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영] 아라리 난장, 그리고 객주를 읽고
나는 중고책을 선호한다. 책이면 내용이 중요하지 굳이 새책을 사야 할 필요가 없다는 까닭이기도 하지만 어쩐지 옛날 책은 옛날 책으로 보고 싶기 때문이다. 김주영의 소설을 처음 접한 것도 부끄럽게도 지난해 헌책으로 구입한 '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였다. 심지어 어쩐 일인지 아무런 연관성을 떠올릴 수 없는 이병주와 헷갈리면서 손에 잡힌 책이었다. (더욱이 이 책의 제목을 접했을 때 이문구의 '내 몸은 너무 오래 서있거나 걸어왔다'와 겹쳐지기도 했다.)
누가 봐도 자전적 경험 요소가 배어 있는 이 작품을 통해서 익히 이름만은 들어봤던 김주영이란 작가를 상상하게 되었다. '객주' 서문에서 김주영은 스스로 나고 자란 곳이 장바닥이고 그래서 장바닥에 익숙하다고 했다. 비록 '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에서는 장터 앞에 살았다는 배경적 설정이 있을 뿐 장똘뱅이의 삶이 중심은 아니지만, 그 현장의 익숙함이 절절이 묻어 나온 얘기 거리들이 바로 9권짜리 '객주'로 풀어진다.
가만히 보면 나의 독서 편력 중에 하나는 어떤 대상에 꽂히면 연거푸 그 길로 빠져버린다는 데 있다. 그리하여 곧바로 '객주' 전권을 역시 중고서적으로 구입하자마자 손에 침을 묻히며 읽었다. '객주'에 대한 소회는 본 블로그 포스트에도 2번(1번은 유관 사진 모음 포스트)이나 올려져 있지만, 짧은 언급일 뿐이고, 9권짜리 객주는 보는 내내 너무나 많은 생각이 교차되는 소설이어서 감히 포스트에 남길 바를 찾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리하여 이 글은 분명 '아라리 난장'에 대한 소회를 밝히는 글이지만 아마도 김주영을 얘기하려면 '객주'를 비껴갈 수 없겠기에 함께 버무려 풀어보려 한다.
그전에 일단 번외로 아라리 난장에서 얻을 수 있었던 의도치 않은 성과라면 이동순이란 시인을 훔쳐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 소설에서 이동순의 시는 두 편이 등장한다. 정말 행상꾼이 좌판 앞에다 이런 시구를 걸어놓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려나. 시를 보고 "아! 이거 시구나"라고 느낄 수 있는 시가 도대체 몇 펀이나 될까 싶지만, '장날'이란 시는 너무나 리얼하고 순박한 모습 그대로를 억지스럽지 않게 보여 주고 들려주고 있다. 그 이미지를 느끼다가 문득 마치 내가 그의 장터 한 복판에 놓여 있다는 느낌이 들면서 '아! 이거 시구나"라고 탄성을 질렀다.
장날
이동순
물건을 팔러 온 장돌뱅이가
물건을 사기도 하는 시골 장날
고추 팔러 온 사람이 실타래를 흥정하고
참기름 짜러 온 사람이 강아지를 파는 동안
악다구니로 보채던 어린것은
어미 등에 업히어 한껏 잠이 달다
신새벽 해 돋기 전부터 몰려와서
젖은 장바닥에 들끓는 삶의 거래
머리에 수건 한 장을 둘러쓰고
결 고운 인심을 주고받는 아낙네들
수염이 허연 영감이 한복을 차려 입고
점잖게 붓 벼루 팔고 있는 시장 골목
묶여서도 싱싱한 배추들의 생기와
강엿 가루 반짝이는 목판을 지나오면
한 손에 굵은 소금을 담뿍 움키고
생선에다 기운차게 뿌리는 어물전 곰보
해 지고 장 보는 이도 발길 뜸한데
뚱뚱한 돼지집 여편네의 손목을 잡고
거나하게 저물어 가는 가을 주막
내일도 붐비는 타관의 장터로 찾아가서
맑은 봇짐 끌러놓을 장돌뱅이가
꿈에서도 콧노래 흥얼거리는 시골 장날
(1) 삶의 역동성에 대한 예찬
김주영의 이야기들은 다이나믹하다. 소재가 장돌뱅이란 특징도 있지만, 그들의 얘기를 엮어 가는 방식과 능력에 있어서의 역동성은 마치 험난한 파도를 넘나드는 배를 타고 있는 느낌이 들 정도라 할 수 있다. 결국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 주변의 군상들의 이야기가 생동감 넘치게 전개된다.
그리고 이러한 전장과 같이 다이나믹한 삶의 재료들은 읽는 이로 하여금 정서적으로 다양한 국면을 경험하게 만든다. 워낙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다양한 삶의 저변을 다루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그의 소설은 다소의 비약과 부침으로 맥이 끊어지거나 간간이 앞뒤 없이 흐름을 뛰어넘는 경우가 발생한다. 하지만 그러한 흠이 종종 드러난다 하더라도 그의 소설이 지닌 버라이어티 한 특성이 부여하는 다양한 정서적 경험을 덮을 만큼은 되지 못한다.
또한 슬쩍 지나치는 작은 해프닝에 불과한 듯한 에피소드가 꼬이고 꼬여 종국엔 크나큰 파국으로 몰려가는 고구마 줄기나 실타래처럼 이야기를 끌고 가는 방식은 김주영의 소설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형식이다. 그로 인해 도대체 느긋하고 안정된 흐름으로 읽어 나갈 수가 없다. 그래서 난데없이 어떤 새로운 에피소드가 등장할 때쯤이면 가늠할 수 없는 수많은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서 다음 장을 넘길 수밖에 없게 된다. 이번엔 이놈이 배신을 하는 걸까? 이 여자는 또 어떻게 꼬여 누구의 발목을 붙잡게 될까? 얘는 이렇게 죽고 마는 걸까?
(2) 추론 금물
그런 면에서 김주영의 작품들은 글을 읽어 가면서 추리를 하게 만든다. 사실 '추리'라고 하기보다는 추론에 가까울 터이다. 작품에서 지금까지 작가에 의해 주어진 소스를 토대로 했을 때 도대체 이 사람들의 팔자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예측해 보게 만드는 묘한 힘을 보여 준다. 이 대목에서 길소개는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 배신을 할 것인가 아닌가. 승희는 돌아올 것인가? 태호가 벌이는 밀무역의 끝은 어디일까? 너무나도 파란만장하게 변하는 순간순간이 정말 이렇게도 인생이 부침이 많을 수 있을까 싶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너무나 지나치다 싶어 짜증이 날 때도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적어도 '객주'와 '아라리 난장'에서는 앞부분을 읽으면서 대미를 추정하지 말란 얘기를 하고 싶다. 읽어 나가는 동안에 물론 대미를 염탐할 여지조차 내어 주지 않고 파란만장, 변화무쌍하게 틀어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결국엔 여하한 추론도 깨어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아직 읽지 않은 분들을 위해 결말의 정체는 남겨 두더라도 대미의 모습은 어찌 되었건 처음의 예측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을 수 있음을 밝혀두는 바이다.
(3) 촘촘한 고증과 수사적 표현의 보고
김주영의 이야기들은 다이나믹하고 스릴과 힘이 느껴질 뿐 아니라 아니러니 하게도 매우 섬세하다. 고증이란 측면에서도 그렇다. 일반적으로 고증이라 함은 배경, 장소, 복장, 탈것, 먹을 것..뭐 그런 종류의 것들이라 여겨질 것이다. 김주영의 글들은 보고 있노라면 마치 그 시절에 그가 살며 관찰한 것을 기록한 듯이 여겨질 정도로 자세하고 구체적이다. 물론 고증이나 채증에 의한 내용들이 작가의 상상력과 작품의 구성에 얽매이다 보니 더러는 겉돌거나 현실성을 심하게 잃는 경우도 있어 보이지만, 전체를 놓고 얘기하자면 일단 용서가 된다. 사실 역사소설, 대하소설 등을 집필하는 작가라면 아니, 작가라면 적어도 고증과 현실에 바탕을 두고 준비하고 풀어가는 것 정도는 기본이리라 여겨진다. 따라서 이러한 류의 고증은 작가라면 어쩌면 당연한 것을 일컬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김주영의 작품들을 보고 있노라면 또 다른 고증의 영역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말에 대한 고증이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사투리, 우리말, 사자성어 들에 있어서도 탁월하지만 수사적 표현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것 같다. '객주'의 경우만 하더라도 우리말임에도 불구하고 주석에 의존하지 않고는 단 한 페이지도 수이 넘어갈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질펀한 표현들이 등장한다. 이 한 문장을 표현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말들을 수집하고 귀 기울이고 가다듬고 닦아 냈을까란 생각에 미치면 고개가 절로 숙여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객주'라면 어차피 시대적 배경이 그러하니 노력의 산물이라고 치부할 수 있겠으나, '아라리 난장'의 경우는 현대를 배경으로 현대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얘기임에도 불구하고 그 수사적 표현의 대단함에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객주라는 빼어낼 수 있는 엄청난 전작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되어지기는 하지만. '아라리 난장'에서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잠자던 입네다 콩까리 집어넣는다카디 분위기도 안 잡고 불쑥 꺼내는 말을 나는 목이 메어서 삼킬 수가 없네요."
"옛말에 입은 가로 찢어져도 침은 똑바로 뱉으라 했어요."
"눈먼 똥개가 씨암탉만 물어 죽인다더니 그 말 맞다."
"날아가는 놈 위에 업혀가는 재간이 있는 어부들이라도 게를 잡을 수 없었다."
"잡초에도 이름은 있고 철부지에게도 몫이 있는 법이라지만 그게 손쉬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청자접시에 보리개떡을 담는 꼴이 되었다 하더라도 또다른 사내를 곧장 물색하고 나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서까래를 치면 기둥이 울게 마련이었다."
"조리대 아래 쪼그리고 앉아 잠시 꽁초를 태우고 있던 심시는 뱀 만난 여치처럼 놀라 발딱 일어서더니 쏜살같이 밖으로 내달았다."
"대뜸 반말지거리로 쓸데없는 것을 사왔다며 바짓가랑이 물어뜯은 개 꾸짖듯 심통 부리며 혼돌림을 시켰다."
"그런 것들을 한데 모아서 섭산적 될 때까지 절구질해 주는 데는 없나."
"하찮은 똥도 바우기라는 사촌이 있잖나. 그런데 나는 인척간을 들춘다카면 똥보다 못한 혈혈단신이잖나."
"미안하이. 하지만 늘상 보아온 범은 못그려도 안 본 용은 그린다 했어."
'넘겨짚다가 팔 부러뜨리지 말고 묻는 말에 대꾸나 하세요.'
'척하면 담장 너머 호박 떨어지는 소리로 알듯, 말귀 잘 알아듯는 변씨도 문득 내뱉은 그 한마디의 의미심장함을 알아채지 못했다.'
'아주머니 사타구니는 덮어줘도 욕을 먹는다는 세상인데, 동기간의 치부를 덮어주기는 커녕 헤작이고 들춰내지 못해 안달이었다'
(4) 현실인식
김주영의 작품들은 분명 현실의 토대 위에 서있다. 하지만 김주영은 작자의 입으로 그것을 떠벌이지 않는다. 모든 현실은 철저하게 등장인물의 입에서 발설된다. 그런 것들은 일상에 투영된 삶의 애환을 표출하는 과정을 통해 표현되지만, 한편으로는 신문의 사설이나 연사의 대중 연설처럼 사설조이며 논증적일 때도 많다. 예컨대 에프킬라(아이엠에프) 시대를 견뎌내는 밑바닥 인생에 대한 고찰, 한일어협협정으로 파생하는 직간접적인 피해와 좌절 등이 그렇다. 누구처럼 보일 듯 말 듯, 알 듯 말 듯 둘러대는 법 없는 이런 모습에서 작자의 현실인식이 어디에 닿아 있는지 알 수 있는 중요한 리트머스 시험지가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배운 것 없고 신문 글 한 번 읽어 본 적 없어 보이는 작중인물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이런 구문이 현실적으로 가당키나 할까 라는 의구심을 들게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작가가 작중인물의 입을 빌어 자기 얘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다 명증적으로 드러낸다. 하지만 아무련 어쩌겠는가 진정으로 우리는 그런 현실에 살고 있는 것을.
영동식당에서 오징어잡이 어부들과 나누는 변 씨의 얘기를 들어보자.
"서울의 달동네에서도 폐가가 속출하고 있다는 것이여. 달동네 사는 사란들 모두가 하루 벌어서 하루 사는 막판 노동자들인데, 이 사람들이 맨 먼저 실직을 당하고 보니까, 남편은 남편대로 계집은 계집대로 어린 새끼는 새끼대로 뿔뿔이 흩어져 풍비박산돼서, 밤이 되면 사람 없는 텅 빈 집 마당에 달만 훤하게 비춘다는 게여. 바닷가에 달 뜨면 강강수월래나 추지, 달동네에 달뜨면 배만 고파. 그 와중에 좆된 것은 한국의 남편들뿐이여. 진작부터 간도 쓸개도 다 내놓고 돈 버는 기계로 나섰지만, 이젠 그 기계조차 쓸모없는 것이 돼버렸어, 가진 놈들 착취에 휘둘리고 희생에 무너지기도 했지만, 남편들의 역사에서 지아비로서의 권위를 인정받아 본 적은 없었지. 그래도 가정이란 울타리를 지켜가려고 충성 봉사해 왔지만, 지금 와서 남은 건 좌절과 절망뿐이지 않나. 서울역 광장에 나가서 뭔가를 기웃거리다가 자선단체에서 내놓은 라면 한 그릇으로 허기를 달래고 있는 개똥 같은 신세들이 돼버렸어." [1권 p162-p163]
(5) 한국적 에로티시즘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나는 이 두 권의 책을 주로 퇴근길에 지하철과 버스에서 읽었다. 그런데 어떤 대목에 이르러서는 도저히 책을 펼쳐 놓고 읽을 수가 없는 경우가 발생한다. 또 종종 집에서 보고 있노라면 초등학교 다니는 딸아이가 궁금해하며 펼쳐진 대목을 따라 눈길을 주는 경우에도 책을 덮어야만 했다. 사람이 사는 게 어차피 다 그렇고 그런 것이긴 하지만, 그의 성적 표현들은 어찌 표현해야 할까? 궁극의 에로티시즘. 그래 이 정도의 표현은 되어줘야 할 것 같다.
그리고 한 가지, 그의 에로티시즘에는 어쩐 일인지 달빛 머금은 하얀 밤이 매치된다. 소설 속에서 몇 번인가 등장하기도 하지만 학창 시절 3류 극장 동시상영으로 보았던 한국적 에로티시즘 영화의 영향이 아닐까도 생각해 본다. 어딘지 모르게 그 끝에 닿아 있다는 느낌이 드는 건 아마도 나 혼자만의 경우일 것이다.
하지만 에로티시즘이란 세속적이고 감각적인 포장보다, 그 속에 감추어진 우리네 사람들의 내면이 들여다 보일 때 더욱 애절하고 따뜻하고 미소 짓곤 하게 된다. 봉환의 트럭을 타고 주문진에 처음 도착한 한창범이 영동식당에서 승희를 처음 만나는 장면이다.
'방문이 열리고 딱히 특징을 찾아볼 수 없는 평범한 얼굴의 삼십 대 초반의 여자가 곧장 가게로 내려섰다. 그녀는 힐끔 창범을 일별한 뒤 봉환과 눈짓으로 수인사를 나누었다. 무엇을 주문하겠는냐고 묻지도 않는 것으로 보아, 봉환의 말대로 단골 식당임에 틀림없었다. 그녀가 묻지도 않았는데, 봉환은 오늘은 물때가 좋지 않았다고 볼멘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녀는 웃기만 할 뿐 이렇다 할 대꾸는 없었다. 그녀가 찌갯거리를 도마질하기 시작할 무렵, 봉환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1권 p23]
이제 한창범에게 마음을 여는 승희의 모습을 통해 어느 시절,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는 일이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봉환까지 자리를 비운 빈방에 승희는 혼자 앉아 있었다. 네 남자가 남기고 떠난 네 개의 빈 방석을 그녀는 오랫동안 내려다보며 앉아 있었다. 난전에서 팔고 있는 값싼 양은그릇들과 술잔들이 콧등이 시큰한 알코올 냄새를 풍기면서 술상 위에 뒹굴고 있었고, 그 아래로는 담배꽁초가 수북하게 쌓인 접시들이 놓여 있었다. 그런 방만하고 난잡한 방안의 풍경들이 새삼스럽게 시야로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느껴지는 슬픔의 정체를 승희는 가만가만 반추하면서 뒤쫓고 있었다. 그러나 그 슬픔의 자락들은 햇살에 쫓긴 안개처럼 금방 희미하게 사그라들고 말았다. 이런 경우를 두고 슬픔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던 당초의 생각이 훼손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어째서 만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한창범이란 사람을 가슴에 새겨두었다가 연락 오기 바쁘게 진고개까지 달려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알 수 없다는 것에 바로 소중한 무게가 담겨 있는 것이 아닐까. 알 수 없는 것은 알 수 없는 대로 간직하는 것이 좋을지도 몰랐다.' [1권 p84]
천하의 천둥벌거숭이로 살아온 봉환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는 우리의 내면이 있다.
'어떤 사내들은 그 말을 하루에도 몇 번씩 일같잖게 펑펑 쏟아낸다지만, 봉환에게는 손쉽지 않았다. 사랑이란 말에는 혓바닥에 턱턱 걸리는 생선가지 같은 것이 있었고, 고구마를 먹을 때처럼 퍽퍽한 목멤이 있었다. 자신에게 시큰둥했던 여자라도 당장에 매료시켜 버리는 마력을 갖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 단어는, 가치개념이 뚜렷하게 다가오지 않거나 애당초 두려운 말이기도 했다. 마음속으로는 사랑하고 있다는 명징한 확신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 단순한 언어가 가진 두려움의 정체만은 떨쳐버릴 수 없었다. 은실이 사랑하고 있느냐고 채근하면 할수록 그 말이 지닌 의구심과 두려움이 먼저 그의 가슴을 채워버려 발설을 거의 완전무결하게 방해해 버리는 것이었다. 그 두려움의 정체는 자신의 삶의 부박함에 원인이 있는 것도 같고, 진실해야 한다는 심리적인 억압과 숙연함에 짓눌려 있는 탓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결혼 첫날밤에는 할 수 없었던 그 말을 이틀 후 인천으로 떠나던 날 새벽에야 가까스로 발설할 수 있었다.' [3권 p27]
4. 김주영 式 얘기들의 내면적 특징
섣부른 감은 있되 세 편 정도 보니 김주영 작품의 공통점 같은 것을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 솔직히 그것을 무엇이라 단언하거나 지칭하기 힘든 부분이어서 '객주' 포스트에서도 좌절했던 것인데, '아라리 난장'에서 그 힌트를 얻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작품 속에서 그가 얘기한 바, 아우라지가 그것이다.
(1) 아우라지 술집
난 마트에 가는 것보다 아이들 손잡고 시장골목 다니기를 좋아한다. 여행 중에 장이 있으면 꼭 들어보고자 하고, 해외여행을 가서도 장이 서는 동네 뒷골목은 필수 코스처럼 여기곤 한다. 지난해 가을에 아이들을 데리고 정선에 들렀을 때도 정선 5일장에 들렀다. (정선 5일장은 워낙 관광코스로 소문을 내놓아서 씁쓸하긴 했지만) 물론 목적지는 5일장이 아니라 아우라지였다. 아우라지가 무엇이던가. 강원도 두메산골 정선 끝자락에 송천과 골지천 아우라져서 흐른다 하여 아우라지라는데, 그런데 느닷없이 웬 아우라지일까? 일단 '아라리난장'의 본문에서도 아우라지가 등장하고, 심지어 이동순의 아우라지 술집이라는 시까지 인용된다.
아우라지 술집
이동순
그해 여름
아우라지 술집 토방에서 우리는 경월소주를 마셨다.
구운 피라미를 씹으며 내다보는 창 밖에
종일 장맛비는 내리고
깜깜한 어둠에 잠긴 조양강에서
남북 물줄기들이 서로 어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염이 생선가시같이 억센 뱃사공 영감의 구성진 정선 아라리를 들으며
우리는 물길 따라 무수히 흘러간 그의 고단한 생애를 되살리고 있었다.
- 사발 그릇 깨어지면 두셋 쪽이 나지만
- 삼팔선 깨어지면 한 덩이로 뭉치지요
한순간 노랫소리가 아주 고요히
강나루 쪽으로 반짝이며 떠가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흐릿한 십 촉 전등 아래 깊어 가는 밤
쓴 소주에 취한 눈 반쯤 감으면
물 아우라지고
사랑 아우라지고
우리나라도 얼떨결에 아우라져 버리는
강원도 여랑 땅 아우라지 술집
이제부터 왜 내가 아우라지를 떠올렸는지에 대해 풀어 보자. 김주영의 얘기들은 느닷없는 어떤 시점의 한 점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 점은 어떤 동선을 가지고 끝없이 이동하는데, 그러한 이동의 궤적은 마치 지도 위에 작전을 짜듯 선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이 점은 움직이면서 수많은 인물 그리고 사연을 만나고 또 어떤 지점에서 만난 누군가와는 마치 윷놀이의 말을 업어서 놀듯 작반 하기도 한다. 당연히 하나일 때 보다 둘일 때 발생하는 사건의 경우의 수는 배가하기 마련, 바람 잘 날 없는 나뭇가지 마냥 오만가지 이벤트가 발생한다. 게다가 이들 무리의 수는 고착된 적이 없다. 무리가 되었다고 해서 이들이 항상 함께 하면서 동고동락하지 않고 패를 나누어 처신한다. 마치 모였다 흩어졌다를 반복하는 새떼들처럼.
그런데 문제는 하나인 줄 알았던 그 점이 하나둘씩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여기저기서 각자의 점을 지니고 물줄기처럼 흘러 오고 있다는 점이다. 이 물줄기들은 어떤 것은 작게 졸졸거리며 흘러 오고 있고, 어떤 물줄기는 거침없는 폭포수처럼 흐르기도 한다. 이들 역시 새끼줄 꼬이듯이 흐르다 만나고 만났다 흩어지기를 거듭하면서 다른 무리의 새떼를 이루고 흐른다.
일반적으로 등장인물이 아무리 수백 명을 헤아리는 십여 권짜리 대하소설이라 하더라도 이야기가 전개되는 흐름은 대략 하나의 방향으로 안정적으로 펼쳐진다. 아무리 여러 갈래 가지를 치고 해프닝이 발생한다 해도 전반적으로 줄기가 있고 모든 이야기들은 이를 중심에 놓고 풀어지기 마련이다. 김주영의 소설 역시 그러한 점은 다르지 않지만 각각의 해프닝이 해프닝으로 끝내고 다시 본류로 돌아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해프닝들이 본류만큼의 무게중심을 지니고 오히려 본류를 흐트러뜨리기까지 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의 고산준령에서 각각의 봉우리들이 각자가 주인이라 아우성치는 듯하다고나 할까.
그런데 원인은 다름 아니라 작가의 서문에서 찾을 수 있었다. 김주영은 객주 서문에서 주인공이 없는 소설이라고 했다. 물론 주인공은 있다. 객주의 천봉삼이나 아라리 난장의 한창범 등이 그들일 것이다. 하지만 무게중심이 꼭 그들에게만 있지 않고 여러 캐릭터들이 주인공 행세를 할 만큼 할애되는 얘깃거리와 비중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자연스레 얘기가 복잡해질 수밖에.
태백준령을 구비구비 돌아 수많은 지천을 아우르며 각자의 시간과 사연을 안고 먼 길을 달려온 두 개의 강이 만나 아우라지를 이루듯 김주영의 소설엔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살아가는 모습, 좌절, 희망, 웃음들이 버무려 하나의 큰 내를 이루는 바로 그 지점에 놓여 있다고 보여진다. 그 난장 같은 그 지점, 그 아우라지 합수점이 객주이자 아라리 난장인 것이다. 다만, 아우라지에 빗대기에 어울리지 않는다 싶은 부분은 아우라지는 그렇게 흘러 조양강, 동강, 남한강의 큰 줄기를 이루며 마침내 한강이 되어 바다로 흐르지만 김주영의 아우라지 인생은 그 지점은 그 지점일 뿐 그로부터 다시 숱한 굴곡과 부침의 인생이 펼쳐질 것이란 사실을 예측하기 어렵지 않다는 점이다. 이렇게 본다면 아우라지란 표현은 작가의 의도에 반(反)하는 빗댐일지도 모르겠다.
(2) 의지의 한계선 밖에 존재하는 운명이 삶을 지배한다.
'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도 별반 다르지 않지만 굳이 이 작품은 차치하더라도 적어도 '아라리 난장'과 '객주' 등에서 보이는 김주영의 작품에는 '운명'이란 타자적(他者的) 존재의 강력한 물리력을 실감하게 한다. 그의 작품에서 개개인이 운명과 맞닥뜨린 순간은 너무도 명료하고 단언적이다. 예상할 수 없었던 일상의 반전 즉, 배신, 일탈, 좌절, 죽음 등이 등장하는 순간순간에는 너무 숨이 차올라 읽는 내내 그것에 갑갑해하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한다. 물론 반대로 그 숨이 트이고 한숨을 놓으면서 미소 짓는 경우도 있다.
어쨌거나 누군가 무엇인가가 마치 토끼몰이를 하는 듯한 현실과 사람들. 그 속에서 우연인 듯 포장되기도 하고 팔자처럼 체념으로 받아들여지는 그 모든 끄나풀들은 마치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거나 아니면 그렇게 되도록 강제된다는 것처럼 보인다. 읽는 사람은 놀라면서도 이렇게 되면 안 되는데 라며 연민하지만 그것을 제거할 수는 없다. 이것은 한 발 물러나서 바라보자면 아마도 운명이라고 얘기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운명이란 거미줄에 매달린 인생. 운명이 행사하는 물리력에 대항도 해보고 발버둥도 쳐보지만 궁극엔 그 품 안에서 생멸하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솔직히 김주영의 소설을 읽는 내내 느낀 감정을 단 한 단어로 표현하라면 '안타까움'이다. 어쩌면 작가는 운명이 행사하는 물리력의 간극의 폭을 의도적으로 키워(심지어 개연성까지 희석시켜 가면서 까지 무리하게 전개되는 경우도 있으니) 수용자의 체감 강도를 높이도록 의도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보다도 읽는 내내 등장인물들은 김주영의 그러한 꼬임수를 모르고 당하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했다. 그런데 '아라리 난장'을 통해 그들도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편과 자식을 버리고 집 나갔다가 몇 년 만에 나타난 배말자 씨의 사기극에 걸려 폭행까지 휘두르는 바람에 수배자 신세가 되어 버린 변 씨의 사정을 들은 승희가 뱉은 말이다.
"다 지은 밥에 재 뿌린다더니 하필이면 왜 이런 시기에 그런 일이 벌어지죠? 나를 포함해서 내 주변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모두 왜 이렇지요? 사소한 것 한 가지도 순탄하게 풀어지면 어디가 덧나는 사람들처럼 계획하고 바라는 일마다 꽈배기처럼 꼬이고 또 고이네요." [2권 p114]
(중략)
"걱정 말아요. 우리들 팔자라는 게 꼬이지 않으면 더 큰 파도를 만날까 불안하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피하지 말아야 해요. 정면으로 맞서면 오히려 쉽게 해결될 수도 있을지 모르죠." [2권 p114-p115]
또한, 작가는 은혜, 은실 자매의 모습을 통해 끊을래야 끊을 수도 없고 피해 갈 수도 없는 혈육에 대한 운명도 명쾌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러나 혈육이란 개꼬리에 묻은 똥처럼 수치스럽더라도 어쩔 수 없이 끌어안고 살아야 하는 운명적인 관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털어내려고 고개를 돌리면 꼬리는 저만치 멀어져 가듯, 혈육간의 관계란 의지의 한계선 밖에 존재하는 촉수엄금의 불가사의였다.' [3권 p85]
대미를 향해가면서 창범으로부터 달아나려 했던 승희의 일탈이 감옥에 있는 변 씨로 말미암아 창범과 그의 짝패들에게 되돌아오게 되는 과정을 그리면서도 작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람의 운명이란 그처럼 덧없는 것이면서도 낯설거나 낯익은 이웃들과 실타래처럼 엉켜 있다는 것을 그녀는 섬뜩하게 터득하고 있었다.' [3권 p308]
(3) 그리고 그것은 비록 먼 길을 돌지만 결국 사람(의지)에 의해 극복되어진다.
앞서 승희의 대사를 통해 언급했듯이 작가는 위압적이고 느닷없고 불공평해 보이는 운명이란 놈에게 은근히 짜를 놓고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것의 불리함을 무릅쓰고라도 그것을 극복하고야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설에서는 대부분 주요 인물의 죽음 등을 통해서 그것은 지난한 과정이며 다소의 희생이 따른다는 점도 명확히 하고 있다. 하지만 운명을 개척하는 사람들, 굳은 의지와 더러는 자유의지로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는 사람들과 함께 종국에는 세상을 바꾸지는 못해도 적어도 썩은 세상의 부분이 되지는 않는 사람들의 작은 공동체의 결말을 보여준다.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작거나 크거나 감당하기 힘든 삶의 여정 속에서 그들은 분노하기도 하고, 통곡하기도 하지만 그들은 둘러싸고 있는 아우라의 빛깔은 항상 삶을 받아들이며 웃고 즐긴다는 점이다. 밟으면 밟을수록 파래지는 잡초처럼, 작가는 답청(踏靑)의 아프고 쓰라린 모습들을 그려내지만, 마치 자신들의 삶의 결말을 즐기는 사람들처럼.
(4) 사람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시간과 과정의 총체를 우리는 역사라고 부른다.
개인사적으로 얘기했을 때 그것은 운명 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작가는 비록 역사니 운명이니 하는 거북한 담론을 얘기하지 않지만 이를 총체적인 관점으로 확대시켜 본다면 거대한 역사의 물줄기였음을 알아채기 어렵지 않다. 김주영은 그 소설 곳곳에 현실 세계에 대한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상황을 언급한다. 주변 정세와 당면한 사회적 국가적 이슈들이 곳곳에 스며있다. '객주'의 경우 후반으로 치달으면서부터는 정치적인 이슈가 오히려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이슈와 관전평(?)들이 모두 아래 것들의 시각에서 드러난다는 점이다. 원체 등장인물들이 밑바닥에서 굴러먹는 백성들이다 보니 그들의 눈과 입을 빌어 위정자와 그 판을 빗댈 수밖에 없기도 하겠지만, 객주는 구한말 시대 민중의 애환을 그리고 아라리 난장은 2000년대의 정치적 사회적 현안들을 낱낱이 풍자한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다음 또 그다음 세대가 이 책을 읽을 때, 난장 바닥에서 흙투성이 먼지투성이의 장돌뱅이들의 모습을 읽어가면서 시대의 모습과 그에 대응하는 보잘것없지만 위대한 그저 그런 사람들의 힘찬 역정과 조우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행복한 것은 역사책에서 볼 수 없는 숱한 장면들을 이러한 방식으로 외연의 폭과 내용의 깊이를 채워나갈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5. 다시 아우라지
김주영의 소설은 태백산맥 어느 깊은 골짜기에서 작은 샘으로 발원한 하나하나의 물줄기들이 나뭇잎을 띄우고 물벌레를 먹여 살리며 내를 이루고 지천이 되어 결국 본류와 합쳐지는 그 지점에 핀이 꽂혀 있다고 보았다. 그 지점에는 이와 같은 무수히 많은 샘물들이 각자의 사연을 지닌 채 모여든 곳이며, 그곳에서 한바탕 판을 벌리고 다시 역사의 물줄기를 따라 흘러가리란 것을 얘기하고자 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나는 김주영의 소설을 아우라지에 빗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래도 명색이 읽은 책에 대해 끄적거린 글인데 이쯤에서 '아라리 난장'의 내용을 짧게 줄여 보자면 이혼 후에 하릴없이 동해안으로 향하던 한창범이 우연히 박봉환을 만나고, 주문진에서 승희와 변 씨 그리고 영월장에서 태호 등을 만나면서 풀어지는 장돌뱅이의 여정은 강원도와 경상도, 전라도와 충청도에 이르는 장터뿐만 아니라 창범과 결별했던 봉환과 태호가 중국 보따리 장사로 나서면서 국제적인 난장을 친다는 얘기다. 자세한 내용과 등장인물 등이 궁금하시다면 직접 읽어 보시기를.... ^^v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책을 읽게 되면 온갖 장시의 특산물과 특징, 풍경이 고스란히 담겨있어 한 권의 지리서를 읽은 효과도 함께 볼 것이며, 무협지를 능가하는 알싸한 에로티시즘의 장면과 애틋한 로맨스도 목격하는 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실제로 있다면 주문진의 영동식당과 진고개 민박집은 꼭 한 번 들러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다.
※ P.S : 이 소설의 한 대목에는 나의 젊은 시절 내내 화두로 삼았던 부분이 있기에 첨언해 본다. 바로 '희망'이란 놈의 정체성에 대한 규정이다. 판도라의 상자에서 마지막으로 나온 희망이란 단어가 정말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병 주고 약주고의 처방인지, 아니면 보다 더 극악한 형태의 형벌인가 하는 것인데, '아라리 난장'에서 차마담이 개구멍서방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창범이 주문진에서 고흥으로 돌아와 변 씨를 대할 때 변 씨가 한 말이다.
"시방 몰라서 또 쓸개를 뒤집나? 차라리 막막한 절벽이었으면 좋겠네. 희망이고 좆이고 그게 말짱 없어지면 차라리 헤치고 나갈 구멍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때가 많았어. 오히려 사람 미치게 만드는 것은 실낱 같은 희망이 있다는 생각이 들 때여. 실낱 같은 희망 때문에 거기에 내 모든 승부를 걸고 도박을 하다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할 실패를 당한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나?" [3권 p111]
[끝]
2010. 4.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