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나, 여러개의 가면
현재와 과거는 끊임없이 내전 중이다.
30대의 7~8년은 언제나 과거의 승리였다.
끊임없는 핑곗거리와 환경 탓을 하느라 과거 속에 파묻혀 현재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모든 원인을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에서 찾으려고 생떼를 부렸다.
친정과 시댁에서 아이를 함께 돌봐줄 여력이 없었다.
예민한 두 녀석을 혼자서 견뎌내야 했다.
아이들이 아프거나 내가 아프거나 해도 그 몫은 당연히 혼자서 감내해야 하는 나의 몫이었다.
내가 선택한 책무인데도 그 현실이 뼈아프게 외로웠다.
그 아픈 마음이 나를 향한 자책으로 이어졌고 자책하는 것이 지겨워질 때쯤 그 화살은 다른 사람을 향하고 세상을 향해 이어졌다.
그 가난한 마음이 ‘ 너는 아무것 도 할 수 없는 사람이야’라는 확신을 안겨주었다.
그 안에서 나는 한 없이 작고 무기력한 존재였다.
그 무엇 하나 제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던 시간이었다.
과거에 얽매인 나는 아이도 독립적으로 키우지 못했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 지도 몰랐다.
아이와 나는 독립적인 각자가 아니라 하나였다.
너무 밀착돼 있다 보니 나로서의 주체성과 아이만의 색깔이 흐릿해져만 갔다.
그런 안갯속의 흐릿한 날들이 꽤 오랜 시간 지속되었다.
그 미로 속에서 가을이는 울음을 터뜨렸다. 빛이 보이지 않는 안갯속이 무서웠을 터이다.
그런 아이를 보며 처음으로 현재와 마주했다.
무서워 애써 마주 보려 하지 않았던 내가 아이까지 그렇게 만들 수는 없다며 눈에 힘을 주어 현실의 나를 맞닥뜨렸다.
현재는 과거의 자신을 돌아보며 그 시간이 참으로 안타깝다며 자신 같으면 그런 아둔한 시간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과거와 싸웠다.
과거는 애써 자신의 목소리를 쥐어짜며 현재를 바라보며 말한다.
“현실의 나를 마주하는 일이 무서웠어, 나를 마주하면 예전의 나를 받아들여야 하는데 자신이 없었어.
외면하다 보니 내가 없더라.
내가 없으니 다른 사람이 바라보는 시선과 그 사람들과의 관계가 다 어색해져 버렸어.
하지만 노력해 볼 거야. 아이와 함께 달라져 볼 거야.”
과거는 현재와 애써 화해의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과거는 현재와 평형을 맞추기 위해 자신이 뭘 노력해야 하는지 되물었다.
둘은 처음으로 머리를 맞대고 서로가 언제나 그리기만 했던 대안들을 하나둘 기꺼이 꺼내 놓았다.
질문하고, 서로의 이야기를 호기심 있게 들어주며 과거는 실로 오랜만에 설렘이라는 기분을 만끽했다.
그 설렘이 자신을 희망찬 미래로 이끌어 놓을 거라는 자신감이 조금씩 차올랐다.
과거와 현재는 둘이 함께 공존할 평화협정서를 체결했다.
1. 반성은 필요하지만 비하는 금물.
2. 작은 성취의 기회를 만들기, 동기 부여 만들기.
3. 아이와 10cm 떨어져 거리두기.
4. 긍정적인 언어를 쓰고 자꾸 보기.
5. 나를 사랑하기.
그 일환으로 아이와 함께 책 읽기를 시작했다.
2주에 한번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렸다.
아이의 책이었지만 상관없었다.
비워있는 머리와 가슴에 그 어떠한 글귀라도 채워 넣어야 했다.
읽어주고 또 읽어주었다.
아이가 혼자서 글을 읽기 시작한 후로는 따로 함께 허겁지겁 글을 채워 넣었다.
책 안에는 내가 모르는 흥미진진한 세계가 들어있었다.
여러 상황과 감정들을 통해 슬펐고, 기뻐했고 감동했다.
어느 글귀는 나를 다독였고, 어떤 글은 나를 다그치기도 했다.
읽을수록 따스한 책들이 좋았다.
사람에게 상처를 받았던 사람이 사람들에게 상처를 치유받는 과정이 눈물 나게 고마웠다.
나에게 너도 ‘행복해질 수 있어’라고 희망을 주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차차 과거는 자신을 들여다볼 힘을 얻었다.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아.”
“몸이 자란다고 어른이 되지는 않아. 생각과 마음이 함께 자라야 진짜 어른이 되는 거야.”
이런 말들을 아이에게 자주 했었는데 그게 사실은 자기 자신에게 하고자 했던 말이었던 거 같다며 자신을 들여다보고 본인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현재는 그런 과거를 쓰다듬으며 칭찬했다.
“그래 그게 시작이야, 잘하고 있어 포기하지 말고 근근이 이어나가 보자. 그게 네가 제일 잘하는 일이잖아.”
과거는 처음으로 자신에게 칭찬을 해준 현재에게 고마웠다.
그리고 정말로 잘하고 싶어졌다.
자신이 현재와 함께 작성한 평화협정서의 내용을 매일매일 복기하고, 추가하며 현재와 함께 그려나갈 내일이 설레 이기까지 했다.
내일은 또 어떠한 나를 발견하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