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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나다 이군 Jun 24. 2023

밀란 쿤데라 - 농담


1. 첫인상 - 한 편의 그림과 세 편의 영화를 떠올리다


밀란 쿤데라의 처녀작 '농담'은 내가 책을 읽기 시작한 이래로 완독 하자마자 다시 처음부터 읽기 시작한 유례없는 책이다. 이유라면야 나는 책을 보면서 보통 작가와의 대화를 시도하는데, 이 책은 추천인과의 대화를 시도하느라 작가와의 기회를 놓쳤기 때문이라거나, 퇴근길 지하철에서 짬짬이 읽느라 세세한 느낌과 평가를 내리기에는 충분치 않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리라.


이 책은 지인으로부터 우연히 추천받고 읽게 되었는데, 나는 이 책을 받아 들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읽기 시작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나에게 읽히기를 대기 중인 책들이 여러 권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지만, 실제로는 호흡을 정리하고 접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이 책이 나에게 보내는 시선이 무언가 남달랐다. 마치 맘에 드는 여자친구를 소개받고 전화번호만 매만지는 모습이라면 너무 황당한 비유가 되려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 : 0000년]


아무튼 나는 아직 밀란 쿤데라에 대한 인물정보나 평가를 읽은 바가 없기 때문에 이 글이 완벽하게 내 의견일 수밖에 없다는 단점을 갖게 됨을 영광으로 생각한다. 내가 이렇게 반응하는 데는 밀란 쿤에 대한 선입견이 한 몫했는지도 모른다. 선입견이란 다름 아닌 '반체제 인사'라는 점이다. 그런데 가만 읽다 보니 선입견에 대한 판단을 보류해야 할 것이 이 글을 쓴 시점이 그가 프라하(체코)로 부터 쫓겨나기 전에 쓰여진 글이기 때문에 어쩌면 내가 가져왔던 선입견을 적용하기엔 섣부를 수 있다는 점이다. (역시 그의 다른 글은 읽은 적이 없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체질적으로 나는 반체제 인사를 선호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반체제 인사가 뭐가 문제인가? 질문하신다면 아마도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반체제 인사라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반체제 인사로 명성을 팔아먹는 것이 싫은 것이다. 나는 밀란 쿤데라가 그런 부류라는 근거 없는 선입견을 지니고 있었던가 보다.


(1) 첫인상 하나 : 입체파 소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첫인상을 중심으로 밑그림을 그려보자면, 생뚱맞은 얘기일지 모르겠지만 특히 후반부로 갈수록 내가 언제부터 입체파를 좋아했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 집에 유일하게 걸려 있는 그림도 끌레의 입체파 그림이다. (끌레를 초현실주의 추상화가라고들 하는데 난 잘 모르겠고, 우리 집에 있는 그림은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 입체파 경향을 띠고 있으며, 우리 애들은 이 그림을 보고 자랐다.)


[ Paul Klee. Tempelviertel von Pert, 1928 ]


그런데 웬 입체파 그림? (입체파는 더 공부해서 이해해야겠구) 아무튼 소설도 이렇게 입체파 그림처럼 창조할 수 있구나 하는 머 그런 허접한 생각도 했다는 말씀...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 세 편의 영화와 비교하는 작업을 시도해 본다.


▶ 양파껍질 같이 벗겨지는 기억의 흐름


이 소설은 1인칭 화자 시점으로 씌여졌다. 그런데 그 1인칭이 3인칭이 되기도 한다. 1부 루드빅에서는 루드빅이 화자 자신이지만, 2부 헬레나에서는 헬레나의 정부로서 3인칭으로 등장하고, 4부 야로슬라브에서는 화자인 야로슬라부의 친구 루드빅으로 등장한다. 즉, 총 7부로 구성된 각각의 제목은 그 화자가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표식이다. 그러니까 마지막 7부 루드빅-헬레나-야로슬라브 편에서는 이들 3명의 화자가 각자 자기 챕터를 맡아 진행하니 혹시 혼동하지 마시기를.


그러다 보니 이 소설은 철저하게 작중 화자의 의식에 의존하여 실마리가 하나씩 제공되는 형식을 취한다. 그러다 보니 의식의 변화나 꺼내놓지 않은 얘깃거리나 정보들을 독자가 따라잡아야 한다는 버거움이 있다. 결정적으로 시간의 흐름과 함께 각각의 1인칭 화자들의 사유 속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의식의 전환(소외와 부조리를 겪으면서 깨치는)이 책을 덮는 순간까지 전개되기 때문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영화 메멘토에서 관객에게 일정한 단서를 상황을 유추케 하지만 정작 기억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감춰졌던 비밀이 하나씩 등장하면서 스토리가 반전의 반전으로 끌고 가듯이. 이런 전개과정을 통해 쿤데라는 기억은 완전하지 않고, 잘못된 기억도 망각될 뿐이라고 얘기한다.



▶ 사각(死角)의 지점을 만들어 내는 편집된 기억


이 소설은 마치 쿠엔틴 타란티노의 '저수지의 개들'이나 '펄프픽션'을 연상케 한다. (그 이후엔 유행처럼 사용되었으니 나머진 아류로 보고 언급하지 않겠다.) 그리고 우리나라 영화 '오! 수정'도 얘기하는 바가 기억의 편집과 망각에 있다면 형식적인 면에서는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이러한 장난(?)은 쿠엔틴 타란티노를 위시한 수많은 영화들에서 식상할 정도로 쓰인 기법이다. 예컨대 루드빅이 야로슬라브와 거리에서 먼발치에서 마주치고 모른 척 지나친다. (얄밉게도 쿤데라는 괄호 안에 이 부분을 처리함으로써 대수롭지 않은 설명처럼 위장시켰다) 야로슬라브가 누군지도 모르던 독자는 루드빅의 의식을 따라가는 중이었으므로 야로슬라브가 나를(루드빅을) 못 보았을 것이라 여기고 가던 길을 가게 된다.(아니면 아예 그 이벤트에 대해 관심이 없거나) 하지만 야로슬라브가 화자인 시점에서 우리는 알게 된다. 야로슬라브가 누구이고 그를 외면하는 루드빅 때문에 고민한다는 것을. 자! 이 대목이 은행을 털고 도망치는 각각의 은행털이범들의 시각으로 동일 시공간을 다룬 저수지의 개들이나, 다른 주체의 시각으로 술집에서 교차되어 편집되는 펄프픽션 등의 영화와의 유사성이 발견되지 않는가?



이뿐만이 아니라 야로슬라브의 결혼식이 루드빅과 야로슬라브의 기억에 의해 다르게 편집되고(오! 수정), 강가의 들판에서 루드빅과 야로슬라브가 만나는 장면과 대화내용이 각각의 시각으로 다시 재연되고, <왕들의 기마행렬>은 정말 다양한 사람들의 관점에서 들여다 보이는 메타 오브젝트(?)이며, 어떤 독일 병사가 강간하려는 둥근 전구의 방과 루드빅이 루치에 와의 사랑을 갈망하며 모험을 감수했던 둥근 전구의 방, 루드빅과 헬레나가 처음 만나는 장면 등 너무나도 다양한 장면이 여러 화자의 관점에서 재구성, 재편집되고 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즉 단면에서 확인할 수 없는 이면의 모습으로 하나의 대상 자체를 진실(?)되게 구성한다는 측면에서 나는 감히 입체파와 연결시켜 보았던 것이다. 마치 정육면체의 주사위를 한쪽 면씩 펼쳐놓는 것처럼, 그리하여 마지막에 여섯 면을 살펴보면서 1부터 6까지 표시되어 있음을 확인하듯이. 코스트카의 사례를 보자.「내 적들은 내가 고통에 시달리리라고 생각했겠지만 나는 예기치 않았던 무심함을 느꼈다. 그들은 내가 자유를 제한받았다고 느끼리라 생각했으나, 내가 나를 위해 진짜 자유를 발견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302p)」왜 그랬을까? 우리는 이 대목에서 주어진 정보를 활용하여 대단히 심오한 상징과 이미지를 유추하려고 애쓰게 된다. 하지만 이런 장치는 쿤데라의 부비트랩에 불과할 뿐이다. 이 덫에 걸리게 되면 책을 나처럼 읽게 된다. 코스트카는 이 순간 마치 신의 계시가 있었다고 말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여섯 살 많은 아내와 자식에 대한 도피 명분일 뿐이라는 것을 뒤에 가서 알게 된다. 루치에가 모라비아로 온 이유에 대해 코스트카가 받아들이고 독자에게 얘기하는 이유와 루드빅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이유가 다른 것도 같이 해석할 수 있다. 이런 유형의 장치들이 시작부터 거미줄처럼 처져 있는 것이 이 소설의 한 가지 특징이다.


이러한 구성은 브레히트가 주장하는 반(反)아리스토텔레스적 연극이론, 즉 소격이론의 예와 같이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주관적인 의식의 흐르을 따라가면서 객관화시틸 수 있다면 그것도 대단한 결과일 것 같다)


(2) 또 다른 첫인상 : 실존


그런데 단 한 편의 글이지만 이 책을 읽고 보니 아마도 쿤데라는 카프카류의 실존주의에 천착해 있지 않나 싶다. (내가 카프카와 실존주의를 알고, 그리고 농담을 제대로 읽었다면...) 실존주의는 도스토옙스키 이래로 내 사유의 한쪽 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한 편으론 반갑기도 했고, 또 한 편으론 우울하기도 했다.(난 실존주의에 찬양하지는 않지만 떠날 수도 없다) 너무 앞서가는 감도 있지만 소설 마지막 부분에서 루드빅은 젊은 인드라의 바리케이트를 뚫고 헬레나에게 갔어야 했을까 아님 돌아선 것이 잘한 일일까? 쿤데라의 의중과는 상관없이 내 생각엔 어떤 선택이더라도 다르지 않다는 결론일 것 같다. 결과가 다를지는 몰라도, 그 선택에는 상관없다는 의미.... 아마 쿤데라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나 싶은데 이런 면에서 그를 실존의 범위에 포함시킬 수 있지 않나 여겨진다. 뒤에서 다시 얘기해 보도록 하자.


▶ 선악의 기준 - 도스토옙스키


실존주의라고 했다. 실존주의의 원류를 찾기란 까다로운 문제지만, 대체로 도스토옙스키로 모아진다고 알고 있다. 가장 강력한 메시지는「이 지상에서 하느님께 속한 모든 것은 동시에 악마에게도 속할 수 있다.(324p)」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 말은 마치 도스토옙스키의 '악령'에서 스따브로긴이 던지던 화두 "모든 것은 허용된다"는 메시지의 핵심에 맥을 맞추고 있어 보인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등장하는 아브락사스 또한 이 틀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데미안이 카인과 아벨에 대해 싱클레어에게 던지던 말속에는 모두 이러한 선과 악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군대시절 내가 그린 도스토옙스키 그림]


본문에서 예를 들어 보자. 여기 선하고자 행한 행위의 결과(목표)와 악하고자 행한 행위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을까? 루드빅과 코스트카 두 사람은 각각 악의에 의해서, 그리고 한 사람은 선의에 의해서 누군가(헬레나와 루치에)와 단 한 번의 섹스를 치른다. 그런 뒤 두 사람은 똑같이 그 여자에게서 등을 돌리고 그 세계를 벗어나려 한다. 그 결과는? 그렇다. 둘 다 자신의 세계가 깨어지는 아픔을 겪게 된다. 의도와 목표와 방향, 그리고 결과가 다르다 하여도 그 행위의 공통점은 파괴된 세계와 가치일 뿐이다.


또한 세계 내 존재로서의 개인의 행위를 피력하기도 한다. 카프카처럼. 쿤데라는 한 개인의 어떠한 행위는 그의 의도나 의지와는 상관없이 소속된 상황 내에서 다른 의미를 지닐 수 있다고 줄기차게 얘기한다.「어떤 사람이 미친 듯이 등불을 흔들어대며 해변가를 어슬렁거리고 있다면 그는 미친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러나 밤에, 길 잃은 배가 거친 파도에 휩싸여 헤맬 때, 이 사람은 구원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지구는 천상과 지옥 사이의 경계에 있다. 그 어떤 행위도 그 자체로서 좋거나 나쁘지 않다. 오로지 어떤 행위가 어떤 질서 속에 놓여 있느냐 하는 것만이 그 행위를 좋게도 만들고 나쁘게도 만든다.(325p)」


▶ 까뮈의 이방인 느낌


「나는 너무도 그를 두들겨 패주고 싶은 욕망에 불타올라 정말로 내가 그를 때려눕히고 있는 모습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기사들은 우리 주위에서 계속 무어라 외쳐대고, 브로조바 양은 뭐라고 하는지 계속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고, 태양은 찬란하게 금빛으로 빛나고, 그리고 나는 핏발 선 눈길로 그의 얼굴 위로 흘러내리는 피를 바라보고 있었다.(382p-383p)」 이 장면에서 왜 이방인의 뫼르소가 떠오르고, 한 순간에 뒤집혀진 세상과 마주 서는 출연진들의 모습에서 어느 날 아침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 잠자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일까. 모를 일이다.


그런 면에선 이런 대목도 만만치 않다. 자신의 복수를 위해 아무 죄 없이 이용당한 한 여인이 죽어가는(그렇다고 판단하던) 상황에서 이 얼마나 부조리한 상황이란 말인가.「 ...... 토끼장 하나가 틀어박혀 있었다. 너무 무성하게 웃자란 풀들로 온통 뒤덮인 정원이 마당 너머로 이어져 있고, 거기에는 과일나무도 심어져 있었다.(그 와중에도, 내 머릿속 저 먼 어느 구석에선가 이곳의 아름다움을 하나하나 새기고 있었다. 초록빛 나뭇잎 사이에 걸린 푸른 하늘의 자락들, 울퉁불퉁하고 둘로 갈라진 나무 등걸, 그리고 그 사이에 핀 해바라기들의 환한 빛). (406P)」쿤데라는 군데군데 이런 상황, 장면들을 배치함으로써 부조리함에 대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2. 세계 內 존재에 대한 담론


(1) 세계 : 시대와 역사


▶ 시대정신 그리고 운명


'농담'에서 제일 먼저 목도하는 대목은 시대정신이다. 이 책에서는 시대정신, 세대정신 또는 역사의식 등이 혼재되어 사용되고 있다. 나로서는 이들 단어의 쓰임새가 크게 다른 의미를 지니면서 나이 변별력을 발휘하길 바라는 단어들인지 도저히 분간해 낼 수 없어 보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그냥 시대정신으로 대변한다. 쿤데라가 던지는 첫 번째 화두는 시대정신이다. (물론 첫 번째의 순서는 내가 정한 것이다. 보다 정확히 기술하자면 가장 부피가 큰 담론이라고나 할까?) 자신이 속했다고 믿는 세계로부터 추방의 위기에 처한 루드빅의 사유를 통해 시대정신에 대한 첫 번째 화두를 던진다. 루드빅의 세대가 지닌 시대정신은 이런 것이었다.「무엇보다 나를 매혹시키고 심지어 홀리기까지 했던 것은 내 시대의 (또는 그렇다고 믿었던) 역사의 수레바퀴였다. 그 당시 우리는 정말로 사람이나 사물의 운명을 실제로 결정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역사에 매혹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역사라는 말 위에 올라탔다는 데 취했고, 우리 엉덩이 밑에 말의 몸을 느꼈다는 데 취해 있었다...... 동시에 아름다운 환상이 있었다. 사람이(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이제 역사의 바깥에 머물러 있거나 역사의 발굽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사를 이끌어나가고 만들어나가는 그런 시대를 우리, 바로 우리가 여는 것이라는 그런 환상이 있었다.(106P-107P)」


그런데 루드빅이 전하는 시대정신은 어쩐지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참가하는 시대정신이라기보다는 맹목적이고 피동적인 인상을 준다. 「내가 결코 당의 내부와 일체가 되어 섞인 적이 없다거나,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혁명가였던 적이 한 번도 없었으며, 단지 단순한 결정에 따라 <혁명가들에게 다가간> 것이라는 사실 등을 말이다(혁명에 참여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말하자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본질의 문제로 느껴졌다. 혁명가다 하면 혁명 운동과 일체가 되는 것이며, 또 하나는 혁명가가 아닌 경우로 다만 혁명가이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끊임없이 자신이 혁명과 일체가 아니라는 사실에 죄의식을 느낀다.(000p)」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쿤데라에게 있어서 시대정신은 그 시대를 따라가는 세대에게 있어서는 거스를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것이고, (뒤에도 언급되겠지만) 홍역과 같은 것이어서 이에 빠져드는 젊은 이성에 대해서도 격한 감정을 표출한다. 이렇듯 쿤데라는 큰 틀에서 시대정신과 개인, 역사와 개인이라는 화두를 꺼내는 데, 내가 이해하는 바가 적절하다면 어쩌면 이는 카프카의 세계 개념과 유사할 것이다.


[ 프란츠 카프카 1883 - 1924 ]


▶ 시대(세대) 정신의 변화


루드빅에게 있어서 시대정신 혹은 역사의식은 의무 혹은 운명처럼 받아들여졌지만, 쿤데라가 주의 깊게 바라본 시선은 바로 이러한 시대정신 혹은 세대정신 또는 역사의식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한다는 사실이다. 루드빅이 <왕들의 기마행렬> 축제에서 우연히(?) 만난 제마넥과의 대화는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또 다른 맹목이 예전 것을 대신하는 것이겠지" "나는 그렇게 보지 않아. 나는 그들이 우리와 다르기 때문에 바로 그래서 그들을 높이 사. 그들은 자신의 육체를 사랑하지. 우리는 무시했잖아. 그들은 여행을 좋아해. 우리는 한 곳에 처박혀 있었는데. 그들은 모험을 좋아하지. 우리는 회의하느라 시간을 다 보내고 말았는데 말이야. 그들은 재즈를 좋아해. 우리는 부질없이 민속 음악이나 흉내 냈었고. 그들은 자신들의 문제에 골몰해 있지. 우리는 세상을 구원하고자 했고. 우리는 우리의 메시아주의를 가지고 세상을 망가뜨릴 뻔했지. 이제 그들이, 그들의 이기주의를 가지고 이 세상을 구하게 될지도 몰라"(376p)」


시대는 이미 변화했고, 이전 세대는 그냥 이전 세대일 뿐이다. 그리고 그 안에 선과 악도, 애정도 증오도 구분되지 않는다. 루드빅은 이러한 지조 없이 변하는 시대정신의 한가운데서 푸념을 늘어놓는다.「어떤 세대 정신(이 떼거리의 교만)에의 굴종은 나는 정말 질색이다...... 그녀는 새침한 어조로 자신은 독단론자도, 수정주의자도, 분파주의자도, 일탈주의자도 아니라고, 이 모든 것은 우리가 고안해 낸 것이고 우리에게 속하는 말들이지 자신들에게는 낯선 말들에 불과하다고 대답했다.(375p)」


그러면서 루드빅은 시대에 부응했던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기에 이른다.「오늘날 자신들이 신봉하던 시대의 움직임에 의해 나처럼 거부당하고 떠밀려나간 사람들이 자기 운명을 떠벌리는 것을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 추방된 자라는 내 운명을 나 역시 영웅화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된 자만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내가 검정 표지 곳에 보내지게 된 것이, 내가 용감했기 때문도 아니고, 투쟁을 했기 때문도 아니며, 내 생각들과 다른 생각들에 대항하여 싸웠기 때문도 아니라는 것을 냉정하게 상기해야만 했다. 그렇다. 나의 전락에는 그 어떤 진짜 드라마도 선행하지 않았고, 나는 내 이야기의 주체라기보다는 차라리 대상에 가까웠으며, 그러므로(괴로움, 깊은 슬픔, 실패 등에 가치를 두지 않는다면) 내 이야기를 가지고 무언가 대단한 척 내세울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173P)」


이제 남은 것은 변화하는 세계 내에서 개인에게 떨어지는 괴리(감) 뿐이다. 여기서 한 가지 넘어서야 할 얘기가 있다면, 루드빅은 개인의 부당함(부조리)는 역사의 이성으로 봤을 때 용인될 수 없다고 했다. 만일 그것이 용인된다면 역사가 부당하다는 얘기가 되는데, 그러면 개인은 어디 가서 하소연할 데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이다, 부당해서는 안 되는 세계가 변해버리면 그 온전한(것으로 믿었던) 세계로 부터 추방당한 개인은 어떻게 되는 거지? 이런 걸 가중처벌이라고 하는 건가?


(2) 자신의 세계로부터의 추방


▶ 소외


시대정신 혹은 역사, 혹은 세계와의 대면 다음으로 드러나는 화두는 소외인 것 같다. 의도되었건 그렇지 않건 간에 인간 개인이 행한 행위로부터의 소외. 쿤데라는 많은 부분에서 이를 직시하고 있으며, 이 역시 내가 이해하는 바가 맞다면, 사르트르의 소외와 맞닿아 있을 것이다. 쿤데라는 이 소설에서 다양한 양태의 소외를 버라이어티 하게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보자. 마르케타와의 사랑에 대해「사랑이라고 하는 것의 심리적, 생리적 구조란 너무도 복잡한 것이기 때문에 삶의 어느 시기에 있어서 젊은이는 그것을 통제하는 데에만 거의 온 신경을 집중해야 하는 때가 있고, 그래서 그런 젊은이에게 사랑의 대상 자체, 즉 사랑하는 여인은 증발해 버리고 만다(P49)」라고 말하기도 하고,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환경(상황)과의 불일치(부조화)에 대해서는「이 이미지(아무리 나와 비슷하지 않다 해도)는 나 자신보다 비교할 수도 없이 더 실제적이며, 그것은 결코 나의 그림자가 아니라, 나, 바로 나 자신이 내 이미지의 그림자였다. 왜 나를 닮지 않았냐고 그 이미지를 탓한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며, 이미지와 다른 것은 내 잘못이었다(P77)」라고도 얘기하며, 이에 대해서는「나는 그렇게 해서 결국은 나의 저항이 헛된 것이며, 내가 다르다는 것이 보이지 않으므로 이제 오로지 나에게만 파악될 수 있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P78)」며 항복을 선언한다.(물론 소설의 초입에서까지는 그렇다)


또한, 소설에서 묘사되는 배경, 거리, 집들, 풍경, 동상, 조각들 역시 모두 낯설고 어울리지 않고 어색하다. 심지어 이들은 도시와 도시 간에도 어떤 연대감을 가지고 이어진다는 느낌을 부여한다. 여기에 쿤데라는 말한다.「 ..... 전혀 어울리지 않았는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거기가 그 집이 있어야 할 제자리라는 생각이 들었다.(000p)」나는 이런 것들도 모두 소외의 범주에 포함시키면서 보았다. 고등학교 시절 사회선생님(이북주 선생님)께 소외의 개념을 이렇게 배웠다. "전철을 탔는데 사람이 너무 많다. 그럴 때면 우리는 이렇게 얘기한다. 콱 전쟁이나 나서 이 인간들의 절반은 죽어도 될텐데..." 나는 이게 바로 소외의 개념이라고 배웠다. 의미는 알아서 받아들이시기를.... (힌트, 죽어도 될 절반의 인간들 속에는 나도 포함된다)


▶ 부당함에 대하여


루드빅은 이러한 현상으로 발생한 결과들에 대해 부당하다고 얘기한다. 본래 행위에서 이반된(소외된) 결과는 특정 개인에게 있어서 부당함이라는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른다. 루드빅이 천착하고 있는 이 부당함에 대해 코스트카는 이렇게 얘기한다.「만일 인간사에서 그 너머에 아무것도 없다면, 어떤 행위들이 그 행위자가 부여한 의미 외에 다른 영향력을 갖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부당함이란 개념은 합당한 것일 수 있을 테고, 또 나도 그렇게 열심히 일한 국영 농장에서 쫓겨났으니 그 말을 사용할 자격이 있지요...... 하지만 어떤 사건은 그 사건을 만든 장님들의 생각 속에서와는 다른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게 마련이지요.(329p)」


어떤 행위는 내가 부여한 의미 만을 내포한다면, 그로써 파생된 부당하다고 판단되는 일련의 결과들은 부당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지만, 일단 나로부터 외화(外化)된 행위는 내가 부여한 의미 외에 다른 영향력을 지니게 된다. 이렇게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로부터 이반된 행위는 개인의 범주를 넘어서 시대정신과 같은 거대한 틀(담론)에 의해 좌지우지되기도 한다. 따라서 행위자는 미리 이러한 사실을 인지하고 행동하여야 하며, 행위가 외화 된다는 사실, 그리고 그 결과가 나에게 부메랑이 되어 구속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모쪼록 그렇기 때문에 루드빅의 자신의 농담(아마도 우리 식으로는 '장난'이라고 번역하는 게 더 가까울 지도 모르겠다만) 행위의 결과에 대해 부당함을 주장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얘기다.


▶ 나에게 있어서 루치에 - 루드빅의 반추


소외라는 것이 거대한 대상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루드빅은 자신의 의식과 특권의 세계가 한순간에 자신의 것이 아니게 되고 오히려 그 적으로 몰리는 상황을 겪게 된다. 이때 이 좌절과 혼돈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매개체는 곧 루치에에 대한 몰입으로부터 비롯된다. 개인적으로 이 대목은 마치 베르길리우스를 연옥과 천국으로 인도하는 뻬아뜨리체, 싱클레어를 이끄는 뻬아뜨리체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아무튼 루드빅이 한 시대의 매듭을 맺어버리게 되는 과정에서 또한 그 보다 더 중요하게는 나중에 그의 세계를 완벽하게 무너뜨리는 계기가 되어 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이 의식의 과정은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 지금 나는 갑자기, 존재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완전히 새롭고 예상치도 못했던 그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 내 앞에는 이제 전속력으로 비상하는 역사의 날개 아래 가리워져 있던 초원이 펼쳐지고 있었다. 잊혀져 있던 일상이라는 초원, 소박하고 가난한, 그러나 충분히 사랑할 만한 한 여인, 루치에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곳...... 그녀는 역사 라애에서 살고 있었다...... 한순간 전만 해도 그렇게 두렵게 보였던 그 발걸음, <역사의 바깥으로> 나를 이끌었던 발걸음이 갑자기 내게 안도와 행복의 발걸음이 되어 있었다.(107P)」


하지만 쿤데라는 루치에와 루드빅의 사랑 문제에도 이러한 소외의 장치들을 뼈아프게 설치하여 놓는다.「나는 루치에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가 실제로 누구인지, 그녀 자체로서 그리고 자신에 대하여 어떤 사람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그녀의 존재를 오로지(청년기의 자아중심주의에 빠져 있었던 탓에) 나에게로(나의 고독, 나의 예속, 애정과 사랑에 대한 나의 욕구로) 곧바로 향해 있는 측면에서만 받아들였다. 그녀는 나에게 있어서 내가 체험한 상황의 기능에 불과했다. 내 삶의 이 구체적인 상황을 벗어나는 모든 것, 그 자체로서의 그녀의 모습은 모두 간과되었던 것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그녀는 나에게 있어서(그리고 나는 <나에게 있어서>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결코 그녀를 생각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 모르는 사람이었다.(343p)」


▶ 야로슬라브의 세계와 가족으로부터의 소외


그런데 소외 혹은 소격 현상을 겪는 것은 루드빅 만이 아니다. 그의 오랜 친구 야로슬라브도 다른 세계, 다른 상황에서 다른 이유로 그것을 경험한다. 그이 꿈에 나오는 대사는 후에 야로슬라브가 겪게 되는 모든 변화를 한 대목에 예고하고 있는 대목이다. 결국 그는 그에 대한 가족의 배신으로 집에 있는 부엌 집기들을 모두 때려 부수고 집을 나서게 되니 말이다.「아니, 그보다 더 나빠. 나를 겨냥한 무슨 일이 꾸며지고 있어. 주위 사람들을 알아보질 못하겠어. 집에 돌아가면 방도 다른 방이고 아내도 다른 여자고 모든 게 달라. 내가 착각을 했나 보다 하고 밖으로 나가서 보면 정말 내 집이란 말이야! 밖에서는 내 집인데 안에서는 처음 보는 낯선 곳이야. 어디를 가나 이런 식이지. 여보게들, 두려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어(178P)」


야로슬라브와 아들 블라디미르의 관계는 일단 과거와 현대를 대변한다. 야로슬라브가 몰락하는 과거의 왕이었다면, 블라디미르는 아버지의 세계와 그로 인한 특권보다는 오토바이와 기타를 더 좋아하는 현대의 왕이다.(물론 그가 거부하지만) 야로슬라브는 자신이 그래 왔던 것처럼 남들도(특히, 가족-블라디미르) 지나간 세대와 문화에 대한 존경과 경의를 가져주길 바란다. 그 역시 아버지의 재미없는 000이 있었지만 그것이 중요한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아들 블라디미르는 좀 다르다. 어떻게든 이해시키고 설득하여 같은 세계를 바라보고 싶은데 잘되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의 세계를 믿듯이 아들 역시 자신을 믿고 따라 줄 것을 막연히 믿는다.


야로슬라브는 아내 블라스타에게 조차 망상가라는 조소를 받을 정도로 두 개의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 현실의 세계와 민속 음악의 세계. 이를 씨실로 하여 야로슬라브와 가족과의 갈등은 기본적으로 현대적인 것과 과거중심적인 가치관의 충돌로 이해할 수 있다.(416p) 그런데 가장 가까운 존재들로부터의 속임수와 배신으로 이런 막연한 믿음이 깨어지자 야로슬라브는 절망한다.「내 아들, 가장 가까운 존재. 그 애가 내 앞에 있는데, 나는 정말 그 애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다. 그것도 모르면서 대체 내가 무엇을 안다는 말인가? 그것도 확신하지 못하면서 내가 이 세상에서 대체 무엇을 확신한단 말인가?(377p)」고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다가 결국「이해도 못하겠고 나를 기만하기만 하는 이 물질의 세계에 더 이상 머물고 싶지가 않다.(379p)」고 자포자기하기에 이른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이렇게 독백하고 있다.「나는 언제나 두 개의 세계를 동시에 살았다. 나는 그 두 세계 사이의 조화를 믿었다. 그것은 헛된 미망이었다. 지금 나는 그중 하나의 세계로부터 추방당한 것이었다. 현실의 세계로부터. 내게 남은 것은 다른 하나의 세계, 상상의 세계뿐이었다.(419p)」


▶ 코스트카의 세계(위대한 일)와 믿음으로부터의 소외


코스트카의 세계 또한 흥미롭니다. 신을 포기하지 않은 공산주의자라고나 할까? 코스트카는 작은 농담거리 하나로 인해 자신의 세계로부터 부당한 처분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루드빅의 하소연에 대해 칼뱅의 추종자들을 얘를 들면서 이렇게 얘기한다.「단순히 세계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어떤 위대한 운동 앞에서도 조소와 우롱이 용납될 수는 없다는 것뿐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것을 부식시켜 버리는 녹이기 때문이지요.(332p)」위대한 운동이란「나는 이 땅 위의 위대한 일들은 오로지 보다 높은 대의를 위해서 겸허하게 자신의 삶을 바치는 한량없이 헌신적인 개인들의 공동체에 의해서만 창조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333p)」고.


코스트카의 세계는 뒤에 교회비판이란 측면에서 좀 더 다루겠다. 하지만 신에 대한 순수한 열정 혹은 도착적인 믿음의 세계에 존재하던 코스트카는 류치에를 통해 자신의 세계에 대한 허구를 발견하게 되는데, 자신의 이해가 신의 부름을 가장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가장한 것이었다는 고해성사가 그것이다. 이는 루드빅과는 반대의 양태를 보인다.


(3) 내용이 거세된 이미지


▶ 설마 시뮬라시옹?


어떤 대상에 대한 이미지와 물자체(이러한 칸트의 철학적 표현이 적절할지 모르겠지만)의 실체(?)를 확인하게 되면서, 즉 본질을 깨닫게 되면서 혼돈이 오고, 부조리함을 깨닫고 거대한 세계와의 싸움에 대해 당황스러워지고...... 이러한 플롯은 영락없는 <매트릭스>인데 말이다. 이 소설에서도 나에 의해서 지금까지 소외라고 언급된 여러 가지 내용물들이 거의 예외 없이 이러한 전철을 밟고 있다면, 이는 분명히 내재된 공통분모가 있다는 것이라고 보는데 무리가 아니다. 그것이 무엇일까를 오래 생각할 필요는 없다. 바로 워쇼스키 형제의 영화 지침서가 바로 '시뮬라시옹'었기 때문이다.

* 시뮬라시옹 알아보기 [GO]


[영화 매트릭스 포스터 - 내가 이 영화에서 '유레카'를 외친 장면]


▶ 이미지의 왜곡 - 대자적 자아의 시작


루드빅은 당원직을 박탈당함은 물론 학교에서도 쫓겨나고, 결국 정치범들이 수용되는 (무기가 지급되지 않는 대신 탄광노동을 해야 하는) 군대에 편입된다. 이 과정에서 루드빅은 서서히 자신과 자신을 바라보는 대자적인 시야가 열리기 시작한다. 그 시작은 이렇다.「이 이미지(아무리 나와 비슷하지 않다 해도)는 나 자신보다 비교할 수도 없이 더 실제적이며, 그것은 결코 나의 그림자가 아니라, 나, 바로 나 자신이 내 이미지의 그림자였다. 왜 나를 닮지 않았냐고 그 이미지를 탓한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며, 이미지와 다른 것은 내 잘못이었다.(77P)」


이 장면은 루드빅이 자신이 알고 있고 또 그렇다고 믿고 있는 자기 자신이 세계 내에서 어떻게 다른 이미지로 보여지는 지를 알아가는 과정이다. 서서히 자신과 세계의 괴리와 거리를 느끼고 깨닫게 되는 그리하여 서서히 즉자적인 존재에서 대자적인 존재로 변화하는 과정에 놓아는 것이다. 물론 루드빅은 이러한 현실을 받아 들기에 이른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나는 그렇게 해서 결국은 나의 저항이 헛된 것이며, 내가 다르다는 것이 다른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음으로 이제 오로지 나에게만 파악될 수 있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78P)


이런 루드빅은 타인의 행위에서도 그 피상적인 이미지의 껍데기를 벗겨내려는 생활태도를 보인다. 식사 중에 자신은 소박한 식당에서의 소박한 음식을 좋아하다는 헬레나와의 대화 중에「누가 자기는 무어가 좋고 무어가 싫다는 등의 이야기를 내게 털어놓으면 그것을 절대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거나,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사람이 드러내고 싶어 하는 이미지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할 정도이다.(257P)」라고 루드빅이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 이미지의 왜곡 - 내용상실이 가져다주는 기회


그런데 이것이 시뮬라시옹과의 차이라면 차이라고 할 수 있는 점은 쿤데라에게 있어서 이미지의 왜곡은 내용상실에서 비롯된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야로슬라브의 민속에 대한 이해를 묘사하는 대목에서 이렇게 표현하기 때문이다.「그것이 전하고자 하는 내용이 이미 오래전부터 상실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 자체에, 그 모습과 형태에 우리의 주의를 집중시킴으로써 그 몸짓과 색깔들 그리고 대사들이 더욱 두드러지게 부각되기 때문에 그렇게 아름다운 것인지도 모른다.(359p-360p)」


또 한 편으로는 기대하지 않았던 <왕들의 기마행렬>에 황홀하게 도취된 자신에게서「그 내부에서 바라보았기 때문에 아무것도 보지 못했던 셈이었다.(362p)」고 진단한다. 쿤데라는 바라보는 위치에 다라서도 그 내용과 이미지를 다르게 판단한다고 얘기하는 것 같다. 물론 초라하게 변해버린 그의 시대 그리고 상실된 그 시대의 가치들을 밖에서 바라보게 됨으로써 갖게 된 자각이긴 하지만.


그리고 하나가 더 있다. 앞서 언급한 식당에서의 대화 끝에 루드빅은 헬레나의 시대 그리고 자신의 시대에 대한 이미지를 보았고, 그 이미지는 곧바로 그녀가 자신의 시간들에 대한 증오의 대상임을 각인시켜 주는 매체로 작용한다.「...... 덮어놓고 경멸했던 그 시절에 한창 꽃 피웠던 그런 어떤 의식적인 취향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그런 태도에서 나는 내 젊은 시절을 보았고, 헬레나에게서 무엇보다도 제마넥의 부인을 보았다(258p)」


이렇듯 이 책에서 이미지는 다양한 방식으로 언급되곤 하는데, 헬레나가 루드빅에게 던지는 말을 들으며, 헬레나는 자신이 그린 이미지를 그대로 루드빅에게 투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 루드빅은 조소한다.「인간은 믿기 힘들 만큼 그렇게 자기의 이상형대로 현실의 모양을 바꾸어버릴 수 있다는 데 대해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지만.....(258P)」자신이 투영한 이미지의 껍질이 벗겨졌을 때, 즉 헬레나에게 루드빅이 거짓임을 밝히고 떠날 때, 야로슬라브의 세계가 현실에서 처참하게 깨어질 때 등등이 될 것이다. 이때 야로슬라브는 절규한다.「 ...... 그 이미지가 현실로 변하자 그 친밀함이 모두 사라져 버리고 만 것이다.(376p)」야로슬라브의 경우는 아래에서 좀 더 살펴보자.


▶ 자신이 만든 이미지 세계에서의 은둔


자 그럼, 이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 야로슬라브가 보여주는 또 다른 유형의 양상을 살펴보자. 루드빅이 대자적 존재(라고 일차적으로 판단한 존재)로서 증오와 복수라는 방편으로 세계와의 싸움을 거는 캐릭터라면, 그의 가장 절친한 친구 야로슬라브는 자신의 상상 속에서 두 개의 세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이들의 조화를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야로슬라브의 가장 큰 문제는 세계가 변화하면 할수록 더더욱 자신의 세계 속으로 매몰되며 고집을 부렸다는 점이다. 결국 아내와 아들의 배신을 알아채고서는 존재의 의미 자체를 잃어버리고 마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것은 어떤 이미지다...... 블라스타는 이런 나를 몽상가라고 나무란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있는 그대로를 보는데, 다만 눈에 보이는 것 말고도 다른 것들까지 보는 것이다. 이미지는 그저 괜히 존재하지 않는다. 집이 보금자리가 되는 것도 이미지에 의해서이다.(206P)」


이런 면에서 야로슬라브의 경우, <왕들의 기마행렬>에서 블라디미르의 대역을 통해, 그리고 아내 블라스타와의 다툼이 일어나는 그 시점에서 비로소 세계의 변화와 맞닥뜨린 것이라 할 수 있다. 야로슬라브는 스스로 만들어 놓은 현실과 동떨어진 이미지의 세계를 인정했을 뿐, 대자적인 인생을 산 것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야로슬라브는 블라스타와의 결혼식을 회상하면서도 예의 망상가적 기질을 드러내고 있다.「세상에, 어떻게 하여 이 조그만 화관의 기억이 우리의 최초의 포옹보다, 블라스타의 진짜 혈흔보다 더 내 마음을 흔들어 놓는 것일까?(213P)」


물론 이 소설에서 (쿤데라가 그 내면을 보여주고자 하는) 모든 주요 인물들은 얘기를 풀어가는 초반에 각자의 상황에서 어떤 계기를 통해 세계의 존재를 깨닫는 대오각성한 인물들로 시작하는 것 같지만 궁극에는 이들이 충돌하는 세계는 이들을 철저하게 짓밟아버림으로써 제대로 된 존재의 모습(너무도 가벼울까?)을 비로소 깨닫게 하는 반전의 부비트랩을 거친다. (한 번의 계기를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지향점을 제시했다고 생각하며 글을 읽게 되는 독자에게는 반전일 수 있다. 나처럼)


반면에 코스트카의 경우는 신(神)의 범주 안에서 용서와 화해의 방편으로 세계와의 화해를 주장하는 캐릭터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세계도 결국은 부정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이러한 나의 해석은 정말 맞는 건지 모르겠다)


▶ 상징과 패러디


이 대목에서 한 가지 더 알고 넘어가자.「개인적인 이야기들, 그런 일들은 그저 일어나고 지나가는 데 그치지 않고 무슨 말인가를 하고 있기도 한 것일까?(233P)」루드빅은「내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그 자체 이상의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어떤 것을 <상징>하고 있다는 묘한 믿음이(233P)」있다고 고백한다. 쿤데라는 그리 장황하게 묘사하는 필체를 보이진 않지만 그가 묘사하는 하나하나의 대상에는 무엇인가 의미를 상징적으로 담아내려고 하는 듯한 기풍이 보인다. 예를 들면 광장에 서있는 천사의 조형물, 처음과 끝에 나오는 투구모양의 건물, 기타 도시의 풍경들....


쿤데라는 루드빅의 사유를 통해 '상징과 패러디'에 대해 이런 식으로 설명한다.「이 아이스크림이 꼭 횃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유사성은 어떤 의미를 띠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왜냐하면 이 횃불들은 진짜 횃불이 아니라 다만 <횃불의 패러디>이며, 그것이 장엄하게 받쳐 들고 있는 것, 즉 분홍빛 기쁨의 그 덧없는 흔적은 진짜 쾌락이 아니라 <쾌락의 패러디>이며, 그것은 이 먼지 도시의 모든 횃불과 쾌락에 대한 피할 수 없는 패러디적 성격을 아주 그럴듯하게 나타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236P)」


3. 개인의 존재 : 그들의 실존


(1) 복수와 증오


▶ 루드빅이 말하는 복수란 것의 실체


나만 그렇게 느낄지는 모르겠지만 이 소설에서 복수라는 것들이 좀 이상하다. 루드빅의 고모(쿠테츠키 부부)가 루드빅에게 행하는 복수의 방식은 그렇게 우습게 여겼던 올케(루드빅의 어머니)를 루드빅의 배신감으로 자예를 성대하게(?) 차려주고 장례식에 루드빅을 배제시키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야로슬라브는 이때를 이렇게 회상한다.「마침내 배은망덕한 조카에게 복수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218p)」(그럴리야 있겠습니까 만은 매우 낭만스런 복수가 아닐런지...... )


반면에 루드빅이 선택한 복수의 방법은 그가 지닌 가장 소중한 대상을 오로지 취함으로써 그의 시간과 성과를 파편화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제마넥의 아내라고 확신하는 헬레나에게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접근하여 불륜을 저지르게 된다. 이 과정에서 루드빅 철저하게 몰입하는 것은 바로 영매의 눈이다.「그래서 부재하는 그 제3자의 눈으로 이 육체를 바라보고자 노력했다. 또 그 제3자의 영매(靈媒)가 되려고 애썼다. 내 영혼은 한 여자의 벗은 몸, 그녀의 구부린 다리, 배의 주름, 가슴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내 눈이 그 부재하는 제3자의 눈이 되는 순간에만 의미를 얻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내 영혼은 돌연히 그 타인의 시선 속으로 들어가 하나가 되었다.(279p)」


이런 루드빅에게 번번이 도움을 받게 되는 코스트카는 루드빅의 선한 행동조차도 그 동기가 사랑이 아니라 증오라면서 이렇게 얘기한다.「당신은 예전에 당신을 해친 사람들과 오늘날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가하고 있는 사람들을 동일시하고, 그러고는 복수하는 거예요. 그래요, 당신은 복수하고 있어요. 당신은 사람들을 도와주고는 있어도 증오로 가득 차있습니다. (334P)」


루드빅의 심경에 변화가 생긴다. 그의 해석대로라면 뜻하지 않은 곳에서 전혀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루치에를 만났다는 것이 (말 한마디 못 붙여봤지만) 어떤 징조와도 같은 그 출발점이겠지만, 고향에서의 2박 3일과 만나고 부딪치는 모든 사람과 사건들에서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아무튼 루드빅이 자신의 복수에 대해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과거에 최면이 걸린 나는 어떤 끈으로 거기에 자신을 묶어놓으려 하고 있다. 복수라는 끈. 그러나 이 복수라는 것은 요 며칠 사이에 내가 확실히 알게 되었듯이, 움직이는 자동 보도 위를 달리는 나의 그 질주만큼이나 똑같이 헛될 뿐이다...... 미루어진 복수는 환상으로, 자신만의 종교로, 신화로 바뀌어 버리고 만다. 그 신화는 날이 갈수록 신화의 원인이 되었던 주요 인물들로부터 점점 더 분리되어 버린다. 그 인물들은 사실상(자동 보도는 멈추지 않고 계속 앞으로 움직인다) 더 이상 예전의 그들이 아닌데, 복수의 신화 속에서는 조금도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396P)」무엇이 그를 바꾸고 있는 것일까?


▶ 제마넥의 변화와 증오


먼저 제마넥이 왜 루드빅의 증오 그리고 분노와 복수의 대상으로 삼아졌을까? 물론 믿었던 동료에게 학생회관에서의 배신을 느끼기에 제마넥은 중요한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하필 왜 제마넥일까? 쿤데라는 이렇게 설명한다.「인간은, 균형을 갈구하는 이 피조물은, 자신의 등에 지워진 고통의 무게를 증오의 무게를 통해서 상쇄한다. 그러나 이 증오를 순수히 추상적인 원리들, 불의, 광신, 야만성에 집중시켜 보라!...... 자신의 분노를(인간은 이 분노의 힘이 한정되어 있음을 알고 있다) 가라앉히고자 할 때 결국 분노를 한 개인에게 집중시킬 수밖에 없는 법이다.(373p)」


그런데 이렇게 선정된 증오와 북수의 대상이 변하여 더 이상 자신이 15년 동안 품어왔던 그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루드빅의 복수가 패배로 돌아간 데는 여러 가지 외적변수들이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복수의 대상이 변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변한 정도가 아니라 심지어 그의 편일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예전의 태도를 근본적으로 버린 것 같아 보였고, 만일 내가 현재 그의 주위에 살고 있다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의 편에 서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372p)」


루드빅은 갈등한다. 그가 만약 화해를 청해 온다면? 그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모욕이고 좌절이다.「그러나 제마넥에게서만은 나는 그런 입장의 변화를 예상하지 않았다. 내 기억 속에서 그는 마지막 보았던 모습으로 화석화되어 있었고, 지금 나는 그가 예전에 내가 알았던 사람이 아닌 다른 모습의 사람이 될 수 없다고 격분하여 주장하고 있는 것이었다.(372p)」


제마넥의 변화는 루드빅에게 어떻게 작용한 것일까? 왜 루드빅은 그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고 격분하는 것일까? 「화해한다면 나의 내적 균형이 일시에 깨져버리리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러면 내 내면의 저울의 한쪽이 단번에 공중으로 날아가 버리리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를 향한 나의 증오가 내 젊은 날에 닥친 고통의 무게와 평형을 맞추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 나는 그를 반드시 증오해야만 한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373p)」


(2) 패배 그리고 화해


▶ 루드빅의 패배 - 세대정신 내에서 제마넥과의 유사성


이제 루드빅은 자신이 계획하고 추진했던 복수의 실패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기에 이른다.「어제의 그 기괴한 섹스로 하여 나는 이 남자와의 싸움에서 이겼다고 생각했었는데, 삶은 바로 그 남자의 정부의 모습을 통하여 나의 실패를 알려주며 나를 조롱하고 있었다.(377p)」이유는 증오, 복수의 대상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어떻게 대상이 사라졌을까?


그것은 그 남자의 정부인 부로조바 양이 일깨워 준 세대정신 내에서 제마넥과의 유사성 때문이다.「나와 제마넥 사이의 유사성은 그가 입장을 바꿈으로써 나와 가까워졌다는 사실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 유사성은 보다 심층적이고 우리들의 운명 전체를 포괄하고 있었다. 브로조바 양과 그녀의 세대에 있어서 우리는 서로 맹렬하게 대치하고 있을 때마저도 서로 닮은꼴인 것이었다.(378p)」


루드빅은 이런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고 또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발버둥을 치지만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내게는 언제나 너무도 현재적이고 생생한 그와 나 사이의 투쟁 위로 모든 것을 잠재우는 위무의 물결이 파도처럼 덮쳐오는 것을 나는 보았다...... 나는 영원성 안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서른일곱의 나이에 닻을 내리고 있으며 그 닻의 사슬을 (젊은이에게 그토록 재빠르게 순응한 제마넥처럼 그렇게) 끊고 싶지 않다.(378p)」


▶ 과거가 보여준 차가운 고통


그런 루드빅에게 과거라는 존재는 무심하게도 차가운 고통만을 안기고 돌아서 간다.「거의 고통스럽도록 내 마음에 들었다. 내게서 멀어져 가는 그녀의 아름다움은 내게 그녀의 차디찬 무관심을 나타내주는 것이었으므로. 내가 복수하고자 했던 나의 과거, 그러나 여기서 마주쳤는데도 마치 나를 알지도 못한다는 듯이 쳐보지도 않고 지나가 버린 나의 과거, 그 과거 전체가 나에게 보여준 것과 동일한 그런 차가운 무관심.(385p)」


▶ 유린된 운명


실패를 깨달은 루드빅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따져보기에 이른다. (이 책은 이렇게 인과관계를 따지며 따라 읽을 수 있도록 통시적으로 쓰여지지 않았다) 그 잘못의 범인으로「잘못은 다른 데 있었다. 그 죄는 너무도 큰 것이어서 그 그림자가 죄 없이 결백한 사물들(그리고 말들)을 사방으로 온통 뒤덮었고 또 유린했던 것이다(425p)」라고 지목한다. 그리고 이것이 자신과 루치에를 공동의 운명체로 만들어 버렸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것이 무엇일까.....? 앞서 언급한 휩쓸릴 수밖에 없었던 역사, 시대 등을 일컫는 큰 의미의 사유일 것이다. 이들에게 결백한 가치들을 유린당한 측면에서 자신과 루치에를 바라본다.「나에게 자신의 운명이(몸이 더럽혀진 소녀의 운명이) 나의 운명과 닮았다는 것을 말해 주고자 한 것인지 모른다. 우리 둘은 서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서로를 비껴갈 수밖에 없었겠지만, 우리의 삶은 둘 다 모두 유린의 역사라는 점에서, 우리는 피를 나눈 형제나 결혼한 부부와 같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인지 모른다. 루치에가 육체적인 사랑을 유린당하고 그녀의 존재에 대하여 가장 기본적인 가치를 박탈당한 것과 마찬가지로 나의 인생 또한 원래 의지하고자 했던 가치들을 빼앗겨버렸다...... 그렇다. 결백한 가치들이었다.(425p)」


▶ 화해의 시작 - 잘못의 책임


모든 화해는 자신의 내면에서부터 온다는 얘기일가? 루드빅도 비로소 모든 잘못의 근원에 자신이 있음을 고백한다. 이제 쿤데라는 루드빅과 세계와의 화해를 시키려고 준비한다.(소설을 읽는 동안은 과연 루드빅이 화해할 것인가 아닌가에 주목하여 읽었다)「내가 부당함에 보복하려 했던 모든 곳에서, 마침내 잘못을 저지른 책임자로 색출해 낸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이었다.(421p)」


이 과정에서 루드빅은 자신의 상황과 처지를 반추한다. 평생을(젊음을, 15년을) 하나의 집념으로 달려온 사람에게 받아들이기 힘든 자아상실이다.「그는 나침반에서 방향을 가리키는 바늘이고 나는 그저 그 바늘의 뒤쪽 끝에 불과한 것일까?(423p)」


▶ 화해 - 친구


먼저 오랜 친구사이인 루드빅과 야로슬라브의 화해부터 살펴보자. 이들의 화해는 단 두 문장으로 끝난다. 개인적으로는 아주 맘에 드는 장면이기도 했다. 가족에 배신에 상처 입고 (현재적인) 부엌 집기를 모두 부숴버린 야로슬라브가 무작정 강가에 나와 시간을 보낼 때, 루드빅 역시 들판을 헤매다 야로슬라브를 발견하고 연주회에 가지 않느냐고 묻자 그것 때문에 프라하에서 온 것이냐는 야로슬라브의 질문에 루드빅의 대답이다.「"하지만 모든 일들이 처음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끝나잖아" 그가 말했다. -"그래, 완전히 다르게 끝나 버리지" 내가 말했다.(420p)"」그리고는 이들은 함께 침발롬이 있는 악단에서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함께 연주를 하면서, 온전히 세상과 화해하기에 이른다.


▶ 옛날 세계로의 회귀


이제 루드빅의 화해가 도달하는 곳은 어디일까? 루드빅은 고백한다.「나는 이 옛날의 세계를 사랑하고 있었고, 내게 피난처가 되어달라고 빌고 있었다.(422p)」결국 루드빅은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에서 호소하고 있던 옛날의 세계를 자신이 그렇게 사랑하고 애타게 찾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그곳으로 돌아간다. (맞나?) 그리고 이 세계는 자신의 현재와 닮았다.「이 세계를 초라한 모습으로 다시 만났기 때문이었다...... 이런 고독 속에서 이 세계는 정화되었다....... 이 고독이 그 세계를 나에게 되돌려준 것이었다.(423P)」고 얘기한다.


▶ 사랑이 사랑으로


마지막 장에서 야로슬라브의 노래 속에서 행복을 느끼는 루드빅은「그곳에서는 그러니까 사랑이 사랑으로, 고통이 고통으로 머물고 있었고, 아직 가치들이 유린되지 않고 있었다.(429P)」고 얘기한다. 하지만 그런 세계가 현실에선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직시한다. 하지만 루드빅에게 돌아갈 곳은, 그가 화해하고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곳은 그곳밖에 없음을 깨닫는다.「그러나 나는 동시에 깨달았다. 이 나의 집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며(이 세상 것이 아니라면 그 집은 대체 어떤 것인가?), 우리가 노래하는 것들은 모두가 단지 추억이고 기념물이며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으로 보존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을.(429P-430P)」


그리고 루드빅의 마지막으로「 ...... 그리고 우리의 운명은 죽음보다 훨씬 이전에 끝나는 일도 종종 있다(000p)」고 생각한다. 처절한 얘기일까 즐거운 의미일까? 애들은 커가는데 나이 50에 정년퇴직하는 심정이 아닐까 싶다.


4. 시간과 역사 - 기억과 망각


자, 이제 정리해야 할 때가 되었다. 물론 아직 아래로 길디 긴 스크롤이 남아 있지만 이쯤에서 쿤데라가 얘기하고자 하는 바를 짚고 넘어가야겠다. 그런데 이걸 일일이 토를 다는 짓은 무의미할 것 같다. 필요하면 그냥 읽어 보시길.


루드빅은 짧지만 지난했던 2박 3일간의 일정을 보내면서 겪은 사유와 의식의 여행 끝에 이런 결론을 내린다.「오늘날에도 벌써 역사는 잊혀진 것들의 망망대해 위에 떠 있는 가느다란 기억의 밧줄일 따름이지만, 시간은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고, 이제 한정된 개개인의 기억 속에 모두 들어올 수조차 없는 또 다른 수천 년의 세월이 이미 지나가버리고 난 후인 시대가 다시 또 올것이다.(397p)」


그러자 그날 하루에 대한 회한이 엄습하고, 결국「 ...... 그 하루가 허망해서만이 아니라 그 허망함 자체도 역시 잊혀질 것이라는 생각(398p)」을 하게 된다. 그리곤 이 사유가 발전하여「이 사회의 모든 잘못과 오류들,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나를 소진시킨, 내가 그토록 고치고 시정하고 다시 바로잡아 보려 애썼으나 소용없었던-이미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 이제 어떻게 돌이킬 도리가 없는 것이므로-그 모든 잘못과 오류들과 더불어 그렇게 잊혀질 것이었다...... 갑자기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 가지 헛된 믿음에 빠져 있다. 기억(사람, 사물, 행위, 민족 등에 대한 기억)의 영속성에 대한 믿음과 (행위, 실수, 죄, 잘못 등을) 고쳐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다. 이것은 둘 다 마찬가지로 잘못된 믿음이다. 진실은 오히려 정반대이다. 모든 것은 잊혀지고, 고쳐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엇을(복수에 의해서 그리고 용서에 의해서) 고친다는 일은 망각이 담당할 것이다. 그 누구도 이미 저질러진 잘못을 고치지 못하겠지만 모든 잘못이 잊혀질 것이다.(398p-399p)」


5. 기타 몇 가지 개념들


(1) 우정


이 책의 주변부적인 한 축으로 야로슬라브와 루드빅과의 우정에 대한 변증법적 심화과정의 구성도 드러난다. 그렇게 절친하고, 위로와 토론의 대상이었고, 서로가 서로에게 길이 되어 주던 친구 사이에 문제가 생겼다가, 되돌아오는 얘기. 결국 그들이 머무를 수 없었던 옛날의 세계가 되겠지만. 망가지는 루드빅을 바라보는 야로슬라브의 상심이 그들 관계의 면모를 보여준다.「나는 루드빅의 전락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차라리 나는 우리 사이에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는 척하려고 애썼다...... 나의 세계, 이것이 마치 아직도 우리가 공유하는 세계인 것처럼 그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그에게 묘사해 주었던 것이다.(217P)」


루드빅에게 닥친 변화의 물결이 이들의 관계에 가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리고 멀어진다.「그것이 내 손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났다. 우리가 소원해진 것도 다시 가까워지는 것도 내 손에 달려 있지 않았다.(227p)」야로슬라브는 마침내 서로의 영향력 밖의 문제로 받아들임으로써「우리를 외롭게 만드는 것은 적이 아니라 친구이므로.(228p)」라는 말로 루드빅과의 단절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이들도 결국 증오의 대상으로 오랜 시간을 지나치게 된다. (그리하여 초장에 길 건너편으로 서로를 확인하고도 모른 척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소설은 마지막을 이들의 얘기로 마무리한다. 이들의 관계의 회복이 곧 그들이 죽음보다도 먼저 맞이한 운명에 대해 선택할 수 있는 그들이 세계일 것이므로.


(2) 연대의식(동료의식)


루드빅은 검은 표식의 군대에 있는 동안 연대의식 혹은 동료의식에 대한 화두도 등장한다. 우정의 집단화된 개념 중에 혹시 연대의식(동료의식)이 포함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다른 동료들이 어렵게 얻어내는 외출에 관심이 없던 루드빅이 혼자와 친해지면서 우연히 외출을 나가게 되고 이 외출에서 겪게 되는 매춘(?)의 경험, 피곤한 일과 후에 그들을 더 괴롭히는 기간병(?)들에 대항하는 우스꽝스러운 소풍 같은 반항(덕분에 괴로워지지만-특히 정상적인 달리기보다 더 힘들게 연기하는 체넥의 달리기 장면에서는 지하철에서 읽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리 내어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또래의 남자들끼리 모였을 때 할 수 있는 대부분의 얘기, 즉 여자얘기 그리고 섹스 얘기. 루드빅도 이 연대의식에 가담하고자 루치에와의 관계를 거짓으로 지어내는 장면에서는 내 군대생활을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알렉세이의 죽음을 맞닥뜨린 루드빅은 그러한 연대의식에 대해 회의를 갖게 된다.「나는 검정 표지 동료들과의 연대 의식 또한 잃어버렸고, 그로 인해 사람들에 대한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 역시 상실한 것이었다. 우리는 오로지 상황이 압력과 자기 보존 본능 때문에 가축떼처럼 똘똘 뭉쳐 우글우글 몰려 있는 것일 뿐이며, 그런 식의 연대 의식이 무슨 가치가 있는 것인가 의심스러워졌다. 그리고 우리 검정 표지 집단이 예전의 그 강당에 모여 있던 집단과 똑같이, 아니 어쩌면 이 세상 모든 집단과 마찬가지로, 한 사람을 몰아낼 수 있다(유배 보내고 죽음으로 몰고 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170P)」


(3) 사랑 : 상황 속에서의 남녀관계


남녀 간의 사랑이란 것 역시, 그 상황과 떨어뜨려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일까? 쿤데라는 남녀 간의 사랑도 두 객체 간의 문제만은 아니며, 본질과 이반된 이미지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점을 강변한다. 루치에에 대한 루드빅 사랑은 극한적이었다.「그때-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나의 온 존재가 매달린 한 여인에 대한 총체적 욕망을 느끼고 있었다고. 그것은 몸과 영혼, 욕망과 다정함, 서글픔과 삶에 대한 욕구였으며, 위안에 대한 갈구이자 동시에 저속함에 대한 갈구이고, 영원히 소유하고픈 갈망이자 동시에 한순간의 쾌락에 대한 갈증이었다. 나는 내 모든 것을 완전히 다 걸고 있었고, 한 곳으로만 향해 있었다.(155P)」


그런데 코스트카에 의해 루치에의 본질을 알게 되고 그가 사랑하고 알았던 루치에와 다른 존재임을 깨닫게 되면서 혼란에 빠진다.「내가 그토록 루치에를 사랑했어도, 그녀가 그렇게 완벽하게 <유일한> 존재였어도, 그녀는 우리가 서로 알게 되고 매혹되었던 그때의 <상황>과 떼어놓을 수 없다고 생각하곤 했다.(231P)」그 상황으로 이해하고 그 상황으로 사랑했으며 그 상황으로 기억한다는 얘기일 진대, 그 말의 진의는 이렇다.「내가 한 여자에게서 좋아하는 것은 그녀 자체가 아니라 그녀가 내게 다가오는 방식, <나에게> 그녀가 의미하는 그 무엇이다...... 루치에도 오스트라바의 변두리가 없다면, 철조망 사이로 밀어 넣어 주던 장미, 그녀의 해진 옷, 희망 없던 내 오랜 기다림이 없다면, 내가 사랑했던 루치에가 더 이상 아닐지도 모른다.(232P)」하지만 이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나중에 깨닫게 된다.


(4) 작업의 정석


친절한 쿤데라 씨는 연애학습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작업에 대한 일견을 제시한다. 여자에게는 이성에 의한 설득이나 합리적인 반박 보다는「 ...... 자기 자신에게 부여하고자 하는 이미지(원칙이나 이상, 신념 같은 것)를 파악하고, 우리가 바라는 그녀의 행동과 그 이미지가 조화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궤변을 동원하여) 노력하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한 일이다.(259p)」고 조언한다. 이는 곧「그 여자가 자신의 가장 뿌리 깊은 환상들에 맞추어 행동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하는 것이다.(260p)」그런데 이게 여자에게만 해당되는 얘길까? 아무튼 관심 있다면 수련해 보시길......


(5) Sex : 육체와 영혼의 이반


작업의 궁극적인 Goal은? 바로 그렇다. 그런데 쿤데라는 이 섹스의 순간, 따로 노는 육체와 영혼을 묘사하고 있다.「육체적 사랑이 영혼의 사랑과 한데 섞이는 일은 지극히 드문 일이다. 한 육체가 (아득한 옛날부터의, 보편적이고 변하지 않는 그 움직임으로) 다른 육체와 결합하는 동안 영혼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동안 영혼이 만들어내는-그렇게 해서 육체적 삶의 단조로움에 대한 자신의 우월성을 확실하게 하면서- 그 온갖 생각들이라니! 영혼은 또 한데 얽힌 두 육체보다도 천 배는 더 관능적인 상상의 구실로서만 (타인의 육체인 듯) 소용되는 자신의 육체에 대하여 얼마만 한 경멸이 가능한가! 아니면 그 반대이든가. 즉 영혼은 육체가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하는 그 반복 운동을 하도록 그저 내던져 두면서 육체를 격하시키고 자신은 (쉽게 변하는 육체의 쾌락에 벌써 싫증을 느끼며) 자기 만의 생각과 더불어 멀리 사라져 버리는 데 얼마나 능숙한가! 저 멀리 체스 판으로, 어떤 점심 식사의 기억으로, 또는 어떤 책으로.(278p-279p)」그냥 재밌는 대목이라 옮겨봤다.


(6) 질투 : 루드빅은 루치에와의 관계에 있어서 코스트카와 비교하게 된다.


나는 이 대목에서 질투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나는 원래 질투는 삶을 유지하는 또 다른 힘이라고 생각해 왔다.(분명 기분 좋은 일은 아니지만) 질투가 맞는지 아닌지 루드빅의 자성의 과정 상 한 대목을 들여다 보자.「그에게 그녀는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나에게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었다. 그는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었다-나는 불행하게 만들었다. 그는 그녀의 육체를 경험했다-나는 결코 그렇게 하지 못했다.(344p)」그런데 루드빅이 동양철학을 좀 이해했다면 그다지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왜냐하면 그가 아니었으면 그녀는 오스트라빈을 떠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일테고, 또 하나 그가 제공한 그녀의 불행이 있었기에 코스트카가 마련해 준 (과거의 치유와 함께 다가 온) 행복의(그게 진정 행복이라면) 전초가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근시안적으로 보지 말고 보다 멀리 인과관계를 따져보면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도 들었다. 즉, 인생지사 새옹지마일 텐데 말이다.


하지만 후에 루드빅은 루치에가 어떤 병사에 대한 자세한 얘기를 코스트카에게 하지 않았다는 사실, 그래서 코스트카는 그가 루드빅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그의 방식대로 해석하고 판단한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루치에가 이곳 모라비아에서 살게 된 것이 단순히 코스트카를 보기 위해서 만은 아닐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된다. 그녀는 그의 고향이 모라비아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므로. 아마 이 부분에서부터 그가 돌아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7) 젊음-어리다는 것- 그림자놀이


소설 전반에 걸쳐 여러 인물들을 통해 뚜렷하게 제시하는 고약한 관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젊음 혹은 어리다는 것에 대한 냉소이다. 검은 표지 군대에서의 루드빅 자신과 알렉세이 그리고 중대장, 루치에의 고향 셰브에서 루치에를 윤간하는 동갑내기 막내의 행동「그는 바로 제일 어렸기 때문에 누가 자신을 모욕하는 것을 참지 못했다.(321p)」에서, 특히 헬레나를 사수하려는 인드라의 치기 어린 행동「이런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 스무 살짜리 청년의 마음에 들 리가 없는 법이고, 그래서 그는 어떻게 해서든 그것을 감추어보려고 애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예전에-아! 이 영원한 그림자 연극이여- 우리 중대장 녀석이 그랬던 것처럼). 옷 입는 방식으로(어깨가 각이 진, 모양새 좋은, 잘 어울리는 가죽점퍼), 그리고 행동으로(꽤 대담한 듯하고, 약간 상스러운 데도 있는 듯하면서 때로 아무 데도 관심 없다는 듯한 방자한 태도를 꾸미는 등).(401p)」들과 그 외 연주회장 등 여러 곳에 등장하는 조연급 젊은이들「 ...... 미숙한 나이에 대한 내 오랜 증오가 다시 솟아오르는 것이 느껴졌고, 멍청하기 짝이 없는 사내다움과 오만하게 보이는 거칠음을 나타낸다고 생각되는 가면을 씌워놓은 배우들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그 가면 아래 그래도 다른(보다 인간적인) 얼굴이 숨겨져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끔찍한 것은 바로 가면을 쓴 그 얼굴들이 그 가면의 야만성과 저속성에 미친 듯이 몰두해 있다는 사실이기 때문이었다.(427p)」을 통해 그러한 냉소를 겹겹이 칠해 놓고 있다. 아마도 밀란 쿤데라는 치기 어렸던 자신의 젊은 시절을 떠올리며 못마땅한 표정으로 인상 쓰면서 글을 쓴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아무튼 젊다는 것에 대한 반감은 검은 표지 부대에 새로 부임한 젊은(어린?) 신임 중대장을 비롯해서 자기 자신과 자신을 심문한 사무국 동료들, 마르케타, 제마넥 등의 모든 젊음에 대해 공평하게 작용하는 것 같다. 중대장을 상대로 한 루드빅의 사유는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를 무엇보다, 한 젊은이로, 연기를 하는 한 사람으로 보게 된다. 어찌 됐거나 젊은이들이 연기를 하는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삶은, 아직 미완인 그들을, 그들이 다 만들어진 사람으로 행동하길 요구하는 완성된 세상 속에 턱 세워 놓는다. 그러니 그들은 허겁지겁 이런저런 형식과 모델들, 당시 유행하는 것, 자신들에게 맞는 것, 마음에 드는 것, 등을 자기 것으로 삼는다-그리고 연기를 한다.(129p)」고 정의한다. 그리고는「젊음이란 참혹한 것이다. 그것은 어린아이들이 희랍 비극 배우의 장화에 다양한 무대 의상 차림을 하고, 무슨 말인지도 잘 모르면서 광적으로 신봉하는 대사들을 외워서 읊으며 누비고 다니는 그런 무대이다. 역사 또한, 미숙한 이들에게 너무도 자주 놀이터가 되어주는 이 역사 또한 끔찍한 것이다. 네로라는 풋내기, 나폴레옹이라는 애송이, 흥분하여 날뛰는 수많은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아이들이 흉내 내는 열정이나 간단하게 맡아버린 역할들은 처참하도록 실제적인 현실로 변형되어 나타난다.(130p)」


(8) 교회비판


▶ 교회와 시대


유물론을 신봉하는 공산주의 운동에는 분명히 신이란 없지만, 신이 없는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교회의 비난에 대해 진정한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것이고, 개별적 이해, 개인의 안락과 권력으로부터 멀리 떨어지는 것, 가난한 이들, 모욕당하는 이들, 고통받는 이들을 향하여 돌아서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한 교회가 그렇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296p)「교회는 노동 운동이 모욕당한 이들과 정의를 갈구하는 이들이 들고일어난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교회는 압제자들과 연합하여 노동자 운동에서 하느님을 들어내 버렸다. 그러고는 이제 와서 그 운동에게 하느님이 없다고 비난하려 드는 것이다.(297p)」


이러한 교회의식에 근거하지만 코스트카의 사유 안에서는 그분의 개입 없는 사물들의 공평한 질서는 결국 잘못되고 타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게 해 주시려고 하느님이 일부러 그 시대를 주었다고 평가한다. 마치 바벨탑과 같이.「 ...... 벌써 천국에 아주 가까이 다가가 있다고 믿었던 그 시절을 떠올린다. 그들은 얼마나 긍지에 차 있었던가. 그것은 그들의 천국이었고, 저 하늘 높이에서 아무도 그들을 도와주지도 않는데 그들 스스로 거기에 도달한 것이 아니었던가! 다만, 그 후, 그 천국은 그들의 눈밑에서 증발해 버리고 말았다.(298p)」


루드빅에게 있어서 루치에는「헬레나와 반대로 너무도 감미롭고 비물질적이며 추상적이고, 갈등이나 긴장, 극적인 것들과 멀리 떨어져 있(290p-291p)」다. 물론 이러한 그의 추상은 코스트카에 의해 곧바로 깨어져 버리지만.


▶ 종교와 마르크시즘 테제의 유사성


쿤데라는 또 마르크시즘의 테제들과 복음서와 성서의 가르침에 대한 유사성에 대해서도 주목한다.「나는 예수의 가르침을 근거로 하는 정신적 흐름이 훨씬 더 자연스럽게 사회 평등과 사회주의로 이어진다고 굳게 믿습니다...... 1948년 이후 혁명의 시기는 회의주의나 합리주의와 공통적인 것이 벌로 없었습니다. 위대한 집단적 신념의 시대였지요. 그 믿음을 긍정하며 시대와 더불어 행진하고 있던 사람은 종교가 주는 것과 아주 유사한 느낌들에 언제나 사로잡혀 있었어요. 그러니까 그 사람은 보다 높은 것, 보다 초개인적인 어떤 것을 위하여 자신의 자아, 이익, 사적인 삶을 포기했던 겁니다.(312p)」과연 그런가요?


6. '농담'이 던진 농담


(1) 농담이란 단어가 언급된 사례로 의미 찾기


이 소설의 초반부에 루드빅이 학교에서 쫓겨날 상황에서 농담이란 단어가 한 번 등장한 후, 말미에 가서는 종종 등장한다. 예를 들면 루드빅의 부당함에 대한 인식을 비꼬면서(?) 칼뱅 시대의 한 청년에 빗대면서 아무것도 나쁜 짓은 하지 않았고 증오 같은 것은 알지도 못했던 그 청년은「다만 농담을 한 것뿐(332p)」인데 처형당했다고 일러준다. 또 제마넥에 대한 복수가 그의 패배로 끝났음을 인정하는 루드빅이 침대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던 그 더러운 방에서 루치에의 저항을 떠올리며「이 모든 것이 꼭 못된 농담 같기만 했다.(345p)」고 얘기한다.


그리고는「나는 굴욕과 수치로 숨이 막혀왔다.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싶은 마음, 혼자 있고 싶은 마음, 이 사건 전체를, 이 고약한 농담을 지워버리고 싶은 마음......(385p)」이라며「그 자체만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 다른 것으로 괴물처럼 증식해 가는 그 고약한 농담을, 말끔히 치워버려야만 했다.(390p)」고 토로한다.


이러한 농담의 실체는 광대하고 철회 불가능한 실제적인 농담으로 표현된다.「이 쓸데없는 지난 며칠간을 내 인생에서 지워버릴 수 있다고 한들 그것이 내게 무슨 도움이 될 것인가, 내 인생의 일들 전부가 엽서의 농담과 더불어 생겨났던 것인데? 나는 실수로 생겨난 일들이 이유와 필연성에 의해 생겨난 일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실제적이라는 것을 느끼며 전율했다...... 그 일들을 초래한 실수들이 내가 한 실수들이 아니라면 무슨 권리로 내가 그것을 취소할 수 있겠는가? ...... 이런 실수들은 너무도 흔하고 일반적인 것이어서 세상의 이치 속에서 예외나 <잘못>도 될 수 없고 오히려 그 순리를 구성하는 것이었다...... 나 자신이 그리고 내 인생 전체가 훨씬 더 광대하고 전적으로 철회불가능한 농담(나를 넘어서는) 속에 포함되어 있는 이상, 나 자신의 농담을 완전히 무화시켜 버릴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391p)」그리하여 궁극에는 세계 내 존재로서 나는 부조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리라. 어디서 많이 듣던 얘기 아닌가. 그렇다. 바로 실존을 얘기하는 까뮈, 샤르트르, 카프카의 말이다.


(2) 쿤데라가 독자에게 보여주는 몇 가지 농담


헬레나의 자살 소동과 부대에서의 릴레이 소동은 쿤데라가 독자에게 제공하는 하나의 농담처럼 보여졌다. 마치 심각한 분위기의 영화가 전개되다가 어이없는, 실소를 짓게 만드는 코미디 장면이 연출되듯이. 바로 이 대목이다.「그녀는 당신이 구역질이 난대요! 당신은 그녀에게 똥을 싸게 한대요! 진저리가 난다는 거죠. 그녀가 나한테 그랬어요! 정말이에요, 똥을 싸게 한대요!(412p)」인드라의 이 대사를 통해 1차적으로는 지난 상황을 되돌려보면서 미소를 지을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상황과 갈등을 절묘하게 함축하는 아주 유쾌, 통쾌한 대사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도 쿤데라가 심어 놓은 그냥 웃고 넘길 수만은 없는 부비트랩이 발견된다. 정말 지독하게 깔아 놨다. 인드라는 그녀가 말한 그대로의 의미로, 즉 즉자적인 수준에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녀가 나에게 그랬어요! 정말이에요" 루치에도 루드빅에게, 또 코스트카에게 얘기했고 그들은 그들대로 해석하고 받아들였다. 블라디미르나 블라스타도 야로슬라브에게 얘기했고 야로슬라브는 자기 식대로 무시했다. 인드라도 그 젊은 이성으로 헬레나의 말을 자기 식대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심심한 의미를 따지게 만드는 소품이 한 가지 있다. 소소한 재미일 수도 있고, 지독한 농담일 수도 있는데 루치에가 겁탈당하는 혹은 당할 뻔한 두 번의 상황에 모두 성화(聖畵)가 배치된다는 점이다. 어떤 병사(?)에 의해 겁탈당할 뻔한 장면에서는 겟세마네 동산(319P)이 걸려 있었고, 셰브에서 동료(?)들에게 윤간당할 때는 예수를 안은 성모마리아(321p)가 있었다. 물론 비교적 자세하게 기술되는 그 어떤 병사의 기억에는 그저 성화 한 점 일 뿐(161p), 겟세마네 동산 따위는 없다.


7. 그래서, 나의 독후감


앞서 너무 장황하게 쓰긴 했지만 결국 너무 추잡하게 굴지 말고 세계와 화해하라고 얘기가 아닐까 하는데, 이를 다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삶은 한 편의 농담과 같은 것이므로 시간이 지나면

1. 세상은 변할 것이고 또 기억도 잊혀질 것이다.

2. 이것저것 따지다 보면 몰랐던 것, 못 보았던 것들이 알아지고 보여지게 된다.

그러므로 증오, 분노, 사랑 같은 모든 감정은 무뎌지고 또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따귀를 때릴 것이면 차라리 지금 때리고 말아라.


8. [부록] 만난 사람들


* 루드빅 얀

당연히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그는 15년 전 우연한 농담과도 같은 자신의 실수(?)로 인해 자신이 믿던 세계로부터 축출(잘 나가던 대학생, 교내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 공산당원)되고, 분노와 증오로 시간을 보내게 된다. 우연히 만나게 된 라디오 방송국 여기자 헬레나가 그를 그의 세계로부터 축출한 (믿었던) 제마넥의 아내라는 사실을 눈치채고 복수를 위해 그녀를 유혹한다. 마침내 세 번의 만남 끝에 그의 고향인 모라비아에서 복수의 기회를 얻게 된다. 그의 복수는 다름 아닌 제마넥의 아내인 헬레나와 간통함으로써 그의 소중한 것(삶, 시간, 가족..... 뭐 그런 것들)을 빼앗아 팽개쳐버리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첫날 루치에(확신할 순 없지만)를 만나면서 일단 그의 정신세계가 삐걱거렸고, 간통엔 성공하지만 이미 그녀(헬레나)는 제마넥에게 있어서 무의미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깊은 혼동과 좌절, 실패감에 빠진다. 심지어 <왕들의 기마행렬>에서 만난 제마넥에게 참을 수 없는 존재적 절망감을 느낀 그는 마찬가지로 자신의 세계에서 쫓겨난 불알친구 야로슬로브와 함께 침발롬이 있는 약단에서 클라리넷을 불며 정화(?)된다.


* 헬레나

한때는 열렬했으나, 파벨(제마넥)과 형식적인 결혼생활에 염증을 느끼던 중 루드빅을 인터뷰하러 갔다가 그에게 홀딱 빠져버려 불륜을 저지르게 된다. 그리고 자신에 찬 결심으로 인생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다. 하지만 결국 루드빅 마저 그녀를 떠나고, 루드빅은 그녀를 똥을 싸게 만듦으로써 그녀의 곁에는 애송이 인드라 만이 남게 된다.


* 야로슬라브

루드빅의 어릴 적부터 절친한 친구. 스마트하고 쿨한 친구 루드빅에 의해 민속음악의 길을 업보처럼 여기고 평생을 바치지만 자신의 세계를 잃고 방황하던 루드빅에게 오히려 마음의 상처를 입고 루드빅에 대한 증오의 감정을 갖게 된다. 그러나 자신의 왕국이었고 세계였던 그리고 그 안에서 왕이었던 민속음악에 대한 예전 같지 않은 대외적인 관심과 지원, 그리고 <왕들의 기마행렬>로 인해 겪게 되는 내환 즉, 아들 블라디미르에 대한 집요한 강요, 이해해 줄 줄로만 믿었던 아내 블라스타의 배신(?) 등등으로 방황하게 된다. 어쨌거나 야로슬라브는 침발롬이 있는 악단 연주 중에 친구 루드빅의 품에 안겨 병원으로 후송된다.


* 코스트카

헤르만 헤세 식으로 표현하면 카인과 아벨, 골드문트와 지그문트, 데미안과 싱클레어.... 이런 비유가 맞을까 만은 암튼 그런 식으로 루드빅과 대비되는 인물이다. 물론 그가 어떠한 세계에 속하던 루드빅, 야로슬로브와 마찬가지로 그의 세계 내에서 유랑하는 인물일 따름이다. 루치에에 대해 번민하는 루드빅이 코스트카와 자신을 빗대는 독백은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 루치에

이 여자는 제1부에 잠깐 등장하는 것으로 끝이다. 나머진 모두 회상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루드빅 다음 자리에 앉혀야 할 정도로 이 소설 전체에 걸쳐 매우 중요한 등장인물이다. 루치에의 삶과 행동, 그리고 그녀의 시간과 루드빅의 시간 심지어 코스트카의 시간까지, 모두를 주무르는 영향력 있는 인물이다. 루치에는 루드빅에 강제로 군대에 편입되었을 때, 그 절마의 시간에 루드빅에게 나타나 그를 위로하고 어루만져주던 뻬아뜨리체, 천사와 같은 인물이다. 그런 그녀를 루드빅은 절제할 수 없었던 욕구(관능, 성욕이라 표현하기엔 좀 적절치 않은 것 같다)과 그녀에 대한 몰이해로 떠나보낸다.


* 제마넥

루드빅에 의해 자신을 축출한 원흉으로 묘사되지만, 상황논리로 보면 그것은 루드빅의 타겟으로 맞춰졌을 뿐이고, 그는 상황이 원하는 것을 그에 맞게 했을 뿐이다. 이런 걸출한 스타 제마넥에게 루드빅은 철천지 원수 같은 증오와 분노를 지니게 된다. 하지만 그 또한 그가 속한 세계에 존재하는 한 인간일 뿐이다.(나는 쿤데라의 의중을 이렇게 해석했는데 맞는지 모르겠다)


* 블라디미르와 블라스타

야로슬라브의 아들과 아내. 자기 만의 나라, 그 천국에 속해 있던 야로슬라브에게 치명타를 날리고 너절부러지게 만든 장본인들.


* 쿠테츠키

루드빅의 고모. 딱 두 번 언급되지만 한 번은 루드빅의 어머니(올케)와 관련하여 루드빅에게 치명상을, 한 번은 야로슬라브에게 블라디미르에 대한 치명적인 정보를 제공한다.


* 마르케타

루드빅의 농담이 그가 처한 모든 세계를 잃고, 현실이 괴물처럼 되도록 만든 장본인. 루드빅의 첫사랑(?)


* 인드라

헬레나를 사모하다 못해 열아홉짜리 남성미를 자랑하고 픈 운전기사 겸 보조. 마지막엔 루드빅이 이 아이에게 한 대 얻어맞는데, 헬레나에 대한 사랑이 치기 어려 보이면서도 미소 짓게 한다.


* 브로조바

제마넥의 스물두 살짜리 대학생 애인. 이 얘가 없었어도 헬레나가 바람을 폈을라나?


* 혼자

루드빅의 <검정 표지>의 군대생활에 있어서 가장 인상 깊은 등장인물. 동창인 경찰과 말다툼 끝에 구타하고 6개월의 감옥생활 끝에 이 군대로 보내졌다. 부대 내에서의 그의 태도와 행동은 지극히 자유로운 성격의 소유자.


* 베드리흐

엄격한 종교적 규율로 인해 무기를 손에 들지 않는 평화예찬론자. 그는 이 부대에 오게 된 것을 승리한 싸움이라 여기며 환희에 차 있었기 때문에 혼자(다른 방식으로 표출되었지만)처럼 자유로움을 느끼는 인물.


* 체넥

응용미술학교 출신의 입체파 지망생. '후스의 전사들' 류의 그림을 잘 그렸다는데, 개인적으론 혼자와 함께 이런 캐릭터가 맘에 든다. 리버럴한 창의성 그리고 응용력.


* 알렉세이

부친을 밀고한 후 연좌에 걸려 자신까지 이 부대로 왔지만, 언제나 당당한 공산주의자이고자 했던 스무 살의 청년.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자신의 세계에서 공산당원으로서의 자격이 박탈되는 다음날. 튜브(?) 두 개를 홀랑 까먹고 자살한다. 개인 대 세계의 싸움이라는 측면의 상황적 유사성에 있어서 루드빅에 가장 근접한 캐릭터이며, 루드빅과는 다른 선택과 다른 길로 접어듦으로써 비교된다. 후반부에 모종의 죽음을 마주한 루드빅이 두어 번 회상하는 친구.


* 중대장

스물다섯 살짜리 철부지(?) 중대장. 루드빅의 군 시절에도 중요한 조연이었지만, 말미에 인드라의 치기와 허세에 비교되기도 한다.


* 기타 : 바르가 / 페트르 페크니 / 조제프 / 암브로즈 / 스타나 등등의 군시절 동료들이 더 있다.


* 침발롬 [Cimbalom] : 상자 모양의 통에 금속선을 친 헝가리의 타현악기(打絃樂器).



벨트를 감은 2개의 막대로 쳐서 연주한다. 원형은 영국의 덜시머, 독일의 허크브레트 등과 유사하며 헝가리의 민속음악, 특히 집시들의 악단에서 많이 쓰이고 있다. 이것이 하프시코드(쳄발로)와 클라비코드의 원형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終-


2009/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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