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IT업계로의 커리어 전환

취미와 보조수단이 생업이 되다

by 류주복

인생은 항상 준비되지 않은 순간에 거대한 파도 속으로 우리를 밀어 넣는다.


1980년대 말, 한국 제조업은 양적 성장에서 질적 성장으로 변화하던 시기였고, 삼미정공에서의 경험을 통해 컴퓨터의 잠재력을 알게 되었다. 나는 선진 IT 기술을 국내 기업에 전수함으로써 더 나은 의사결정, 더 효율적인 운영, 그리고 더 인간적인 연결을 만들어가는 데 이바지하고 싶었다.


IBM으로의 이직은 단순히 직장을 옮긴 행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게임과 취미와 업무의 보조수단을 넘어 IT의 본질을 깊이 이해하고자 떠난 긴 여정의 출발점이었다. 나는 입사 후 6개월의 신입사원 연수가 채 끝나기도 전에 제조유통 산업본부 산하 CIM사업부라는 역동적인 현장에 배치되었다.


CIM은 Computer Integrated Manufacturing의 약자로 컴퓨터를 이용해 제품 설계, 제조, 공장 자동화를 통합한다는 개념인데, 그 부서에서 나는 당대 최고의 내로라하는 선배들에게 배우는 행운을 얻었다.


내 책상에는 육중한 3270 터미널이 놓여 있었다. 전 세계 IBM 직원이 공통으로 사용하던 사무자동화 시스템 'PROFS'를 통해 이메일과 실시간 메시지를 주고받고 서류를 작성했다. 먼 훗날 등장한 Lotus Notes나 MS Exchange 같은 그룹웨어의 선구자 격인 시스템이었다.


곧이어 지급된 IBM PS/2 PC에서는 DOS 기반의 3270 에뮬레이션을 사용했다. 그러나 여전히 메인프레임 기반의 중앙집중식 앱을 써야 했고 순간정전이라도 되면 재부팅되기 전까지 업무가 마비되었다.


지금은 GUI가 당연한 시대지만, 불과 몇 년 전에 여전히 현역으로 쓰이던 DOS 기반 3270의 텍스트 화면을 마주하고 그 끈질긴 생명력에 놀란 적도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바일 오피스 정책이 실행되었다. 나는 최초의 IBM Thinkpad 브랜드 노트북 '700' 모델을 지급받아 재택근무와 이동형 근무의 선발대에 올랐다. 초고속 인터넷이나 WiFi가 없던 시절에 사무실 말고는 마땅히 갈 곳이 없으니, 아침에 사무실로 출근이 당연시되던 시절에 집에서 눈칫밥을 꽤나 먹어야 했다.


Thinkpad 700 노트북은 4MB RAM과 80MB HDD를 갖춘, 당시 기준으로 과하게 넉넉한 사양이었다. PCMCIA라는 확장슬롯에 28.8 Kbps 모뎀을 꽂아 전화선에 연결하고 'ATDT' 명령어로 다이얼링 하면 들리는 접속 음은 초고속 인터넷 시대 이전을 경험한 많은 분들의 귓가에 선할 것이다.


Thinkpad 브랜드가 Lenovo로 넘어간 지 꽤 되었지만, 특유의 쫀득한 키보드 타건감과 빨간 트랙포인트 빨콩의 편리함은 대체 불가능한 옵션이 되어, 나는 지금까지 30년 넘게 노트북은 오직 ThinkPad만 고집하고 있다.


IBM은 1981년 PC 5150을 출시하며 춘추전국시대였던 PC 시장을 일거에 장악했다. IBM은 초기부터 PC 시장 확대라는 명목으로 하드웨어 인터페이스 문서를 공개했는데, 이는 Compaq, Dell과 같은 클론머신 업체로부터 빠르게 추격을 당하는 빌미를 제공하여 시장 통제권을 상실하고 있었다.


명목은 시장 확대였지만, 실상은 1년 이내에 PC를 개발해야 하는 압박하에서 Intel 등으로부터는 기존 하드웨어를, Microsoft로부터는 DOS를 채택함으로써 자연스럽게 개방형 구조가 된 것이었다.


내 기억으로도 ‘PC는 메인프레임을 위한 단말기’라는 내부 인식이 강했다. 실제로 메인프레임, 미니컴퓨터, 유지보수 분야가 회사 수익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PC사업부로 발령을 받고 낙심해서 우는 직원을 본 적도 있다.


1987년, 표준 선점과 시장 통제권을 되찾고 싶었던 IBM은 차세대 개인용 컴퓨터로 PS/2를 야심 차게 발표하면서 반전을 꾀했다. PC의 Computer 대신 System을, 1세대인 PC를 대체하는 의미로 PS/2라고 명명했다.


PS/2에는 새로운 규격의 VGA, PS/2 키보드/마우스 포트, 3.5인치 플로피, 72핀 메모리, 그리고 문제의 MCA 버스가 도입되었다.


당대 최고의 기술을 때려 넣은 만큼 가격도 선을 넘어 MCA 버스가 탑재된 사양의 PS/2는 국산 중형 자동차보다 비쌌으니, 아무나 살 수 없는 물건이 되어 버렸다. 내 연봉보다 훨씬 비쌌다.


IBM의 PS/2 폐쇄 전략에 시장은 개방성으로 응답했다. 클론연합은 MCA 버스 대신에 EISA 버스를 공동으로 개발하고 BIOS 저작권을 클린룸 설계로 우회하는 등, IBM 없이도 PC는 계속 발전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실증했다.


결국 'PS/2는 IBM 호환 PC 중 가장 호환이 안 되는 PC'라는 밈을 남기며 실패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PS/2의 새로운 기술들은 MCA 버스만 제외하고 업계의 표준이 되었다. VGA와 PS/2 포트는 꽤나 오랫동안 살아 남았다. 이후 PC 시장은 완전히 개방형 생태계가 되었다.


PC용 OS의 세계도 흥미진진했다. 당시 거의 모든 IBM 호환 PC에는 Microsoft의 MS-DOS 혹은 이를 리브랜딩한 IBM의 PC-DOS가 탑재되어 있었다.


DOS는 빠르고 단순했지만 640KB 메모리의 한계, 멀티태스킹 불가, 불안전성으로 더 이상 확장 불가능한 한계점에 도달해 있었다. 일하면서 중간중간 저장을 하지 않았는데 시스템이 죽으면 하루 작업을 날리는 OS였다.


윈도 3.1도 DOS 위에서 돌아가던 GUI 도구에 가까웠다. IBM과 Microsoft 모두 “DOS를 계속 고쳐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판단했고, 기업 고객에게 필요한 안정성과 기능을 원하던 IBM과, DOS 이후를 준비하고 있던 Microsoft 사이에 세기의 동상이몽 연합이 결성되었다.


그렇게 탄생한 OS는 같은 시기 발표된 IBM의 야심작인 PS/2의 이름을 따서 OS/2라고 명명되었다. 선점형 멀티태스킹, 고성능 파일시스템, 네트워크 친화적 구조와 같은 기업 고객의 니즈에 충실했다.


OS/2 v2.1부터는 윈도 3.1도 설치할 수 있게 되어 '일단' 부팅만 되면 DOS나 윈도 3.1보다 네이티브 앱을 더 안정적으로 실행했다.


그러나 개발자 생태계 부족으로 인해 OS/2 전용 앱도 부족했거니와 그보다 더 심각한 진입장벽은 극악의 설치 난이도였다. 수십 장에 이르는 3.5인치 설치디스켓을 갈아 끼우다가 마지막 디스켓에서 에러가 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이건 아주 나중에 출시된 상위 버전에서 설치 CD로 바뀌었어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단어 그 자체로도 생소한 '객체지향 데스크톱' 같은 기능은 너무 일찍 미래에 도착해 버렸다. 어려웠다는 얘기다. 직원인 나조차도 전산실에서 주관하는 필기와 실기 시험을 통과해야 OS/2를 사용할 수 있었다.


OS/2는 설치와 사용이 직관적이던 윈도 3.1에 점점 밀리더니 은행, 지하철 관리, ATM과 같이 장시간 무중단 운영이 필수적인 영역에서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다.


OS/2의 후속 개발 방향을 둘러싼 이견으로 IBM과 Microsoft가 이혼한 이후 등장한 윈도 95는 OS/2를 일반 소비자 시장에서 완전히 외면당하게 만든 결정타였다.


OS/2는 미래의 운영체제를 과거의 PC 시장에 들이밀었던 진지한 시도였으나 '기술적으로 이겼지만, 시장에서 졌다'라는 대표 사례를 남기며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아직 소수의 추종자 테키 그룹이 있다.


한편, 내가 속한 CIM사업부에서 지원하던 MRP 시스템은 PICS(Production Information Control System) 시리즈였다. 현대 제조업 관리 체계의 아버지라 불리는 Joseph Orlicky가 1964년에 개발한 세계 최초의 MRP 시스템에서 출발한 소프트웨어다.


메인프레임용 COPICS와 중소형 시스템용 MAPICS로 나뉘었는데, 학습 난도가 얼마나 높았는지 "COPICS를 배우려면 코피 쏟아야 하고, MAPICS는 매일 코피 쏟아야 하는 시스템"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참고로, 1972년에 IBM 출신 엔지니어 5명이 독일 만하임에서 SAP를 설립하였고 이 회사는 현재 글로벌 기업용 소프트웨어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1992년에는 메인프레임 기반 SAP R/2의 후속으로 3-Tier 구조의 SAP R/3가 출시되며 본격적인 범용 클라이언트/서버 시대를 연 ERP 시스템으로 자리 잡았다. SAP 개발 당시 IBM PICS로부터 영감받지 않았을까 하는 개연성 높은 추측을 해볼 수 있겠다.


국내에 AS/400 시스템용 관계형 DBMS 버전의 MAPICS/DB가 출시되면서 한글화 작업에 참여했다. 미국 애틀랜타 연구소에서 긴 시간동안 오류 수정과 최적화를 했고, 한글 버전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고객사를 위해 릴 테이프에 소스코드와 빌드를 담아 직접 들고 귀국했다.


귀국하자마자 경기도에 있는 고객사로 달려가 한글 버전을 설치했다. 모든 것이 괜찮아 보였는데 MRP 모듈만 실행하면 계산 도중에 덤프를 내며 시스템이 멈추었다.


소스코드 언어인 RPG도 잘 모르는데 시스템 덤프를 어찌 이해하겠는가. 집에 가지도 못하고 꼬박 이틀을 살펴봤음에도 오류의 원인을 찾지 못하다가 잠결에 드디어 Date에서 원인을 찾아냈다.


AS/400 시스템의 한글 처리 방식은 좀 독특한데, 한글이 시작된다는 표시로 SI(Shift In) 1바이트와 한글이 끝났다는 SO(Shift Out) 1바이트, 총 2바이트가 추가로 필요했다. 그래서 영어로 ‘Date’는 글자 수대로 4바이트가 필요하지만, 한글은 'SI + 날짜*2 + SO' 총 6바이트가 필요했다.


화면 표시가 되긴 하는데 내부 처리 시 추가로 필요한 2바이트를 확보하지 못해서 계산 도중 수십 페이지의 덤프를 뱉으면서 멈추어 버리는 것이었다.


소스코드에서 '날짜'를 한땀 한땀 'Date'로 원복하니 MRP 모듈이 문제없이 돌아갔다. 지금도 그 고객은 내가 RPG 도사인 줄 알고 있는데 사실은 소 뒷걸음질 치다 개구리 잡은 것이다.


그 사건 이후, 외국산 MRP 패키지의 도입에 어려움을 느끼는 국내 기업에는 단순 매뉴얼 번역과 교육 외에 추가 지원이 더 필요함을 절실하게 느끼고 국내 실정에 적합한 추가 모듈 개발을 주도했다.


또 시스템 설정, 기본 데이터 관리, 재고 관리, MRP, 생산 통제, 원가 계산까지 전체 시스템의 업무 흐름을 담은 실용 지침서를 직접 번역하고 정리해서 출판했다.


이때 아래아한글을 구매해 직접 편집과 조판 작업을 했다. 한글 편집에 있어서는 다른 소프트웨어가 절대 따라올 수 없는 편리한 기능을 제공하는 독보적인 소프트웨어였다. 아직도 관공서에서 쓰이고 있는 이유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책을 편집하고 출판하면서 덤으로 시스템을 관통하는 지식도 쌓게 되었다. 공부하는 좋은 방법의 하나가 책을 쓰는 것이란 말은 상당 부분 맞다.


기술이란 단순히 기능을 구현하는 도구가 아니라, 그 시대의 관리 철학을 담아내는 그릇이 아닐까. MRP 로직을 한 땀 한 땀 해독하며, 데이터가 어떻게 기업의 가치사슬을 연결하고 경영과 의사결정을 돕는지 그 본질을 꿰뚫을 수 있었다.


기술적으로 앞섰다는 평가를 받던 IBM PS/2, OS/2가 사용자의 외면과 시장의 생태계 구축에 실패해 사라지는 과정을 지켜보며 깨달은 점도 크다. 내가 담당했던 IBM PICS 시리즈도 IBM 하드웨어에서만 운영된다는 치명적인 결점이 있었고, 결국 매각되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아무리 훌륭한 기술이라도 사람의 언어로 번역되지 않고, 시장에 녹아들지 못하면 생명력을 잃는다는 것. IT는 결국 사람과 현장과 연결할 때 비로소 빛난다.


입사 4년 차, IBM은 전략적 의사결정에 따라 서비스 사업부의 돛을 올렸고 나 역시 신설 부서로 옮겨 서비스 프로젝트의 최전선에 투입되었다. 그것이 이후 수십 년간 고객사의 생생한 현장에서 '해결사'로 살아가게 될 기나긴 커리어의 시작이었다.


누군가는 '코피 쏟던' 그 시절을 고생이라 말하겠지만, 내게는 33만 시간의 여정을 지탱해 줄 가장 단단한 기초 체력을 기른 축복의 시간이었다.


결국 중요한 건 기술의 화려함이 아니라, 그 기술을 이용하는 사람의 이해와 진심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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