小貪大失 (소탐대실)

by Ju de Pomme

남편은 나를 놀리고 싶을 때 “라딘(Radine)”이라고 부른다. “라딘”은 프랑스어로 “구두쇠”라는 의미다. 이럴 때마다 나는 당신은 “데펀시에(Dépensier)”라고 놀리며, “나는 라딘이 아니라, 계획적이고 합리적으로 소비하는 거야”라고 말한다..


(사실 남편은 이것저것 쓸데없는 물건을 사다 모으는 걸 좋아해 내 속을 썩여 붙여준 별명이다. 당연히 남편은 싫어한다.)


그런데 얼마 전 나는 나의 이 “계획적이고 합리적인 소비 습관” 때문에 크게 한방 먹은 사건이 생겼다.




2025년 10월


내년 2월 말이면 워킹 비자가 만료된다.

오래전부터 생각해 오던 10년 비자를 이번 비자 갱신 기간에 맞추어 신청해야겠다고 계획한다. 이렇게 하면 비자신청 시 내야 하는 225유로의 행정 비용을 한 번만 내도 되니 얼마나 합리적인가! 나의 소비습관과 철학과도 딱 들어맞는 완벽한 계획이다.


그렇게 나는 달력에 주요 마일스톤과 데드라인을 표시해 가며 필요한 서류를 차근차근 준비했다.


10년 비자 신청 시 꼭 필요한 서류 중 하나가 언어 인증서다. 최소 A2 이상의 프랑스어 능력이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마침 2025년 세웠던 계획 중 하나가 DELF B2 시험에 도전하는 것이어서 이것 또한 완벽하게 내 계획에 부합함이라며 나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했다.


문제는 DELF 시험을 등록하는 것이었는데, 체류증 갱신 혹은 학교 입학을 위해 DELF 시험 수요가 많아서 웬만해서 시험날짜를 잡을 수 없어서였다. 어렵게 잡은 시험 날짜는 11월 5일. 시험 결과는 5주 후에 가능하다고 하니 12월 초 정도 되겠다. 조금 타이트한 일정이긴 하지만 시험을 통과해 인증서를 받게 된다면 가능했다.


10년 비자 갱신에 필요한 서류는 생각보다 많았다. 보통 최초 비자 신청 시에만 필요한 “Acte de naissance(출생증명서)”라던가, 지난 5년 동안 납부한던 소득세를 증명하는 서류등이 필요했다. 일찌감치 준비에 들어갔던 차에 이런 모든 서류들을 시간에 맞게 제출하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모든 서류들을 미리 비자 갱신 플랫폼에 업로드해 두었다. 이제 12월 초면 나올 DELF 시험 성적 증명서만 첨부해서 “Submission (제출)” 버튼만 누르면 되게 완벽하게 준비를 하고 나는 12월 초 한국으로 향했다.


시험 결과는 정확히 5주 후인 12월 10일에 나왔다. 다행히 DELF B2 시험 합격이다. 인증서 (Certificate)이 나오는 데는 3달 정도 더 걸리지만 함께 첨부한 “Attestation (증명서)”으로 모든 행정 혹은 학교 입학에 필요한 서류로 가능하다고 하니 얼른 다운로드하여 퍼즐의 잃어버린 마지막 조각을 맞추듯 비자 갱신 플랫폼에 업로드를 하고 홀가분하게 “Submission (제출)” 버튼을 눌렀다. 이 날이 12월 11일.


그리고 나는 비자 갱신에 대한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2026년 2월


HR에서 의례적인 메일이 왔다.


“지금 이 메일을 받는 직원은 한 달 이내에 비자가 만료되는 경우이니, 비자 재신청에 대한 현재 상황을 공유해 주고 혹시 헤세피세 (récépissé - 거주 허가 신청이 등록되었음을 증명하는 서류로 정신 거주증을 받기 전에 경시청에서 발급하는 증명서이다)를 받았거나 이미 갱신된 새로운 거주증을 발급받은 경우에는 스캔해서 보내달라” 는 내용이었다.


비자가 갱신될 즈음이면 의례적으로 받는 메일에 나는 의례적으로 이미 12월 11일에 신청을 마쳤다며 제출 시 받은 “Confirmation de submission” (갱신 서류를 받았다는 확인증)을 보내주었다.


“12월 11일이며 갱신증 만료 두 달이 넘는 시점이니 충분히 시간 안에 헤세피세나 거주증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답장이 HR로부터 와 나는 크게 걱정 없이 일상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거주증 만료 열흘 전 즈음인 목요일 오후 5시에 경시청으로부터 메일이 왔다. 서류가 미흡하니 다음 두 가지 서류를 72시간 안에 보내지 않으며 모든 비자갱신 요청이 무효화된다는 것이었다. 서류 하나는 “Contrat d’engagement a respecter les principes de la republique”이라는 서류로 프랑스의 법과 사상 문화를 존중하고 따르겠다고 하는 서약서에 사인을 해서 보내는 것이라 크게 어려울 것 없는 서류였는데 다른 서류가 좀 까다로웠다. 이 서류는 회사에서 외국인 고용을 고용 노동청에 신청해서 노동청으로부터 확정을 받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서류였다. 일단 HR에게 이런 추가 서류 요청이 왔노라고 황급히 연락을 했다. HR은 회사 전담 변호사에게 연락해 이 서류를 경시청에서 제시한 72시간 내에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 물어보겠다고 했다.


월요일 아침이 돼서야 HR에서 연락이 왔다.


“Attestation de travail”를 보내면서 혹시 내가 가지고 있는 비자가 어떤 비자인지 물었다. 현재 가지고 있는 비자는 “Carte Bleue Européenne” 비자리고 했다. 그랬더니 의아하게 생각하며 왜 경시청에서 그 서류를 보내달라고 했는지 모르겠다고 하며, 혹시 이번에 갱신을 위해 신청한 비자가 “Carte Bleue Européenne”인지 물었다. 플랫폼에 가서 체크해 보니 “Salaire”였다. (아니 나는 Salarie - 회사원인데 이게 뭐가 문제지..?)


이렇게 퍼즐의 궁금증이 풀리기 시작했다. 나는 10년이 넘게 “Carte Bleue Européenne” 비자를 가지고 있었다. 이 비자는 고급인력을 위한 비자로 일정 수준의 교육 수준과 연봉을 맞추어야만 발급받을 수 있는 비자이다. 이 비자는 가지고 있으면 유럽 연합 어디에서든지 일할 수 있고, 가족의 비자를 받기도 훨씬 수월하다. 반면에 “Salarie”비자는 가장 기본의 취업비자이다. 당연히 변호사는 “Carte Bleue Européenne”로 갱신하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고 하며 경신청에 “Attestation de travail” 서류를 보내며 착오로 인해 “Salarie” 카테고리로 비자 연장 신청이 잘못되었으니 혹시 “Carte Bleue Européenne” 변경이 가능한지 요청해 보라고 했다. 그렇게 서류와 함께 메일을 보낸 지 하루가 지난 2월 17일, 체류증 만료 5일 전, 경시청으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메일이 왔다. 요청하는 서류를 72시간 내에 제출하지 않았으니 나의 비자 요청은 무효가 되고 “Carte Bleue Européenne” 카테고리로 재 신청을 하라는 내용이었다. 부리나케 HR에게 연락을 했다. 경시청에서 온 메일을 전달하며 이제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었다. 일단 변호사와 상담 후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내가 다니는 회사는 “Diversity (다양성)”을 회사의 중요한 정책으로 삼고 있다. 현재 유럽 시장을 관할하는 유럽 본사에 56개 국적의 직원이 일하고 있다는 것을 늘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지 회사에 체류증 문제로 골치를 겪은 직원들이 한두 명이 아니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사무실로 돌아온 나를 보고 직원들이 하나 둘 본인들의 경험을 풀어내기 시작한다. 나름의 접근방식과 해결법들은 하나둘씩 공유하는데 그제야 알게 된 사실 중 하나는 10년 체류증은 기존 비자와는 별도로 신청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료되는 비자 갱신에 맞춰 10년 체류증을 신청하겠다고 세운 나의 계획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2월 22일 비자가 만료되었고, 그 사이에 공식적인 업무를 허락하는 어떠한 서류도 받지 못했다. 결국 나는 의도치 않게 갑자기 단기 실업자 아니 불법 체류자(sans papier)가 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불법 체류자는 아니지만 말이다)


HR에서는 최소 헤세피세 (récépissé)는 있어야 공식적으로 근무를 할 수 있다며 이 서류가 없이는 노동 계약을 정지해야 한다고 했다. 계약의 정지가 계약의 만료는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고 여러 번 말하면서도, 이 기간 동안에 당연히 월급은 지급될 수 없고, 회사에서 제공되는 어떠한 혜택 (회사차, 뮤추엘 등)도 받지 못한다고 했다.




결국엔 나는 “계획적이고 합리적”인 소비를 하지 못했다. 아니 그로 인해 어쩌면 더 큰 손실 본 것일지도.


나는 의도치 않게 파리의 봄을 이렇게 실업자로 만끽하고 있다. 솔직히 나쁘지 않은데? 월급이 없다는 건 좀 아쉽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