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최고의 고통을 기꺼이 함께한 어벤져스
"하아, 이제 진짜 시작인데... 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하지?"
이제는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실행만 하면 되는데 막막함은 더 짙어졌다. 그 혼돈 속에서 붙잡은 줄기는 결국 '현장'과 '사람'이었다. 다행히 회사에서는 프로젝트팀 구성에 관한 전권을 내게 부여했다.
지난 8개월간 함께 고생한 정예 멤버 외에, 여러 명의 실력자를 더 찾아야 하는 중차대한 임무가 주어졌다. 사내에 떠도는 무성한 소문을 뒤로하고 타깃으로 점찍은 실력자들을 한 명씩 '진실의 방'으로 호출했다.
"무슨 프로젝트인지, 어디로 가는지 지금은 말해줄 수 없다. 단 하나 확실한 건, 지금까지 겪어온 그 어떤 일보다 고통스러울 것이라는 사실뿐이다. 하지만 장담컨대, 훗날 당신 인생 최고의 프로젝트였다고 회상하게 될 거다. 자, 선택하라. In인가, Out인가?"
이른바 '아묻따'식 면담. 하지만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미지의 프로젝트에 단 한 명을 제외한 모두가 "In"을 외쳤다. 비어버린 그 한 자리조차, 후보군에 없던 컨설턴트가 소문을 듣고 달려와 "제발 나를 태워달라."며 열정적으로 자원하면서 팀은 순식간에 오션스 일레븐으로 결속되었다.
본사의 지원 역시 전례 없는 수준이었다. IBM의 전사적 프로세스 혁신을 직접 진두지휘했던 백전노장들이 상주 멤버로 투입되었다. 프로세스 설계, 역량 향상, 변화 관리 등 각 분야의 베테랑 해외 컨설턴트 10여 명이 합류하면서, 마침내 20명이 넘는 글로벌 연합군이 결성되었다.
전쟁터로 나갈 칼은 이미 날카롭게 벼려졌다. 이제 남은 것은 이 어벤져스가 모여 거대한 체질 개선의 폭풍 속으로 뛰어드는 일뿐이었다.
그러나 팀은 완벽했지만, 정작 배를 띄울 '항구'가 없었다. 시범 사업부 선정을 앞두고 전선에는 묘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사업부마다 찾아가 순회 공연식 프리젠테이션을 했으나, 돌아오는 답은 약속이라도 한 듯 똑같았다.
"혁신의 취지에는 200% 공감합니다. 하지만... 우리 사업부는 다음 차례에 하면 안 될까요?"
말이 좋아 순회공연이지, 사실상 구걸에 가까운 여정이었다. 어느 사업부는 아예 미팅 직전에 일정을 취소하며 문전박대를 했고, 어느 사업부는 '실패해도 티 안 나는 구석진 조직'을 제물로 내놓으며 생색을 냈다. 혁신의 불꽃이 피어나기도 전에 눈치보기에 꺼져가는 듯한 나날이었다.
각 사업부는 MDC가 지향하는 가치에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막상 자기 안마당을 내어주는 일에는 망설임을 보였다. "지금 당장 실적 목표 맞추기도 급급한데, 무슨 한가한 프로세스 타령이냐."는 원성이 복도까지 새어 나왔다. 미팅실의 공기는 늘 차가웠고, 프리젠테이션이 끝날 때마다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힌 기분이었다.
실패의 위험이 적은 곳에서 작게 시작하느냐, 아니면 파급력이 큰 핵심 사업부에서 정면 돌파하느냐를 두고 지루한 평행선이 이어졌다. 고객사 임원진을 미국 본사까지 모셔가며 '일찍 일어나는 새'의 이점을 설파했지만, 정작 "누가 먼저 할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서는 침묵하며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결국 이 교착 상태를 깨뜨린 것은 CEO의 서슬 퍼런 결단이었다. "가장 먼저 나서는 사업부에 파격적인 인센티브를 주겠다." 이 한마디에 당시 가장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던 무선사업부가 총대를 멨다. 아마도 다른 사업부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기대 반, 어디 두고보자 반'의 심정으로 이 시범 프로젝트를 주시했을 것이다.
사업부 선정에 시간이 좀 걸렸으나, 일단 결정이 나자 고객측도 전사 혁신팀과 사업부 마케팅팀이 주축이 된 상주팀이 신속하게 꾸려졌다. 그리고, 드디어 마침내 이윽고 계약서에 도장을 받을 수 있었다. 혁신팀으로부터 처음 전화를 받은 지 이제 1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계약을 마냥 기뻐하기엔 이른 감이 있었다. 사업부장이 이 프로젝트를 반대한다는 소문이 독버섯처럼 번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사업부장은 'Picky(까칠함)'의 대명사다.", "컨설턴트들이 장표 들고 갔다가 5분 만에 뼈도 못 추리고 쫓겨났다더라."는 괴담이 정설처럼 받아들여졌다.
심지어 '혁신의 가속페달을 밟으려다 사업부장의 브레이크에 우리 팀 전원이 튕겨 나갈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까지 들려왔다. 무선사업부라는 거함을 지휘하는 선장이 우리를 바다 한가운데 버려둘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팀원들의 어깨를 짓눌렀다.
역사적인 'S전자 MDC 시범 프로젝트'의 착수 보고회 날. 장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사업부장이 직접 참석할 거라 기대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시작 직전, 회의실 문이 열리며 사업부장이 특유의 위압감을 풍기며 걸어 들어왔다. 긴장 속에 보고가 끝난 뒤, 얼음처럼 차가운 침묵이 회의실을 메웠다. 그 정적을 깬 건 사업부장의 뜻밖의 한마디였다.
"I am not picky." (나는 그리 까칠한 사람이 아니다.)
긴장으로 굳어있던 장내에 짧은 웃음이 터지며 공기가 누그러졌다. 하지만 이어진 그의 목소리에는 단호한 힘이 실려 있었다.
"내가 이 프로젝트를 반대한다고 생각하겠지만 틀렸다. 우리 사업부는 지금 전 세계를 향해 새로운 파도를 창조하고 있다. 그 무엇도 우리의 속도를 늦춰선 안 된다. 이 프로젝트가 가속페달이 되어준다면, 내가 개인적으로 여러분 모두에게 상을 주겠다. 건승을 빈다."
예상치 못한 격려사에 팀원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거대한 파도의 끝자락을 붙잡은 것 같은 고무된 분위기. 하지만 그것은 곧 들이닥칠 폭풍전야의 고요였음을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이제 거인의 체질 개선을 위한 엔진의 시동은 걸렸다. 과연 이 글로벌 어벤져스는 현장의 거센 저항을 뚫고 엔진의 속도를 낼 수 있을까? 다음 글에서는 매 순간이 '최초'이자 '최고'여야만 했던, 사투의 디테일을 기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