 경고를 2025년에 현실로 보았을 때 느끼는 섬뜩함. 돈은 어디까지 통할까. 아직도 모르겠다.


무라카미 하루키 <해변의 카프카 上>

'하루키 소설'은 단편만 읽어왔는데, 장편에 도전해 보려고 골랐다. 그의 얼토당토아니한 상상력이 재밌다. 下권도 빌릴 예정.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몰입의 즐거움>

다 읽고 나니 '이게 뭔 말인겨~' 싶기도 하지만 '역시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 싶기도 하다.


박완서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

박완서 작가님의 냉소적이면서 솔직한, 때때로 지독하게 날카로운 문체를 좋아한다. 그걸 한국적이라고 표현한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미출간 원고가 담겼다길래 선택했다. 읽다 보면 슬프다.


사미르 오카샤 <과학철학>

도서관 서고에 꽂혀있는 걸 우연히 발견했다. '과학'이랑 '철학'이 붙어 한 단어로 써진 것도 의아하고, 항상 실패하지만 과학과는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기에 덜컥 빌렸다. 꽤 재밌다. 그래~ 이과생은 이렇게 생각한다 이거지?


장기하 <상관없는 것 아닌가?>

'장기하 음악'을 에세이로 옮겨 놓은 느낌의 책이다. 한 세 번째 읽는 거 같은데 이번에도 정말 재밌게 읽었다. 피식피식 웃거나 감탄하기도 하면서. 난 이 형님이 왜 이렇게 좋지?


정영택 <방송 연출 기본기>

브런치에서 작가님의 글을 접하고 한참 팔로우하고 있다가 출간 소식에 구매했다. 업계 얘기이기도 하고, 시중에 이런 종류의 도서가 잘 없다. 그래서 응원하는 마음 반 & 공부하는 마음 반으로 읽었다. 내용이 꽤나 자세해서 영상 입문자에게 유용할 것 같다.


토마스 브로니쉬 <자살>

이 책은 '자살학'을 다룬다. 자살자에 대한 역학연구, 자살 원인에 대한 임상연구 기록이 담겨 있다. 요즘 흔히 보이는 '자살을 소재로 한 에세이'는 아니고, 과학이라는 틀로 자살을 요모조모 살펴보는 도서다. 난 흥미롭게 읽었다. 다만 20년 전에 발간된 책이라, 그동안 개정판이 나오지 않은 게 아쉽다. 연구에 진전이 있음을 확인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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