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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나다 이군 Jun 24. 2023

해방 공간을 다시 보다

1. 해방공간에 대한 관심


우리 때 대학교를 처음 입학하면 제일 먼저 봐야만 하는 책이 '해방전후사의 인식'이었다. 일부 뉴라이트 계열의 인사들은 빨갱이 입문서입네 어쩌네 하지만, 고등학교때까지 배워온 상식과 직접 접하던 사회현상, 역사적 진실 등이 허구와 거짓일 수 있다는 비판적 시각을 열어주던 책이었다. 그 당시 대학생들에게 이러한 경험은 문화적 충격에 가까왔다.


개인적으로 해방공간에서의 부모세대의 삶과 그 방식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이 있었지만, 주로 빨치산 등에 대한 관심으로 국한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시대적 배경이 결국 해방공간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우연한 기회에 헌책방에서 (별로 달가와하지 않는 작가이지만) 이병주의 데뷔소설 '소설 알렉산드리아'를 접하게 되면서 부터이다. 물론 이 소설이 해방공간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그 시대를 기자로, 젊음으로 살았던 한 사람의 글이란 면에 있어서 의미가 있다 싶어 '산하'(이병주/한길사,전 7권)를 구입하게 된 것이다.


1945년 8월15일 美, 英, 佛, 蘇 등 전승국 언론들과 日帝로부터의 한국 해방을 `테러와 억압에 대한 승리`로 보도한 미국에서 발간되던 독립신문

이병주의 '산하'는 투전꾼으로 해방을 맞은 주인공이 이승만 박사와 연을 닿으면서 해방공간을 활보하는, 당시의 입지전적인 실제 인물을 모델삼은 일대기라 할 수 있다. 물론 그 입지전적인 인물의 일대기가 시대상을 얼마나 대변하는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소설이 뭐 꼭 그 시대를 대변하는 인물만을 소재로 삼아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 이 문제는 일단 양보할 수 밖에 없겠다.


특히, 이 소설에서 드러나는 부분은 해방공간의 격동기를 이승만 박사를 중심으로 전개하는데, 작가의 전직이었던 기자다운 면모는 잘 드러나지 않으나 (작가는 자신의 글이 기록이라고 얘기하길 즐겼고, 그의 소설은 대부분은 이런 식이다. 좋게 말하면 기사, 나쁘게 말하면 표절에 가깝다. 실제로 '지리산'같은 작품은 이태의 남부군을 그대로 베껴 표절시비에 휘말리기도 했다), 양시양비의 논조를 일관되게 펼치는 것을 보면 기자였던 것 만은 분명해 보인다. 다만, 명백히 한 쪽(좌익)은 사상적으로는 인정할 수도 있겠지만, 현실적으로는 틀려먹었다는 주장 위에 펼쳐지는데, 애매한 것은 이것이 어떤 입장인지가 명확치 않다는데 나로서는 이해하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이는 그의 전작(全作)에서 드러나는데, 읽고나면 항상 '그래서?'라는 의문이 든다. 마치 노골화되기 전의 이문열과 같아 보인다.


45년 8월15일 정오.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일왕(日王) 히로히토가 미영중소 연합군에게 항복을 발표하자 서울 시민들이 서울 광화문 네거리으로 나와 환호하는 모습


그런데 이 책은 우리의 역사를 통털어 몇 번 있을까 말까한 그 엄청난 격동기에 대한 정당한 시각을 갖추기엔 너무나도 부족하고 또 애매해 보였다. 그래서 나는 나대로의 시각이 있어야 하겠기에 좌익과 중도, 우익의 글을 차례차례 살펴 보기로 했다. 그리하여 선택한 책들은 아래와 같다.


- 좌익 대표 : '1945년 8월 15일' - 김남천 / 작가들

- 중도 대표 : '효풍' - 염상섭 / 실천문학사(1997년)

- 우익 대표 : ' ' - 김동리 / 어문론총 39호(경북어문확회,2005)에 있다고 하는데 구하지 못함

(작가 스스로 폐기처분한 듯한 글임)

- 관조적 입장 대표 : '산하' - 이병주 / 한길사


그 밖에

경성트로이카 - 안재성 / 사회평론

조선인민에게 드림 - 박헌영 / 범우

백범일기 - 김구 / 돌베게

해방전후, 돌다리 - 이태준 / 하서출판사


얘기했듯이 나의 관심은 빨치산이었다. 그러나 그 빨치산에 대한 관심은 해방정국이라는 정치적 배경이 배제된 인간으로서의 빨치산이었다. 내가 마르크스에 대한 관심이 거기에 있었듯이 빨치산으로서의 인간 군상들에 대한 관심이 지배적이었던 것이다. 이제 당시의 정치적 시대배경을 맛보고 있자니 현재의 우리와 떨어져서 생각할 수가 없다. 그때 마다 가슴이 답답해짐을 느낀다. 조국과 민족의 해방을 위해, 인민의 자유를 위해 치열하게 살아갔던 부모 혹은 할아버지 세대의 역사는 나 같은 이후 세대의 소시민에게도 아프게 다가온다.


2. 해방 공간에서의 정치,사회, 문화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라는 것이 진실여부를 떠나, 사실 자체 조차도 모르고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마치 긴 징검다리 처럼 띄엄띄엄 알게되는 단편적인 조각들로 연속선상의 시간과 공간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부터가 무리일 수도 있겠다. 아무튼 해방정국의 역사 역시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몇몇 단상들을 떠올려 보면 원자폭탄, 히로히토의 패전선언, 모스크바 3상회의, 반탁운동, 대한민국 건국, 총선거, 6.25 ........ 또 뭐가 있을까.


1945년 8월 15일 남산 국기게양대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장면. 정부 자료 사진
총독부 광장의 게양대에서 일장기가 내려지고 있다.(1945년 9월9일)


(1) 의식수준 - 대단한 식견과 인식


가장 먼저 부딪힌 충격(?)은 이 당시를 살아가던 사람들이 결코 지금의 식견과 생활양식에 뒤지지 않은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박헌영의 '조선인민에게 드림'의 내용 면면을 들여다 보면 세계 전반을 아우르는 정보와 자료에서 부터 옳고 그르건 간에 그가 내다보고 분석하는 관점과 대상에 일단 놀라고, 다음으로 반세기 이상의 시대를 앞서가는 그(들)의 주장의 진보성에 놀라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1세기를 한참 지나고 있는 지금까지도 '빨갱이'란 관념이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는 점은 실로 심각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그렇듯이 나의 어릴 적의 공산당은 온몸이 빨갛고 덥수룩한 털에 뿔이 달린 빨갱이였고, 꿈에까지 나타나서 진땀나게 만들었었다. '때려잡자 공산당, 무찌르자 공산당'의 구호는 오히려 익숙했다. 나의 첫번째 기억 속의 공산당은 이주하, 김삼룡이었다. TV드라마에서 어느 허름한 대폿집에서 이주하가 붙잡혀 가는 장면이 기억에 남아 있는데, 이를 통해 접한 그들은 극악-악랄하고, 비열하고, 지저분했으며 의리도 정의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저급한 의식은 해방 군정 당시 이승만 정권에 의해 형성되어 박정희를 거치면서 고착화되었으리라 유추해 본다. 둘 다 반공을 국시로 정권을 탈취(?)하고 유지, 강화했기 때문에 더더욱 이를 증명한다.


조국의 해방을 환호하는 서울역 광장과 남대문로 일대의 인파


(2) 생활수준 - 생활과 격차가 없다?


해방 정국을 가로지르는 소설들을 통해 접한 생활상 또한 지금의 모습과 그리 격세한 느낌을 받지 못했다. 흔히 과거시대의 우리 어른들의 삶의 모습은 더럽고 지저분하고 비문명화된 미개의 모습으로 떠올리기 쉬운데, 이들 작품들을 통해 본 삶의 양식은 절대적인 문명발달 수준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결코 앞선 선입견에 대해 생각을 고쳐먹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물론 서울을 중심으로 한 일부 상류층, 지식인층에 제한적으로 적용된 측명이 크겠지만, 전차를 기다리다 택시를 타고, 경양식 집에서 밥을 사먹고,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먹고, 당구치다 전화받고......


가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의아해 했던 것이 있는데, 2,000년 전 서구의 생활양식은 상당히 현대적(?)이고 발달한 문영사회처럼 보이는데 오래된 우리의 것들은 낡고 후진 것 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는 아마도 우리의 것은 촌스럽다(?)고 여기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다만 굳이 달라진 생활상을 고르라면 다소 걷는 장면이 많다는 점이다. 심지어 김구선생의 운구장면을 보기 위해 연남동에서 서울(동대문)운동장으로, 회현-서울역을 거쳐 다시 남산, 명동, 종로를 거쳐 돌아오는 일정도 있다. 이 정도 거리면 현재의 우리네는 렌트라고 해서 다닐텐데...


- 첫번째 사진 : 전남 광주에서의 8.15해방 경축 퍼레이드

- 가운데 사진 : 전남 광양 서국민학교 교정에 모인 군민들

- 마지막 사진 : 1945년 8월16일 전남 광양읍 목성리에서 주민들이 해방을 축하하며 환호하고 있는 모습


3. 박헌영, 이재유, 여운형을 다시 보다


(1) 순수한 민주주의자 - 박헌영

박헌영의 글과 주장을 면면이 살펴보면 (물론 그의 주장과 글이 전적으로 그와 조선공산당의 액면 그대로 진정성을 보장하리라고는 생각치 않지만) 세계 각국의 경제 지표, 정치구조, 언론의 기조, 심지어 영국 런던의 통계자료 등속을 분석, 파악하여 논거에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 고무적이다. 마치 현대의 명철한 석학 혹은 천재(?)를 만나는 느낌이다. 그의 주장은 논리에 입각하고 자료로써 보충된다. 그것을 자신의 정견(혹은 타인의 정견)과 결합시켜 매우 명철하게 분석하고 답을 제시한다.


아쉬운 부분은 국제정세의 판단이다. 그는 급박하게 재편되는 국제정세를 사회민주주의 혹은 인민민주주의 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면서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분석, 전망하고 있다. 동구, 불란서, 영국 등에서의 노동당, 사회당 등의 약진 그리고 미국의 민주당 집권구라파, 소련 등지에서의 변화를 바라보는 그의 시각은 일견 국제정세, 경제, 사회 분야의 분석이 상당히 객관적이고 타당한 논거를 견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계를 지닌 결정적인 약점이 될 것이다.


특히, 1. 미국과 일본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제국주의 국가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반달곰이나 팬더나 곰일 뿐이고, 엘리게이터나 크로커다일이나 악어이기는 마찬가지라는 점을 간과하지는 않았지만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


2. 세계는 이미 소련과 미국 중심의 냉전체제로 이행하고 있으며, 이를 조장하는 세력들이 득세하고 있고, 조선이라는 땅덩어리는 그 태풍의 눈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 점.


3. 그리고 미국 중심의 연합국을 선한 메시아로만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순진하게도 박헌영은 선한 구세주인 연합국, 모스크바 3상회의, 미소공위 등이 조선의 인민을 위해 진정한 선의을 가지고 베풀어 줄것이라고 보았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분석과 주장이 제아무리 타당할 지라도 그것을 일일이 국민들에게 설명하고 이해시켜 수용하도록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선택은 그리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것은 그람시의 표현대로 장기전이어야 하지 않았을까? 물론 해방정국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시간을 두어가며 계몽하고 의식화할 수 있는 정황은 분명히 아니었을 것이겠지만 결과적으로 숨을 고르고 주위를 환기할 필요가 있지 않았나 싶다.


한편의 속좁은 생각으로는 어쩌면 타협이 필요했을 수도 있다고 보아진다. 왜냐하면 조선공산당이 해방시점의 사회구성과 관련 방향을 부르조아 민주주의의 완성 단계로 설정했다는 점은, 그들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표 즉, 사회(인민)민주주의 단계를 거쳐 공산주의 사회까지 바라보고 있지 않았을까란 예측을 조심스럽게 해본다면 부르조아 민주주의 단계의 설정은 타협일 수 있기 때문이다. 부르조아 민주주의 단계의 설정이 더이상 양보할 수 없는 최후의 보루라고 하더라도 혹은 이 단계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다음 단계로 이행할 수 있는가의 문제로 인해 거치지 않으면 안될 필연적인 단계로 설정하였다고 하더라도, 결국 설정한 목표가 부르조아 민주주의였다면 그것의 성취를 위해서라도 타협점을 찾았어야 했다고 보여진다. 때문에 자신감과 적확한 정세판단이 수반되었어야 하는 안타까움이 드는 것이다.


무엇이 어떻다고하더라고 박헌영이 진정한 민주주의의 전도사로의 의미와 열정이 빛나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2) 헌신적인 공산주의자 - 이재유

일단 이재유의 삶과 투쟁의 역사를 보면서 안일하게 현실에 안주하고 있는 자신을 되돌아 보게 되었다. 꼭 정치적 의미가 아니라 시대상황과 공조된 부분도 있겠지만 삶을 맞이하는 그의 자세가 너무 아름다웠고 또 한편으로 안타까왔다. 이 글을 시작한 출발점은 분명 이재유였다. 30년대 사회주의 운동의 신화적 존재였던 이재유에 대한 자세한 소개는 네이버 블로그 "[인물탐구] 경성트로이카 - 이재유"에서 별도 소개하였습니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풀려 나와 만세를 외치는 출옥 애국인사들과 이를 환영하는 시민들(1945년 8월15일)


(3) 실패한 현실주의자 - 여운형

몽양 여운형을 이 자리에 위치 짓는 것이 타당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승만을 위시한 친일, 반민족 집단과는 어울리지 않고 또 그렇다고 순진한 척 민족주의만으로 호소하던 김구를 비롯한 임정파와도 어울리지 않아, 국내에서 현실과 싸워가며 인민민주주의적 관점으로 재편을 시도한 측면을 감안하여 이 그룹에 포함하였다. 그는 왜 실패하였을까? 물론 예상치 못한 테러에 희생되면서 대한민국의 운도 거기까지 였던 것이겠지만.


45년8월16일 휘문고 교정에서 연설하기에 앞서 시민들의 환영을 받고 있는 몽양(앞쪽 가운데)
몽양 여운형(呂運亨) 1945년8월16일 해방직후 휘문고보 교정에서 연설하는 몽양
몽양 여운형(呂運亨) 1945년8월16일 해방직후 휘문고보 교정에서 연설하는 몽양


4. 김구, 이승만을 다시 보다


(1) 순진한 민족주의자 - 김구

김구선생은 나의 원적과 같은 황해도 은율 출신이다. 지연을 따진다기 보다는 아무래도 그 사실을 알게되었을 때 다른 인물들 보다 더욱 관심이 끌리는 것은 인지상정일 것이었다. 더욱이 일반적으로 민족의 지도자로 추앙받는 그였고, 문지기론과 같은 그의 순진한 메타포들은 어린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임정수석 출신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해방후에는 민족의 통일을 위해 문지기가 되어서라도 지키겠다며 고군분투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만큼 조국과 민족에 대한 그의 열정과 충성은 의심할 여지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그는 너무 순진했다.


- 첫번째 사진 : 조국으로 돌아온 임정요인들 - 왼쪽 세번째가 법무위원이었던 이시영, 다음이 주석 김구,

부주석 김규식, 외무부장 조소앙, 내무부장 신익희 순

- 두번째 사진 : 광복을 맞은 임시정부의 김구주석이 감격어린 표정으로 귀국, 동포의 뜨거운 영접을 받았다

- 세번째 사진 :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중경을 떠나는 김구일행. 왼쪽으로부터 이청천장군.

안미생(김구선생의 자부) 김구, 그리고 그뒤에 윤경빈

- 네번째 사진 : 임정귀국 축하 시가행진

- 다섯번째 사진 : 임시 정부 귀국 환영 꽃전차


(2) 비열한 자유주의자(?) - 이승만

이명박 정부는 광복 63주년을 건국 60년으로 바꿔부르고 있다. 이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는다하여 국가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반국가적인 가치로 매도하고 있다. 백보 양보하여 누가 대한민국을 부정하는가? 이승만 정권에 의해 난도질 당한 채 건국된 것이 온 국민이 바라고 기다리면서 싸워온 조국의 광복을 기리는 가치가 더욱 크가는 것인가? 그렇다면 누구의 대한민국인가?


이승만의 행적은 미국 본토, 하와이 등에서 육성 증언 등의 자료로 이미 남아있다. 그가 얼마만큼 권력과 사욕에 집착했는지를 알 수 있는 자료들이다. 이승만은 이미 1920년대 부터 조선은 미국의 52번째(?) 주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사람이었다. 임정 초대 주석이기도 했지만 그 임정에서도 쫓겨난 채 40년 가까이 미국 등 해외에서 시간을 보냈고 그동안도 권력지향적인 행보를 위해 독립운동 자금의 개인적 유용, 이민동포간 갈등조장 등 숱한 문제의 중심에 있었다.


이승만이 이룬 성과(잘했다거나 못했다는 평가가 아닌)라면 비록 반쪽일 망정(지금까지도 반쪽이라고 생각치 않는 넘들도 있는 모양이지만)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제멋대로 건국했다는 정도일 뿐이다. 결과론적으로 냉전의 최전방이 되었지만, 아직까지도 가시지 않은 이 땅의 이데올로기 지향적인 기반을 뿌리깊게 심어놓은 장본이이라고 생각한다.


5. 2009년 오늘의 작태를 다시 보다


이 시대를 접하면서 무엇보다도 가슴이 답답했던 것은 이때의 과오들이 지금도 여전히 그 전철을 밟고 있다는 것이었다.

해방후 국민학교 첫개교 - 방 약 한달 뒤인 1945년 9월24일 전국에서 국민학교 교육이 일제히 시작되어빼앗겼던 우리말 우리글을 가르치는 감격을 맛보았다. 사진은 첫 수업
해방 직후의 시골 국민학교 교실 - 진흙 화로 둘레에 배치한 간이 책상에 옹기종이 모여앉아진지한 얼굴로 되찾은 우리 글을 익히고 있다. 사진은 강원도의 한 산골
해방경축 종합경기대회 - 1945년 10월27일에 열린 이 대회는 해방후의 첫 전국체전으로 극기를 든 손기정씨가 감격에 벅차 눈물을 닦고 있다.
해안경비대의 해방경축행진 - 설 당시 3백명에 불과했던 경비대가 대원 1000여명의 해안경비대로 발전,해방1주년 경축행진을 벌이고 있는 모습이다.(1946년 8월15일)
무조건 항복한다는 일왕의 육성방송을 듣고 있는 서울의 일본인들
조선총독이 주한미군사령관에게 항복한 직후인 1945년 9월9일 오후 철수하고 있는 일본군


[후략]


나름대로 깊은 사유를 가지고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생업에 휘둘리다 보니 생각은 날아가고 열의도 메말라버려 미완으로 맺고 마네요. ㅜㅜ;

* 사진은 도깨비뉴스에서 퍼왔습니다.


2009.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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