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속편의 저주' 징크스를 깨트리다

by 류주복

"어디 멀리 가지 말고 잠깐만 쉬세요."


C사 PM 김부장의 의미심장한 농담이 무엇을 뜻하는지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당시 C사는 IT 서비스 시장의 판도를 바꾸기 위해 컨설팅 사업을 발주했고, 시장의 거물급 외국계 전략 컨설팅 펌들이 달려들며 격렬한 경쟁 구도가 형성되어 있었다.


우리 팀은 정통 전략 방법론에 IBM만의 독보적인 ITPM 지적 자산을 결합했다. 남들이 현상 파악에만 두 달을 허비하겠다고 할 때, 우리는 이미 검증된 글로벌 사례를 전수해 단 두 달 만에 '이행 계획 수립'까지 끝내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던졌다.


근거 없는 허세가 아니었다. 이미 보유한 지적 자산과 베테랑 팀이 있기에 가능한, 계산된 자신감이었다.


제안 발표를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 전화벨이 울렸다. 김부장이었다.

"어디세요?"

"사무실로 복귀하는 중입니다만..."

"아니, 제가 멀리 가지 말라고 했잖습니까! 제가 PM 맡기로 했으니까, 지금 당장 차 돌려서 착수 준비하러 오세요!"


역대 최단 시간 승전보였다. S정유 ITA 프로젝트의 성공에 이어 우리는 당연히 사업을 이기고 싶었지만, C사 내 다른 이해관계자들도 있기 때문에 많은 힌트를 얻지는 못했다. 아니,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자신했을지도 모르겠다.


프로젝트의 첫 번째이자 유일한 위기는 최종 보고회를 앞둔 설명회장에서였다. 현업 부서장들의 눈빛은 차가웠다.


"이런 뜬구름 잡는 얘기, 전에도 많이 들었습니다. 컨설턴트들 떠나면 우리만 막막해지는 거 아닙니까? 실효성이 있긴 한 건가요?"


불신 가득한 냉소. 그때 유독 거칠게 거부감을 표출하던 한 부서장과 눈이 마주쳤다. 낯설지 않은 얼굴, 찰나의 정적 끝에 뇌리를 스치는 기억. 그는 고등학교 선배였다. 미팅이 끝나자마자 나는 그의 자리로 당당히 걸어가 거수경례와 함께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충성! 00고 00회 000, 선배님께 신고합니다!"


허를 찔린 듯 멍해 있던 선배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우리는 미팅룸에서 마주 앉아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었다. 서류상의 보고서가 아닌, 현장의 고충과 그의 포부, 그리고 진짜 필요한 솔루션에 대한 '진짜 이야기'였다. 기나긴 대화 끝에 선배가 물었다.


"후배님, 내가 맡은 SCM 비즈니스 모델, 벙벙한 소리 말고 진짜로 만들어낼 자신 있나?"


나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아, 제가 원래 제조업 출신 SCM 전문가 아닙니까!"


그 한마디로 전략 컨설팅 종료와 동시에 후속 프로젝트까지 경쟁 없이 거머쥐었다. "가장 똑똑하고 까칠하다."던 부서장을 단숨에 아군으로 만든 비결을 묻는 동료들에게 나는 그저 웃어 보였다. 기술보다 앞서는 것은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감'임을 다시 한번 확인한 순간이었다. 학연, 지연의 도움도 물론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 글을 쓰면서 생각난 김에 당시 고락을 함께한 전우였던 C사 PM 김부장과 오랜만에 통화를 했다. 내 글을 읽은 그의 후기 중 일부 구절을 옮겨본다.


"잘 읽었습니다. 훌륭해요... 옛 생각도 나네요...어줍잖은 코멘트보다는, C사 PM의 소회만 간단히 적어 보겠습니다.

첫째, C사 PM은 이 프로젝트를 ‘속편의 저주’를 깨트린 유일한 프로젝트로 인식하고 있을 것임.

둘째, C사 PM은 자신에게 ‘솔루션’을 주기 이전에, 자신의 ‘고민'을 경청하고 공감해 주고, 그리고 뭔가를 '학습’하게 해주는 컨설팅 팀 PM을 발견함.

(중략)

컨설턴트가 손수 조사한 통계적 수치를 ‘IT실무관리자들의 언어’로 꾸밈없이 전달... 그리고, 컨설팅 팀 PM의 ‘요사스럽지 않은’ Comment 및 마무리 정리..."

(* ‘요사스럽지 않은’ 은 '요란스럽지 않은'이 아닐까 싶다. 근데, 왜 따옴표까지 했는지는 잘 모름)


당시 C사는 대기업 관계사의 안정적인 물량에 안주하며 "고객의 목에 빨대를 꽂아 연명한다."는 자조 섞인 농담을 던지던 중상위권 SI 업체였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가진 잠재력의 씨앗을 보았고, 그 씨앗이 싹틀 수 있는 토양을 함께 일구었다.


세월이 흘러 C사는 이제 AI 혁신 파트너로서 국내 SI '빅3'의 한 축을 당당히 담당하고 있다. 그 화려한 도약의 초입에서 우리가 함께 치열하게 고민했던 시간들이, 지금의 거대한 숲을 이루는 수많은 씨앗 중 하나가 되었으리라 확신한다. 33만 시간의 기록에서 가장 뜨거웠던 성장 페이지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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