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만 마늘의 민족이 아니였다.
오프데이에 닭 한마리를 사서 대파, 마늘만 넣고 대충 끓인 삼계탕 아닌 삼계탕(?)을 먹고 다음 날 출근했더니 마늘 냄새나니까 입 열지 말라는 파트장말에 괜시리 무안해졌을 때만 해도 이탈리아 사람들은 마늘을 싫어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오해였음을....
한국에 100일동안 쑥과 마늘을 먹고 사람이 된 곰 이야기가 있다면, 이탈리아에는 '바냐카우다'와 '알리오 에 올리오'가 있다. 알리오 에 올리오가 이태리 요리인 건 공효진 배우가 나왔던 드라마 <파스타>를 보다가 알았지만, '바냐카우다'라는 건 몰랐다.
이제 막 겨울이 오려는 11월 말 아침, 출근했더니 주방에 통마늘 30키로가 와있었다.
마리오가 "네가 우리 중에 마늘을 가장 좋아하니까 오늘 마늘 손질은 네가 해"라며 마늘 껍질을 까고, 꽁지를 떼고, 반으로 갈라 안의 심지를 빼고, 얇은 편으로 써는 시범을 보였다.
정말 단순한 작업이었지만 난 그날 아침부터 밤까지 그 마늘 손질만 하다가 하루가 끝났다.
또 마늘껍질은 왜 이렇게 안 까지는지. 껍질이라도 손질 된 깐마늘이었다면 그렇게까지 오래걸리진 않았을텐데.
오후 쯤 되니 손톱 밑 부터 아려오기 시작했다.
대체 뭘 만들기에 이 많은 마늘을 손질 하라는 건지 궁금해졌다.
"이거 뭐 할건데?"
"바냐카우다 만들거야. 너 바냐카우다 뭔지 알아?"
"아니, 몰라"
"마늘이랑, 엔쵸비로 만드는 소스야. 내일은 엔쵸비 손질 하면 돼!" 라며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웃어보였다.
엔쵸비는 또 얼마나 많이 손질하라고 하려나 싶었지만 그 날의 나는 마늘까기에 정신이 다 팔려있었다.
내 옆의 일본인 캔 상이 내 손을 걱정해 주며 '뭐 이런 개같은 일을 시키냐'는 둥 욕을 남발했다.ㅋㅋ
"아냐, 난 마늘 좋아해서 괜찮아~!" 하고 있는 내게 마리오가 슬쩍 다가와 말한다.
"오 씨스터~~ 너 이제 한동안 마늘 먹고싶지 않을거야"
그 날 밤 나는 손끝이 너무 아려서 잠을 잘 못 잤다. 손 끝을 보며 그깟 마늘 30키로 깐 걸로 이렇게 약한척 하지말자, 생각하다가도 아픈걸 어째!
다음날 출근하니 정말 내 앞에는 커다란 엔쵸비 통조림이 세 통 놓여져 있었다. 그 날은 하루종일 엔쵸비 뼈를 발라내야 했다. 세상에. 멸치 뼈를 발라먹는 사람이 어디있어요! 그냥 먹으라구! 싶었지만 하라면 하라는 대로 해야 된다.
고단한 몸을 이끌고 침대로 뛰어들어가니 온 몸에서 생선냄새가 나는 것만 같았다.
도대체 바냐카우다가 뭐길래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냔 말이야!
바냐카우다란, 올리브오일, 앤초비, 마늘로 만든 소스를 뭉근히 끓여가며 카르둔, 피망, 아티초크, 비트, 순무, 엔다이브, 양배추, 양파 등의 다양한 제철 채소와 빵을 찍어 먹는 이탈리아 피에몬테 지방의 전통 요리다.
우리 레스토랑은 1년에 단 하루 '바냐카우다 데이' 행사를 한다. 그 날은 정규 코스 말고 바냐카우다와 피에몬테 지방의 전통적인 라비올리 '아뇰로띠 달 플린'을 서브했다.
완성된 바냐카우다 소스는 단언컨대 한국인도 좋아할만한 맛이었다. 마늘과 짭조름한 엔쵸비, 올리브오일을 뭉근하게 끓였기 때문에 생마늘도 잘 먹는 한국인 취향에 아주 적합한 요리라고 할 수 있다.
본식으로 서브된 아뇰로띠 'Plin' 은 북부지방 스타일의 라비올리이다. 바냐카우다데이에는 특별히 갖가지 채소와 소고기를 넣고 저온에서 반나절 끓여 만든 육수에 담겨 마치 만둣국의 모양으로 완성되었다.
일이 너무 바빠 아쉽게 그날의 완성접시는 카메라에 담지 못했지만, 만둣국처럼 육수에 라비올리를 담아 먹기도 하는 것을 보며 다른 언어를 쓰고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어도 구현하는 요리의 모양새가 이리 비슷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랍고 신기했다.
그 무렵 나는 주방 막내로서 대량의 재료손질은 거의 내 몫이었다. 가을 어느 날엔 하루종일 밤 만 까기도 했고, 포르치니 버섯에 붙은 작은 벌레들과 흙을 벗겨내는 작업으로 하루를 보내기도 했다.
누군가 호텔 레스토랑 인턴 시절 하루종일 양파만 깠다는 이야기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님을 몸소 느끼던 나날들이었다. 그 시간이 따분하고 의미없이 느껴질 법도 했지만 꼬마요리사였던 내가 완성접시를 마주할 때의 그 행복감은 지금 와서도 이루 말 할 수 없다.
바냐카우다 데이에도 마찬가지였다. 완성접시를 마주하니 며칠 내내 마늘과 엔쵸비와 씨름하면서 한숨을 푹푹 쉬던 시간들이 순식간에 뿌듯함으로 바뀌었다. 바냐카우다 소스를 보며 "이 마늘 내가 다 깠고, 엔쵸비 뼈도 내가 다 발라냈어!" 라며 뿌듯한 표정을 짓는 내게 다들 엄지척 해 보였다.
마리오는 "씨스터! 그렇게 좋아한다니 너 마늘 30키로 또 까야할지도 몰라ㅋㅋㅋㅋ"라며 나를 놀렸다.
마리오에게 내가, “마늘은 한국인만 좋아하는 줄 알았어” 라고 했더니 콧바람을 뿜으며
“마늘 냄새는 싫지만 너무 맛있잖아. 나 저거 혼자 다 먹을 수도 있어!” 라고 한다.
역시는 역시! 미식의 나라는 역시다!
마늘의 민족 한국인이 인정해준다! 마늘부심을 그대들에게도 허락해주겠다. 하하
그 시절 패기롭고 열정적이었던 내 모습이 귀여워보이기도 한다. 중요한 조리과정을 맡은 건 아니였지만 맡은 일에 진심을 다 하며 행복해 했던 그 때가 가끔 그립기도 하다. 기본기를 다지기 위해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나 기본적으로 삶에 갖는 긍정적인 태도 같은 것들은 그 시절에 많이 배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