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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책 Jun 20. 2023

가드를 올리세요

  2013년 4월 1일 10년 전 만우절. 거짓말처럼 동네 복싱체육관에서 복싱을 시작했다. 복싱의 목적은 다이어트였다. 회사 동료들의 다이어트 복싱을 하면 그렇게 살이 많이 빠진다는 소리에 동네 복싱체육관을 찾았다. 남자들이 많이 다닌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그때의 남자친구였던 현 남편이 굳이 같이 가서 결제를 해주었다.      

  복싱의 세계는 심상치 않았다. 첫날부터 스트레칭을 시작으로 러닝머신을 걷고 뛰고, 줄넘기하는데 너무 힘들어서 쓰러질 뻔했다. 거울을 보면서 복싱 기본자세로 뛰어야 했고 헬스 기구로 팔운동을 한 후 덜덜이로 마무리했다. 매일 가야 했지만 도저히 체력이 되지 않아 일주일에 세 번 이상은 가보자, 다짐했다.

  그런데 조금 이상했다. 내가 알고 있기로 다이어트 복싱은 음악에 맞춰서 하는 거였는데 내가 배우는 복싱은 남자 관원들이 배우는 동작과 같았다. 의아해하면서 관장님께 여쭤보니 여자 관원이 많지 않아 모두 정통 복싱을 배우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정통 복싱을 하면 살은 절로 빠질 거라고. 맙소사. 나는 본의 아니게 정통 복싱을 배우게 되었다. 

  무더운 그해 여름, 나는 복싱을 하면서 땀으로 점점 절어졌다. 여자 관원이 많지 않았던 탓이었던 것 같은데 관장님께서 다정하게 글러브도 선물하고 손이 아프다고 구시렁거렸더니 붕대도 하나 주셨다. 붕대를 감으면 손도 안 아프고 냄새도 안 난다고 했다. 글러브를 끼고 나면 땀 냄새가 상당했다. 붕대 감는 법은 교련 시간이 떠오르며 어려웠지만 냄새를 위해서라도 배워야 했다.     


  링 위에 처음 섰던 날의 긴장감이 생각난다. 평소와 같이 샌드백과 이런저런 몸 개그를 하고 있는데 항상 나에게 친절하게 알려주시던 관원이 고맙게도 맞아만 주신다고 해서 링 위에 섰다. 짧은 다리로 링 위에 올라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내가 맞는 것도 아니고 펀치만 하는데도 왜 이렇게 힘이 들었나 했다. 투 카운트까지 하고 한 카운트 더 하자는 거, 한 번 더 하면 내일 출근을 못 할 것 같다고 링에서 내려왔다. 숨이 너무 차서 숨 쉬는 것도 힘들었고 그 어느 때보다 빨랐던 내 심장 소리가 귀에까지 들렸다. 친절한 관원에게 진실은 알 수 없지만 주먹이 세다고 칭찬도 받았다.

  지켜보시던 관장님께서 대회 나가야겠다고 농담도 하셨는데 나는 몸무게 공개를 못 해서 절대 못 나간다고 웃으며 말했다. 두 명의 여자 관원들이 대회 준비로 체급 때문에 살을 빼기 위해 검은 땀복을 입고 훈련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못 할 일이라 생각했었다.

  링 위에서 배운 교훈은 동작을 크게 할 것! 그래야 상대도 공격을 못 하니까. 펀치를 방어하는 상대를 보니 가드를 올리는 것도 정말 중요했다. 나는 그날 링 위의 복서가 되었고 복싱은 점점 내 취미가 되어갔다.      


  처음 시작할 때는 줄넘기도 힘들고 스텝도 힘들어서 적응을 못 해 두 달 정도는 잘 가지도 않았는데 하다 보니 줄넘기 기술도 하나씩 터득했다. 학창 시절에도 못 했던 2단 뛰기를 마침내 성공했다. 내가 땀이 되는 시간은 기분도 상쾌했다. 

  나는 배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긴 한데 처음 적응 기간이 남들보다 긴 편이라 겁도 많고 엄살도 심했다. 하다가 그만둔 것도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한 정신력이 필요한 복싱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스텝마저 엉성했던 복싱에 천천히 적응해 나갔다. 내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는 무릎 때문에 진도는 더디지만, 원투펀치를 날리면 스트레스가 날아가고 좋았다. 

  관원들과도 친해졌다. 운동을 웬만큼 하고 온 관원들도 복싱이 제일 힘든 운동이라며 입을 모아 말했다. 쉴 새 없이 발로는 스텝을 뛰면서, 손으로는 잽과 펀치를 날리고 가드를 올리는 복싱은 정말이지 무척 힘이 들었다. 뜨거웠던 땀의 여름을 보내며 내 턱선이 조금은 날카로워져서 역시 복싱은 힘든 운동이라 저절로 다이어트가 된다고 생각했다.

     

  가을로 접어들면서 같은 해 12월. 급하게 결정된 결혼 준비로 복싱을 그만둔다고 말을 해야 했는데 차마 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만둔다는 말이 먼저 나온 것은 관장님의 입으로부터였다. 

  빌라에 있던 복싱체육관이 소음 때문에 빌라 주민들의 항의로 재계약을 못 해 폐업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복싱 메달리스트이자 내게는 늘 강해 보였던 관장님께서 남은 회비는 돌려준다고 계좌를 알려달라는 모습이 씁쓸해 보였다. 그렇게 반년 남짓한 나의 복서 생활은 끝났다.

  지금 내가 사는 동네에도 복싱체육관이 있다. 지나가다 복싱체육관 문이 열려있을 때 링을 보면서 호기롭게 복싱하던 그때의 내가 떠올랐다. 언젠가는 또 링 위에 설 수 있을까. 링 위에 선 내 모습을 상상해 본다. 원투펀치로 공격하고 바로 방어하는 가드를 올려야 한다. 응원해 주는 관원들과 관장님의 모습도 함께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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