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전문가는 없는데, 마침 제가 전문가입니다."

by 류주복

"아니, 지난번에는 전자구매 전문가라고 하시더니 이번에 또 오셨네요. 그 회사에는 전문가가 없나 봐요?"


제안 발표회 장내에 묘한 긴장감과 함께 비웃음 섞인 실소가 터져 나왔다. 불과 2주 전, 구매 전문가를 자처했다가 고배를 마셨던 바로 그 자리였다. 프로젝트를 수주해 팀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피플 매니저로서의 중압감이 어깨를 짓눌렀고, 낯익은 고객들의 시선은 마치 '이번엔 또 무슨 거짓말을 하러 왔느냐'는 듯 날카롭게 꽂혔다.


종말론과 Y2K로 떠들썩했던 밀레니엄이 지나고 회사에서 조직의 변화가 있었다. 나를 H중공업과 S자동차 프로젝트에 끌어들인 고참이 컨설팅 부서장이 되면서 나는 제조산업 컨설팅 팀의 피플 매니저가 되었다.


한창 닷컴과 인터넷을 활용한 e-business의 열풍이 불고 있었고, 제조업 고객 대상으로 관련 컨설팅 사업을 제안하고 있을 때 몇 주 간격으로 같은 고객에게 잇달아 제안을 하게 되었다.


S정유는 여러 해 전 ITA를 수립했고, 그룹 SI회사인 C사에 의뢰해 아웃소싱 체계와 e-business 시대에 걸맞은 아키텍처로의 업그레이드를 원하고 있었다. 대상은 기술요소, 기능명세, 관리철차, 평가기준, 제품표준, 형상표준, 기술모델 등이었다. C사로서는 그룹 계열사에 확장 시 수행할 자체 역량 확보라는 목표도 가지고 있었다.


제안 발표 시작도 하기 전에 무너질 수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 그 찰나의 침묵 속에서 본능적으로 느꼈다. 여기서 구구절절한 변명을 늘어놓는 순간, 제안서는 휴지 조각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숨을 들이켜고, 당혹감을 자신감으로 치환하며 정면으로 받아쳤다.


"아, 사실 제가 원래 전공은 e-Business IT 아키텍처(ITA) 전문가입니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 뻔뻔할 정도의 당당함에서 나온 경쾌한 응수에 장내의 공기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비아냥거렸던 이들의 얼굴에는 허를 찔린 듯한 웃음이 번졌고, 차갑던 회의실은 기분 좋은 파안대소로 가득 찼다.


그것은 단순한 농담이 아니라 절박함 끝에 터져 나온 승부수였다. 위기를 유머로 받아넘기는 여유에서 나온 에너지가 고객의 마음을 움직였고, 결국 우리는 수주를 따냈다. 때로는 치밀한 논리보다, 막다른 골목에서 던진 단 한 마디의 진정성 있는 반전이 상황의 물줄기를 바꾸기도 한다.


하지만 승리의 기쁨도 잠시, 진짜 난관은 수행 단계에서 찾아왔다. 갑(S정유)과 을(C사) 사이의 '병'으로 참여한 구조에서, 프로젝트 개시 직전 인력 교체 요구가 들어온 것이다.


"경력이 동떨어진 것 같다."는 클라이언트의 지적에 멤버들이 하나둘 부정당하기 시작했다. 나 역시 ITA 전문가라고 큰소리는 쳤지만 실제 프로젝트 경험은 전무했기에 위기감은 고조되었다.


추가 인력 교체 요청까지 들어온 날, 조용히 수첩을 접으며 배수진을 쳤다.


"이 프로젝트는 제가 PM으로서 완수할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신뢰하는 동료를 믿어주지 않는 고객과는 함께 갈 수 없습니다. 지난 2주간의 대금은 청구하지 않을 테니, 계약은 없던 일로 하시죠."


순간 C사 PM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의 단호한 태도에서 전문가의 자존심과 책임감을 읽었는지, 그는 내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인력 교체는 없던 말로 하시죠. 제가 무슨 수를 쓰더라도 고객을 설득하겠습니다." 그 순간, 우리는 단순한 계약 관계를 넘어 '진실의 순간'을 공유한 평생의 전우가 되었다.


동료들을 지켜낸 뒤, 을과 병이었던 우리는 세 가지 전략으로 갑의 기대를 뛰어넘는 압도적 성과를 증명해 나갔다.


첫째, '관망자'였던 고객을 '플레이어'로 끌어들였다. 산출물의 상세 수준에 대한 이견을 좁히기 위해 세 차례의 집중 워크숍을 열었다. 고객사 인원들을 직접 산출물 작성과 검토에 참여시켜 ITA에 대한 이해도를 높였고, 이를 통해 합의된 품질을 확보했다.


둘째, 계약 범위 밖의 '아픔'까지 해결했다. 당시 중구난방으로 관리되던 수많은 웹사이트를 전수 조사하여 마케팅과 브랜드 이미지를 통합할 수 있는 관리 방안을 제시했다. 여기에 IBM의 글로벌 웹 아키텍처라는 지적 자산을 활용해 S사만의 최적화된 웹 아키텍처를 선물했다.


셋째, 산출물을 박제된 문서가 아닌 '살아 숨 쉬는 시스템'으로 구축했다. 기존 ITA의 실패 요인을 분석하여, 모든 산출물을 지식베이스화하고 워크플로우를 넣어 누구나 실시간으로 활용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자, 고객은 열광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인력에 대한 우려와 산출물에 대한 의구심을 완벽히 불식시키며 역대 최고의 고객 만족도 점수를 기록했다. 결국 이 프로젝트는 S그룹 내 최고 권위의 상을 받는 영예를 안았고, 외부 인력이었던 내 이름 석 자도 그 영광의 기록에 한 줄 보탤 수 있었다.


프로젝트가 모두 마무리되던 날, C사 PM 김부장이 나를 보며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어디 멀리 가지 말고 잠깐만 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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