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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책 Aug 09.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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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가 운영하는 동네서점 주책방. 주책방에는 <주주글방>이라는 글쓰기 모임이 있다. 두 달 동안 격주 화요일 저녁에 만나 첫 번째 모임에서는 쓰기 관련 책으로 독서 모임하고 주제를 정한다. 이후 모임부터는 정해진 주제로 글을 쓰고 함께 나누는 시간을 가진다. 

  7월 11월 화요일 저녁,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독서 모임을 마치고 7월과 8월에 써야 할 주제 3개를 정해야 했다. 각자가 생각해 온 8개의 주제를 적어 네모나고 투명한 뽑기 통에 넣었다. 7월부터 새로이 글방 식구가 된 분들이 하나씩 뽑기 시작했다. 

  우정 님이 그늘, 재연 님이 공포, 희연 님이 고독을 뽑았다. 공포는 그녀가 적었던 주제였다. 여름이면 글방 친구들의 글로 읽고 싶었던 주제라 넣었지만, 막상 두 번째 주제로 뽑히면서 써야 한다고 생각하니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녀가 처음 쓰려고 했던 공포는 주책방을 운영하면서 느꼈던 공포의 순간들이었다. <귀한 곳에 누추한 분들이>라는 제목의 글을 구상했다. 책방에 오는 이상한 사람들에 대해 쓰고 싶었다. 이상한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끊임없이 계속 왔다. 

  요즘 그녀에게 글쓰기는 푸닥거리였다. 7월 천경자 전시를 보면서 딱 그녀의 마음이다 싶은 부분이 있었다. 글 쓰는 일은 작가에게 맺힌 한을 풀어내기 위한 일종의 ‘푸닥거리’와도 같은 것이라며. 그녀 역시 글을 쓰면서 맺힌 한을 풀고 싶었다.

  <귀한 곳에 누추한 분들이> 그 글로 푸닥거리를 더 하고 싶었지만, 아직도 공포 상황은 계속되고 있기에 차마 쓸 수가 없었다. 그 글을 씀으로써 다시 그 공포를 꺼내기에는 아직은 아닌 것 같았다. 언젠가는 그 한을 풀어 보리라 다짐하면서.

    

  그래서 그녀는 주책방의 주방 찬장에 있던 독이 담긴 병을 꺼냈다. 공포에서 꺼낼 주제는 독이다. 그녀는 늘 독에 관심이 많았다. 이 독은 어디서 났는가. 오랜 친구 연금에게 선물 받았다. 그녀는 킬러인 연금과 독에 관해 글을 남기고 싶어서 <중독>이란 글을 쓴 적이 있다. 

  연금에게 받은 H7. 무색무취의 독. 이 독을 먹으면 7시간 후 심장마비로 죽게 된다고 했다. 부검해도 검출되지 않는 독. 이 독 때문에 죽었다는 것을 아무도 모른다. “사람은 누구나. 모두. 다 죽는다. 나는 죽음의 시간을 조금 더 빨리 앞당겼을 뿐. 내 일을 했다.”라는 연금의 말이 떠올랐다.

  에피파니. 그녀는 글에서 등장인물의 생사를 마음대로 할 수 있음에 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인류를 멸망시킨 적도 있는 그녀는 글 안에서 신이었고 무한한 자유를 꿈꾸었다. 이 독으로 누군가를 죽일 수 있다. 누구를 죽일까. 독을 꺼냈다면 이 독은 써야만 한다. 독이 담긴 투명한 병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뚜껑을 열었다.

     

  주주글방에서는 늘 차와 커피를 제공한다. 8월 8일 글방을 준비하면서 초록색 커피잔과 로얄알버트 찻잔, 금테가 둘린 투명한 잔을 꺼낸다. 몇 개의 잔에 독을 바를까. 아니면 다 발라 버릴까. 누가 어떤 음료를 고를지는 짐작이 된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잔 바닥에 독을 바르기 시작한다.      

  B에게 우정 님, 그늘 준태 님, 그늘 속의 수연 님, 그림자 희연 님, 안녕 태연님, 이젠 혜림 님, 태양도 재연 님. 주주글방 친구들에게 질문합니다.

  여러분은 오늘, 어떤 잔을 선택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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