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은 과연 나를 칭찬할 것인가
주인이 먼 길을 떠나며 하인들에게 각기 다른 종류의 달란트를 쥐어 주고 떠났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주인이 돌아와서 보니 한 놈은 수완을 발휘하여 돈을 벌었고, 다른 놈은 일수를 둬서 이자라도 남겼는데, 나머지 한놈은 그냥 땅에 묻어두고 원금 그대로를 바쳤다.
성경에 나오는 오래된 이야기로, 수완을 발휘하여 주인의 돈을 불린 하인들은 많고 적음에 따라 차이는 있었지만 칭찬을 들었으나, 주인의 돈을 묻어 두었다가 고스란히 돌려준 하인은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 하지만 어릴 적 성경학교에서 들은 이 이야기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았다. 돈을 벌지 않았다는 것과 손해를 보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심지어 노력하지 않았다는 것을 등치 시킬 수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만약에 다른 두 하인이 이윤을 남기지 못하고 손해를 봤다면 그래도 주인은 하인들을 칭찬했을까.
이 질문에 그 당시 전도사님은 손해를 보았어도 칭찬을 들었을 것이라 답하셨다. 주인에게는 돈을 벌어서 되돌려 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돈을 벌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칭찬을 들었다는 설명이었다. 더더욱 이해하기 쉽지 않은 대목이 아닐 수 없었다. 돈을 벌려고 하지 않은 것이 꾸중 들을 일인가? 손해를 보지 않았으니 적어도 혼날 일은 아니지 않은가? 왜 하인들은 돈을 벌려고 노력해야만 하는가? 어린 시절의 치기 어린 질문은 끝이 없이 생겨났다.
어떤 이는 자본주의의 맹아가 기독교였음을 증명하는 단서라고도 했다. 일리 있는 말이다. 막스 베버가 일갈한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도 그러한 정황은 확인된다. 분명히 시대적으로 자본주의는 기독교(개신교)와 함께 태어나고 성장했다. 그리고 이들이 시기적으로 맞물릴 수 있었던 이유는 서로가 서로를 지탱해 주는 버티목이자 성장끈이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절대선이어야 이 이야기는 선한 이야기가 된다. 만약 자본주의가 절대적으로 선한 것이 아니라면 이 이야기는 어쩌면 선한 이야기가 아니다.
달란트는 지금에 이르러 탤런트가 된다. 흔히 얘기하는 드라마 배우가 아니라 저마다 지닌 재능을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재능은 자본주의 사회에선 돈을 버는 재주이다. 정리하자면, 주인은 내가 너에게 이러저러한 재능을 주었는데 너는 그 재능을 제대로 쓰지 않고 묵혀두고 있었다고 혼났다는 얘기다. 하인은 주인이 하사한 재능을 살려 돈을 벌어내야만 했다. 마지막 하인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꾸중을 듣고 쫓겨난 것이다.
그런데 나는 나의 달란트(재능)를 돈 버는 방식으로 전환할 줄을 모른다. 내게 어떤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조차 모르겠지만 신은 누구나에게 공평하게 재능을 하사하셨을 것이란 가정 하에 곰곰이 생각해 본다. 돈도 안 되는 이런 글이나 끄적이고 앉아있는 나는 자본주의에 실패한 하인인가? 주인은 과연 나를 칭찬할 것인가.
오호통재라. 내 달란트는 땅 속에 있고, 나는 그저 그걸 지키기 위해 밤새워 분투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