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5인치 디스켓에 담긴 '자동화'의 맛
학위기를 내려놓고 총을 들었던 고된 국방의 의무 시간 끝에, 지도교수님의 따뜻한 배려가 삼미정공㈜라는 낯선 항구로 나를 이끌었다. 익숙한 전공의 바다와는 다른 물결이었으나 기꺼이 미지의 지평을 향해 돛을 올리기로 했다.
돌이켜보면 인생이란 미처 그 의미를 알지 못한 갈림길 앞에서 내린 찰나의 선택이 어느덧 거대한 운명의 지도가 되어 우리를 전혀 다른 내일로 데려다 놓곤 한다.
1987년 삼미그룹은 독일 회사인 FAG와의 50:50 지분 합작을 통해 정밀 기계·베어링·기계부품 계열의 제조 자회사 삼미정공을 설립하였다.
합작사인 FAG는 1883년 독일 바이에른주 슈바인푸르트에서 설립된 베어링 전문 기업으로, 현대 볼 베어링 산업의 기원을 이룬 브랜드다. FAG는 현재에도 Schaeffler Group 산하 핵심 브랜드로서 글로벌 베어링 시장에서 선도적 위상을 유지하고 있다.
삼미그룹은 1980년대 중반 재계 순위 10위권을 넘나들던 대기업이었다. 목재·해운 중심에서 특수강·기계·정밀제조 중심으로 구조 전환을 시도했고, 이 전략의 일환으로 삼미정공이 탄생했다.
삼미그룹은 대중에게 프로야구 원년 멤버인 '삼미 슈퍼스타즈'로 잘 알려져 있다.
원년 6개 구단 중에서 유일하게 국가대표가 단 한 명도 없는, ‘슈퍼스타가 없는 슈퍼스타즈’였으며 한국 프로야구사에서 가장 낭만적이면서도 서글픈 발자취를 남긴 팀이다. 9회 초까지 5, 6점을 앞서고 있어도 불안해서 끝까지 보게 만드는 짠함을 주었던, 오늘날 보살 팬의 원조를 만든 팀이다.
삼미 슈퍼스타즈를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압도적인 난공불락의 기록들이다.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에 만든 전무후무한 1할대 시즌 최저 승률과 유일무이한 OB베어스 상대 시즌 전패 기록이다. 1985년에 기록한 시즌 18연패는 무려 35년 동안 깨지지 않다가 2020년 한화 이글스가 겨우 타이 기록을 세웠다. 앞으로도 100년 내에는 깨지기 힘든 기록들이다.
만년 꼴찌였던 삼미에게도 눈부신 순간은 있었다.
바로 재일교포 투수 장명부를 영입한 1983년. 너구리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장명부는 시즌 전체 100경기 중 60경기에 등판하여 30승이라는, 현대 야구에서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기록을 세웠다.
너구리 장명부의 활약 덕분에 삼미는 리그 3위까지 치고 올라가며 '도깨비 팀'으로 불렸지만 한 명에게 너무 의존한 탓에 이듬해부터 다시 승점 자판기로 추락하였다.
결국 3년 만에 청보 핀토스로 매각되었고 이후 태평양 돌핀스, 현대 유니콘스, 키움 히어로즈로 이어지고 있다.
삼미 슈퍼스타즈는 성적을 떠나 실력이 부족해도 끝까지 달리는 이들의 대명사가 되어 영화와 소설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1등만 기억하는 세상에서 꼴찌 삼미를 열정적으로 응원하는 이들의 철학적 고민을 담았다.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은 삼미의 패전처리 전문투수였던 감사용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범수, 윤진서, 공유, 하정우, 김수미 등 쟁쟁한 출연진의 영화다.
패전처리 전문투수라는 말은 겉으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는 못하지만, 조직이 돌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을 비유하면서 직장에서도 종종 쓰이는 표현이 되었다. 이 영화는, 누구나 주인공이 될 수는 없지만 누구나 자기 인생의 스타는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주었다.
야구 선수를 해볼까 할 정도로 야구를 좋아했었기에 얘기가 길어졌다.
삼미정공은 그룹사의 가족주의적 끈끈한 결속력과 독일식 효율성 및 워라밸 중시 기업문화가 융합되어 당시 한국 기업에 일반적이던 ‘하면 된다.’식의 수직적 위계가 있는 회사는 아니었다. 사원 번호를 입사순으로 부여했는데 한국인 사장이 1번, 독일인 사장이 2번, 내가 20번대였다.
당시 현장 기능직 포함 이미 150명 규모의 회사였으니 서류상으론 꽤 앞번호였지만, 사실 그건 성별과 학력, 직군별 차별이 당연시되던 시대가 만든 일종의 예외였다. 그렇다고 앞번호라고 해서 별다른 특혜는 없었다.
부서장들은 맨 뒷자리 회전의자에 앉아 하루 종일 신문을 보다가 이따금씩 내 뒤통수를 감시하고 있을 것만 같았던, 10년 이상의 경력을 가진 실력 있는 분들이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도대체 직장 생활을 어떻게 10년을 넘게 할 수 있나?'라는 궁금증이 들었다. 그때 직장 생활에 대한 내 계획은 최대 10년이었다.
처음 배치받은 부서는 서울 본사의 기획부 기획과였다. 기획과는 내가 입사하면서 직원이 두 명으로 늘었다. 본사 사무직 직원이 30명이 채 되지 않는 신생 회사에서는 무엇이든 필요한 업무를 닥치고 해야 했다.
갓 입사해 지식도 경험도 없는 신입사원에게 급여 인상안 기안서 작성을 맡겼다. 관련 책자를 사서 공부도 하고 경영학 전공한 친구들에게 벤치마킹 자료도 얻어가며 서론, 본론, 결론을 갖춘 거창한 학술 논문처럼 만들어 제출했다.
노련한 과장님이 어마어마한 인내심을 동반한 코칭과 함께 방대한 분량의 논문을 딱 1장의 본문과 몇 장의 첨부를 덧붙인 인사 기안서로 깔끔하게 바꾸어 주셨다.
두 번째 업무는 회사 로고와 상표를 관청에 등록하는 일이었다. 디자인 사무소와 함께 로고 디자인에 참여하여 만든 시안들을 가지고 경영진 승인을 받은 후 법률 사무소에 등록을 의뢰하는 비교적 쉬운 업무였다.
곧이어 회사 사무실을 이전하는 업무에 투입되어 후보지 물색, 레이아웃 작성, 이사업체와 협의, 실제 이사까지 빡빡한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삼성동 작은 건물에서 그 해 완공된 무역센터 빌딩 20층의 깨끗하고 전망 좋은 사무실로 이사했다.
새 사무실의 레이아웃은 팀별로 모여 있게 바뀌었는데, 여전히 부서장들은 가장 뒤통수 전망이 좋은 맨 뒷자리였다.
다음엔 직원 채용 업무에 투입되었다. 일간지에 실린 단 몇 줄의 00명의 신입, 경력사원 채용 공고는 이내 5천여 장의 입사 지원서라는 거대한 파도가 되어 내 책상을 덮쳤다. 오직 몇 명의 두 눈과 손끝만이 그 간절한 지원서들을 분류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였다. 며칠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며 서류의 파도를 넘었다.
부서별 면접 일정을 짜고, 전화기 다이얼을 돌려 떨리는 목소리의 주인공들에게 소식을 전하며, 누군가의 당락을 결정짓는 통지서를 써 내려가던 그 수작업의 시간이 주던 무게감. 그것은 단순한 업무가 아니라 타인의 운명을 손바닥 위에 올려두는 무거운 의식이었다.
하지만 그 순수한 의식의 이면에는 '청탁'이라는 은밀한 그림자도 끊임없이 일렁였다. 연줄을 타고 내려오는 압박과 타협을 권하는 눈길들. 사장님이 강조했던 채용의 객관성과 공정성을 서슬 퍼런 칼날처럼 들었던 내게, 그것은 결코 넘어서는 안 될 선이었다.
세상의 관습과 부딪치며 내는 마찰음을 마다하지 않았고, 공정의 파수꾼이 되길 주저하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내 어깨에도 관리자라는 책임이 얹히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수많은 지원자를 겪으며 옥석을 가리는 일이 얼마나 고단한 일인지 알게 된 후에야, '사람이 보증하는 사람'의 무게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여전히 불공정한 청탁은 단호히 배격했지만, 내가 신뢰하는 이가 마음을 다해 추천하는 인재에게는 자연스레 특별한 관심이 머물렀다. 그것은 배경이 아닌 '평판'이라는 검증된 성적표였음을 이제는 안다.
그 시절의 나는, 차가운 공정의 잣대 뒤에 숨겨진 신뢰의 맥락까지 헤아릴 내공은 없었다. 지도교수님의 ‘추천’으로 입사한 나 자신도 다른 이들의 눈에는 ‘청탁’으로 보이지 않았을까. 청탁의 어둠과 평판의 빛을 너무 엄격하게만 구분하려 했던 젊은 날의 강단이, 귀여우면서도 아련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숨 쉴 사이 없이 몇 가지 낯선 업무를 경험한 후 내년 예산을 수립하는 TFT에 배정되었다. 1년 매출 계획을 바탕으로 제품별 판매 목표를 설정하고 이에 따라 제품 생산에 필요한 원부자재 소요량을 계산한 뒤 최종적으로 월별 손익으로 정리하는 작업이었다.
기획부 부서장이 전체 작업을 지휘하고 생산, 구매, 자재, 인사, 재무 부서에서 10여 명의 직원들이 모여 주말도 없이 매일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작업에 매달렸다. 주어진 도구는 탁상용 계산기와 타자기 그리고 수정액과 수정 테이프뿐이었다.
단 하나의 제품 매출 계획이 바뀌어도 전체를 수정해야 하는 반복 수작업과 오류 수정 속에서 ‘효율’이라는 단어는 먼 미래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그때도 사무실에는 여러 대의 데스크톱 PC가 있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흐름을 바꾸는 일이 생겼다. 독일 본사 직원이 007 가방처럼 생긴 랩탑 PC를 들고 와 단 하루 만에 모든 작업을 자동화하고 정리하는 모습을 보았다. 오전에 무언가를 랩탑 PC에 입력하더니 오후에는 자동화된 계산과 깔끔한 요약 그리고 우리가 2주 넘게 씨름했던 결과물을 단 몇 시간 만에 정리해 냈다.
과장님의 지시로 점심시간을 틈타 그 랩탑 PC에서 5.25인치 디스켓을 꺼내어 복제했다. 디스켓 안에는 Lotus 1-2-3용 스프레드시트가 들어 있었다. 키보드의 슬래시(/) 기호를 아는 분이라면 꽤나 고인 물이다. Lotus 1-2-3는 대학원 시절 실험실 PC에서 접했던 VisiCalc와 유사한 구조여서 예산 관련된 모든 수식과 매크로를 빠르게 해독할 수 있었다.
오늘날 전 세계 직장인의 절친이 Excel이라면 Lotus 1-2-3가 그 할아버지, VisiCalc는 시조새 격이다. 덕분에 이후 예산 수정 작업은 매우 신속하고 정확해졌지만, 대신 내가 1순위 야근 담당이 되었다. 매일 밤 무역센터 20층 사무실에서 같은 해 열린 서울 올림픽 경기장의 라이트 불빛을 바라보기만 해야 했다.
여기까지가 입사 6개월 동안 일어난 일들이다. 직원 수는 이제 300여 명이 되어 있었고, 세 명의 후배 사원도 생겼다.
신입사원에게도 독일 본사에서 도입을 추진하던 MRP 시스템 연수 기회가 주어졌다. FAG 본사가 있는 독일 슈바인푸르트에 6주간 연수를 다녀오면서 IT의 잠재력에 더욱 큰 매력을 느꼈다.
연수를 마치고 돌아와, 다들 선망하던 서울 본사 근무를 마다하고, 준공 후 막 생산을 시작하고 있던 전북 전주시에 있는 공장의 생산관리 담당으로 셀프 인사 발령을 냈다. 일개 말단 사원이었지만 기획팀 소속이라 가능했다.
24시간 3교대로 운영되는 공장의 생산관리 업무는 다음과 같았다. 영업 부서에서 온 출하 계획에 따라 제품별 월간 생산계획 수립 - 주간, 일 단위 일정계획 수립 - 라인별, 조별 작업지시서를 발행한다. 그 후 생산 실적을 수집해 매일 오전과 오후 관리자들 및 공장장에게 생산일보를 보고한다.
여기까지는 모든 것이 계획대로 다 잘 돌아갔을 때 얘기이다. 현실은 기계 고장과 같은 돌발 상황 수습 및 본사의 긴급 출하 지시에 24시간 대응해야 하는 업무였다.
공장의 생산관리과에는 과장과 담당 직원 1명, 서무 여직원 1명이 있었다. 매일 아침 출근하면 서무 여직원이 공장에서 올라온 생산일보를 취합한다. 담당 직원이 취합된 생산일보를 전날까지의 누적 생산량과 현장 통계 데이터를 계산해서 다시 서무 여직원에게 준다.
이를 몇 장의 A3용지에 타이핑하면 담당 직원, 과장, 부장이 눈과 계산기로 검토한다. 몇 번의 수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공장장에게 보고한다.
모든 업무는 수작업이었고, 공장장은 점심시간이 지나서야 그날의 첫 보고서를 받을 수 있었다. 공장장의 최종 오케이 싸인 전까지는 서무 여직원, 담당직원, 과장, 부장 모두 다른 일을 일절 하지 못했다.
물론 이런 단계를 거쳐도 공장장은 그 넓은 A3용지에서 계산오류를 귀신같이 잡아내 부장, 과장, 담당 순으로 내리갈굼을 당했다. 이게 매일 오전 반복되는 풍경이었다.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그 보고서 작성의 반자동화였다. 본사에서 예산 작업을 했을 때 습득한 경험을 적용했다. 아예 처음부터 생산일보를 Lotus 1-2-3에 입력하면 누적 생산량과 통곗값은 수식과 매크로로 계산되게 했다.
출근 후 1시간 이내에 A3용지에 인쇄된 보고서가 나왔다. 처음엔 부장이 "컴퓨터를 너무 믿지 마라"라고 하면서 계산기로 여러 차례 검산했지만, 오류가 없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매우 놀라면서도 신기해하셨다.
계획되었던 MRP시스템의 가동은 기능 수정 프로젝트가 진행되지 않으면서 계속 지연되었다. 나는 공장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생산 프로세스 최적화와 작업 데이터 수집 및 보고서 작성 자동화에 몰입했다.
정교한 작업지시와 정확한 실적 수집을 위해 현장의 반장, 기능직들과 많은 소통을 했고, 그들은 미숙한 나의 실험적인 시도에도 기꺼이 협조해 주었다. 물론, 부서장과 공장장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다.
수개월의 노력 끝에 단순 워드프로세서였던 PC들을 프로그램이 돌아가게 바꿀 수 있었다. 아주 잘 통합된 시스템은 아니지만 많은 수작업이 자동화되었고 작업지시와 생산일보의 정확도가 개선되었다.
공장의 직원들은 생산관리 체계를 설계하고 적용하는 내게 부공장장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IT를 평생 경력으로 삼기에는 확신이 부족했다. 제조업의 ‘꽃’이라 불리는 생산관리 업무 경험은 훌륭한 자산이지만, 여전히 컴퓨터는 어디까지나 보조 수단이라고만 생각했다.
MRP 시스템의 본격 가동이 기약 없이 미뤄지고 있는 만큼이나 내가 주도한 생산관리 업무도 차츰 안정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업무가 제자리를 찾으면서 얻은 평온함은 곧 무료함으로 바뀌었다.
봄날의 햇살 아래 문득 대학원 시절 고문처럼 느껴졌던 열역학조차 그리워졌다. 학업을 다시 이어갈 절실함은 없었지만, 이 첫 직장 생활을 마무리 짓기로 마음먹었다.
낚싯대를 장만해 석 달 동안 매일같이 물가에 앉았다. 바람은 잔잔히, 시간은 천천히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낚시터에 가져간 신문 속에서 우연히 마주한 채용 공고, IBM이 생산관리 유경험자를 채용하고 있다는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순간, 고요했던 물가에 작은 파문이 일었고 나는 낚싯대를 거둬들였다. 그때는 몰랐다. 그 조용한 선택 하나가 이후 여정의 출발점일 줄은.
누구에게나 낚싯대를 거둬들이게 만든 결정적인 순간이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