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차 -브라이에즈 호수

by Ju de Pomme

돌로미티에 여행을 시작한 후 처음으로 잠을 푹 잤다. 난방이 잘 된 따뜻한 방, 푹신한 침대 그리고 정갈한 침구에서 잠을 잘 수 있는 것이 이렇게 큰 호사 일 줄이야. 매일매일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들에 대한 감사함을 새삼스럽게 느낀다. 나는 여행을 “익숙함으로부터의 탈출”이라고 정의 내린다. 그렇게 익숙한 것에 탈출해 새로운 것을 만나면 설렘과 새로움이라는 즐거움이 동반되는데, 이런 경험을 통해서만 그 “익숙함”에 대한 감사함을 느낄 수 있다. 어딘가 멀리 떠나는 것은 사실 집의 소중함을 알기 위해서라고. 내가 결론 내린 “여행의 필요성”이다.


커튼을 여니 통 창으로 아침햇살이 따사롭게 방 안으로 들어온다. 부지런한 트레커들이 텐트 뒤로 난 산 길로 벌써부터 산행을 나선다. 우리도 슬슬 일어나 하루를 준비했다.


오늘의 행선지이자, 우리 여행의 마지막 목적지는 바로 브라이에즈 호수(Lago di Braies)이다.


브라이에즈 호수는 이탈리아 돌로미티 북부 프라크스 계곡(Prags Valley)에 위치한 해발 약 1,494m의 아름다운 산정 호수이다. 주변의 깎아지른 듯한 돌로미티 봉우리들이 투영된 짙은 에메랄드빛 수면과 함께, 통나무 보트를 빌려 노를 젓는 동화 같은 풍경으로 유명하다. 깊고 맑은 물과 호수변을 따라 조성된 쉬운 산책 코스 덕분에 트레킹 목적이 아닌 관광객들에게도 인기 있는 돌로미티를 대표하는 인기 명소이다.


브라이에즈 호수도 트레치메와 마찬가지로 입장료나 케이블카 요금이 없는 대신 주차장을 미래 예약해야 한다. 우리가 예약한 주차장 요금은 17유로이다. (참. 브라이에즈 호수 주차장은 1 주차장, 2 주차장, 이렇게 번호가 있는데, 가까운 곳일수록 요금이 비싸다. 미리미리 계획하기 좋아하는 친구가 여기저기 찾아 적당한 거리에 싼 주차장을 잘 찾아 예약했다. 그런데 이 주차장 이름이 일반적인 “브라이에즈 호수 제3 주차장” 이런 게 아니라, “누구누구네 농장” 이렇게 되어 있어서 요금을 지불하면서 우리는 꽤나 불안해했다. 혹시 이탈리아에서 인터넷 사기 당하는 건 아닐까 하고…)


호수는 우리가 묵는 캠핑장에서 66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자동차로 1시간이 조금 넘게 걸린다. 이곳 까지는 지금까지 가보지 않은 새로운 길을 이용했는데, 기존 돌로미티 산행 운전 시에는 보지 못했던 들판이나, 산업 지역을 꽤나 지나쳤다. 고속도로처럼 보이는 잘 닦여진 도로를 지나치기도 했는데, 관광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외 돌로미티에 주민들이 어떻게 생활하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여유롭게 아침을 보내고 11시가 넘어서 출발한 우리는 1시 30분이 돼서야 도착했다. 주차장은 브라이에즈 호수와 딱 적당한 거리였다. 주차를 하고 호수로 향했다. 호수 주위는 여행객들로 분주하다. 입구 오른쪽에는 호텔과 레스토랑 그리고 작은 기념품 가게가 있고, 왼쪽으로는 호수에서 보트를 탈 수 있는 선착장이 있다. 우리는 먼저 오른쪽으로 호수 둘레를 한 바퀴 돌기로 했다. 호수는 말 그래도 아름다운 에메랄드 빛을 하고 있다. 어디서 보는지에 따라 호수의 색도 변한다. 호수 위에 그림처럼 떠있는 나무배들과 어우러져 마치 동화 속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라푼젤에서 라푼젤과 플린 라이더가 보트를 타고 랜턴을 날리는 장면이 연상되었다. 혹시 그 장면이 이곳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게 아닐까 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브라이에즈 호수를 반쯤 돌면 조약돌이 펼쳐진 호수변이 나오는데 그곳에 여러 마리의 소들이 어슬렁 거리며 풀을 뜯거나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관광객들이 익숙한 듯 가까이 와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에게 꽤나 호의적이다. 그중 물가에서 물을 먹고 있던 소에게 다가가 나도 소와 함께 기념사진을 한 장 찍었다. 시골출신이지만 소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건 처음이어서 친구와 나는 꽤나 신기해했다. 한가로이 즐기던 소들이 갑자기 일어나 한 곳으로 향해 무슨 일인가 했더니, 소들의 주인인지 아저씨를 따라나선다. 신기하게 소들도 주인은 알아 보나 보다. 그렇게 소는 아저씨를 따라 산 뒤쪽 어디론가 향했다. 아마도 아저씨의 목장이 호수 뒷 쪽 어딘가에 있나 보다.


우리도 다시 길을 나섰다. 이제 오늘 점심을 먹을 적당한 자리를 골라야 한다. 오늘의 점심은 특식이다. 바로 “컵 라 면”! 원래는 산행 시에도 한번 정도 컵라면을 먹을까 생각했었는데. 뭐랄까 라면을 먹을만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마침 오늘이 마지막 행선지이고 호수는 산보다 은밀(?)하게 라면을 먹을 곳이 더 많지 않을까 했는데 딱이었다. 우리는 적당히 가려져 흡사 프라이빗 비치를 연상케 하는 호숫가에 자리를 잡았다. 역시나 호숫가에서 먹는 라면의 맛은 일품이었다. 황홀한 브라이에즈 호수 뷰는 최고의 반찬이다.


든든히 배를 채우고 다시 길을 나섰다. 호수변의 트레킹 코스가 끝까지 연결되어 있는 것 같지 않아 우리는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갔는데, 알고 보니 호수 주변을 모두 돌아 처음 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호수 입구에 지도를 보니 친절하게도 트레킹 코스가 설명되어 있었다. 어디 가나 지도는 잘 봐야 한다.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선착장을 지나 반대편 호수가를 한번 돌아보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고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 마트에 들러 오랜만에 소고기를 샀다. 이번에 늙은 소고기 아니고 젊은(?) 소고기다. (젊은 소고기라고 특별히 쓰여있는 건 아니니 오해 마시길) 숙소로 돌아와 나무 텐트 앞에 자리를 펴고 앉았다. 지글지글 소고기 굽는 소리와 고소한 냄새가 풍긴다. 이렇게 돌로미티의 날들도 서서히 끝자락으로 향하고 있다.


내일은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어 우리는 오래전부터 빈 둥 거리는 하루로 지정해 두었다. 이 캠핑장에서 빈둥 거릴 생각을 하니 그것도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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