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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싼타페 Jul 09. 2020

빌어먹을 IMF

첫 직장, 첫 사랑 동시 폭망

    97년 12월.  많은 국민들에게 잊을 수 없는 상처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주었던 IMF.  국가 신용등급은 몇 단계나 하락해 버렸고 많은 이들이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야만 했었던 상황 속에 나 역시도 어찌하지 못하고 파편을 맞았다.  삼 형제가 달랑 하나 있는 아파트를 담보삼아 사업을 하는 영세업자들이다 보니 뒷심이 부족해 버티지 못하고 하나 둘 쓰러져 갔고 마침내 아파트마저 넘어가버리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나 역시도 덩달아 극심한 피해를 입게 되었다.       


    20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한 삼미 그룹의 신입 사원 채용 취소 통보를 받은 것이 그 시작이었다.  당시 삼미 그룹이라면 삼미 슈퍼스타즈라는 프로 야구단을 가지고 있을 만큼 위풍당당한 대기업이었다.  그런 곳을 그것도 첫 직장을 400명이 넘는 지원자들 속에서 단 2명의 합격자 명단에 당당하게 이름을 올렸건만 순전히 남의 탓으로 인해 똑 떨어졌다.  아니 떨어진 게 아니라 취소되었다.  합격 통보를 받은 날 여친 집에 가서 결혼 허락을 받았고, 취소 통보를 받은 날 집이 경매로 넘어갔다는 통보를 받았다.  생각지도 못한 날벼락을 맞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나를 진심어린 마음으로 위로해주던 그녀였지만 초라하게만 느껴지는 내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아 그녀의 연락조차 받아 줄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런 나를 원망하면서도 계속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를 보내왔지만 그에 대한 답장조차 해주지 못했다.  만나서 밥 한 끼 사주지도 못하는 내가 나름 잘 사는 집 막내딸을 몰락한 집으로 데려오기엔 그 모난 자존심이 발목을 잡고 놔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에게 웃음을 주기는커녕 근심거리로 전락해버린 내 모습을 그녀에게 보이기란 정말 죽기보다 싫었다.


    형제들은 빚쟁이들을 피해 도망 다니고 홀로 남은 막내(나)는 뒷감당을 해야 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경매가가 그리 나쁘지 않아 남은 돈으로 작은 지하방을 전세로 구할 수 있었고 추운 겨울에 홀로 이사를 했다.  이사하는 날 눈은 또 왜 오는 건지.  눈 때문에 급경사를 올라가지 못하는 트럭은 내 앞날을 예견하는 듯 했다.  눈은 자고로 풍요의 상징이건만...  


    대충 집 정리가 끝나고 한 달 쯤 후에 어머니가 오셨다.  뭐 이런 곳을 구했냐며 구박을 시작하시더니 아끼는 살림살이 다 버렸다며 동네방네 전화해가며 자식 흉을 보셨다.  왜 직접 안하시고... 가 아니라 이미 수차례 하고도 분이 안 풀려 그러신 것이다.  내가 사고 친 것도 아니건만 묵묵히 듣고만 있어야 했다.  평생을 일하시며 겨우 집 한 채 그나마도 대출까지 받아 마련하셨는데, 그 대출 갚으려 타국에까지 가서 일하셨건만 그 집은 온데간데 없고 반지하 전셋집이라니 속이 터질 만도 하실 것이다.  학교 다닌다는 핑계로 집을 돌보지 않은 책임도 없지는 않았기에 더욱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얼마 후 결혼을 약속했던 그녀의 결혼 소식이 들려왔다.  계속 연락을 받지 않아 한참을 괴로워하던 그녀는 이미 끝난 관계라 생각하게 되었고, 낙심하며 고통스러워 몸부림치는 딸의 모습이 보기 안쓰러웠던 집안 어른들이 선을 보라고 날마다 권했다 한다.  마지못해 선을 보긴 봤는데 상대가 이미 아는 사이였다고.  해서 바로 날 잡고 양가 어른들께 인사 올렸다고 한다.  그 소식을 들은 나는 며칠을 밤마다 후회하며 울었다.  내 못난 자존심 때문에 그녀를 멀리 했구나.  그녀는 얼마나 힘들어 했을까.  그녀 품에 안겨 기대기라도 했다면 그녀는 결코 외면하지 않고 토닥여 주었을 텐데 내 못난 자존심 때문에.  그런 내가 너무도 못나보여 울었다.  울면서 견디다 못해 결혼이라는 도피처를 선택해야만 했을 그녀가 가여워 또 울었다.  그렇게 운 적은 처음이었다.  방음도 별로인 집에서 며칠을 울어대니 눈치 백단인 어머니가 눈치채셨나보다.  그래도 아들이라고 짠하고 안쓰러웠는지 한마디 하셨다.  뷰웅신, 지랄하고 자빠졌네.     


    그 후 7년간 마음의 상처는 아물지 않았고 어떤 이성도 만날 수가 없었다.  지나가다 그녀와 함께 즐겨 찾았던 카페라도 발견하면 마음이 아려왔다.  그녀가 좋아하던 스파게티 냄새를 맡을 때면 그녀가 그리웠다.  다정하게 손 잡고 걸어가는 커플들을 보면 그녀에게 달려가 손을 꼭 붙들고 함께 거리를 거닐고 싶었다.  첫 2년간은 그녀의 집 앞을 이유 없이 지나가기도 했을 만큼 그녀의 빈자리는 너무도 컸다.  서로의 성격 차이 등으로 헤어진 것이 아니었기에 사랑의 감정은 전혀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충분히 그런 나를 감싸줄 수 있었음에도 경제적 몰락이라는 이유가 내 못난 자존심을 건드려 그녀와 그녀의 부모님 앞에 서기 부끄러운 존재라 여기게 만들었다.  제 잘못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 아닙니다 저 아직 젊습니다 얼마든지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하며 패기 있게 말할 생각조차 못했을까.     


    지금이야 웃으며 이야기 할 수 있을 만큼 아름다운 추억의 한 자락으로 남았지만 누구에게나 그렇듯 첫 사랑의 실패는 정말 큰 충격이었다.  결국 세월이 흐른 뒤 26살의 꽃다운 아가씨를 그렇게 보내버린 나는 37살의 노처녀와 결혼하였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건 그녀는 두 살 차이였고 지금의 아내는 세 살 차이라는 것 정도?  그때 그녀와 결혼하였다면 지금쯤 어땠을까하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러기엔 나 하나만을 바라보는 아내와 징글징글한 두 아들이 너무 소중하다.  등에 하나 양 팔에 하나씩 모두 합해 셋이나 되는 껌딱지가 찰싹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모르는 지금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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