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싼타페 Jul 30. 2020

독자들을 위한 기획 소설

내일은 온다.  올까?  와야 할텐데...

    그간 무거운 주제를 쓰다보니 지겨우셨을 독자님들과 괜한 고집으로 생고생을 했던 저를 위해 초간단 초단편 기획 소설(?)을 준비했습니다.  반 이상은 제 경험담입니다.  혹 반응이 좋으면 장편으로 쭈아악 늘려볼 의향도 있습니다.  좋은 하루, 행복한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따르르르르릉...     


    누구 숨 넘어가게 만들려는 지는 모르지만 지가 먼저 숨 넘어갈 것 같은 못 생기고 목청만 큰 알람을 측은한 눈빛으로 째려보며 뒤통수 한 대 후려 갈겨 울음을 멈추게 하고는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상쾌하게 하루를 시작하고 싶었지만 간밤에 잠을 설쳤더니 몸은 무겁고, 입맛마저 없다.  커피나 한잔 마셔야겠다싶어 믹스 봉지를 하나 꺼내 컵에 털어 넣고 새로 장만한  최신식 정수기에 잔을 대고 물을 부었다.  이런, 찬물이다.  잠이 덜 깼나보다.  다시 타야 하나?  에이, 관두자.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회사로 향하는 발걸음이 왠지 무겁다.  잠은 다 깼지만 간밤에 잠을 설치게 만든 원인이 아직까지 꼬리를 물고 내 뒤를 쫄랑쫄랑 따라오기 때문이다.  잠을 설친 이유?  사실 별 것도 아니다.  오늘 저녁 친구 와이프의 주선으로 소개팅이 있다.  그것 뿐이다.  그런데 왜 잠을 설쳤을까?     


    내 나이 서른.  세상 사람들 모두를 연민의 눈빛으로 바라보게 만든다는 그 이름만 화려한 모태 솔로다.  잘난 것은 없지만 그렇다고 어디 가서 빠지는 외모도 아니건만 여친이 없다.  지금까지.  사실 내 주변에는 여자들이 많다.  가족을 봐도 나만 남자다.  아버지는 어린 나를 홀로 여우들 틈에 던져놓고는 훌쩍 가버리셨다.  참으로 현명한 분이셨던 것 같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교회에 가도 여자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회사도 디자인 계통의 특성상 여자뿐이다.  남자는 팀별로 한 명 있을까 말까한 탓에 희귀 생명체 정도로 대우 또는 취급 받는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내게 호의적이다.  하지만 그녀들의 호의는 이성적 호의가 아닌 업무적 호의에 불과할 뿐이다.  무거운 물건 옮기는 일이나 정수기 물통 가는 일 등에 남자의 근육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니까.  물론 가끔은 이성적으로 다가오는 여인들도 있긴 했지만 죄다 수류탄들 뿐이다.  나는 가까이 다가와 친한 척 해대는 그녀들의 머리 위로 삐죽 튀어나온 핀을 뽑아 바깥으로 던져 버리고 '전방에 수류탄'이라고 크게 외치고 싶은 욕망이 솟구치곤 했지만 공공의 적이 될 수 있으니 참아야만 했다.  사회생활은 내게 인내심을 배우도록 해주었다.


    여친이 없을 수밖에 없는, 불과 몇 달 전에 알게 된 치명적인 결격사유가 나에게 있었다.  모든 사람들에게 특히 여자들에게 친절하다는 것이다.  여자 일색인 가족들 사이에서 자라다보니 남자들보다는 여자들이 훨씬 대하기 편했고 성격상 상대에게 최선을 다해 대할 뿐 바람둥이 기질 같은 것은 없다.  문제는 여자들은 자신만 특별하게 대해주는 남자를 원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친구의 와이프가 알려주기 전까지는...     


    사실 여친이 없어도 별 불편함이나 외로움이 없었으니 아마도 그것이 여친을 못 만난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간혹 지나가는 커플을 보면 길가에 핀 예쁜 꽃들을 보듯 그저 보기 좋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나도 저런 여친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없다.  이성을 이성으로 느껴본 적이 없으니 더욱 그러했다.  내겐 그저 여자 사람일 뿐이다.  물론 나도 운명적인 사랑을 만나 홀딱 빠져보는 상상을 해 본 적도 있다.     


    잠을 설쳐 텁텁해진 입맛을 달래보려 편의점에 들러 껌을 하나 샀다.  아름다운 아가씨 어찌 그리 예쁜가요 하며 광고하던 추억의 아카시아 껌.  조심스레 빨간 줄을 역방향으로 제끼니 예쁘게 벗겨진다.  제일 가운데에 있는 놈을 하나 꺼내어 포장지는 입에, 껌은 휴지통에 버렸다.  이런 된장, 내가 왜 이러나.  오늘은 아무래도 일진이 안 좋으려나 보다.  조심해야겠다.     


    여느 날과는 달리 유난스럽게 바쁜 하루를 보내고 파김치가 되어버린 몸을 이끌고 약속장소로 갔다.  오늘 같은 날은 그냥 사우나로 가 뜨거운 욕조에 몸을 푹 담그고 싶지만 약속시간이 코앞이니 아쉬운 마음 달래며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카페 문을 열고 둘러보니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친구의 와이프.  나를 먼저 발견한 그녀는 손을 흔들어 내게 오라고 한다.  그런데 마주 앉은 일행은 분명 오늘의 소개녀일텐데 뒷모습이 전혀 낯설지 않다.  음험한 기운과 막강한 전투력의 아우라가 그녀를 감싸고 있다.  자꾸만 눈에 들어오는 때려주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는 그녀의 뒤통수.  가까이 갈수록 정체를 알 수 있을 것만 같은 불안이 엄습해 온다.  두 사람이 함께 앉아있는 테이블을 서너 걸음 앞에 두고야  결국 그녀가 누구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한 살 어린 이모다.  하...  깊은 한숨이 절로 나온다.     


    우리 이모.  연예인 뺨치는 미모에 완벽한 바디라인, 거기에 성격도 좋고 능력까지 좋다.  피아노를 전공한 이모는 나름 알아주는 실력자인데, 긴 생머리를 휘날리며 연주하는 모습은 보는 이의 가슴을 절절 끓게 만드는 매력을 발산한다.  공부하느라 바빠 남자 친구 하나 구비 못했다는 이모.  우리 예쁜 이모.  나는 종종 그런 이모의 매력 포인트인 기다란 생머리를 살며시 움켜쥐고 쥐흔들어 봤으면 좋겠다는 기분좋은 상상을 하곤 했다.       


    지난 30년, 생일이 빨라 학교까지 같이 다닌 덕분에 지근거리에서 이루어지는 이모의 극진한 보살핌은 내 성질이 얼마나 못돼 처먹었는지 알게 해주었다.  아주 어릴 적이야 이모가 뭐하는 존재인지 알지도 못하던 덕분에 남자의 힘을 자주 아주 자주 온 몸으로 체험하도록 도와주었다.  그때 그 시절이 그립다.  하지만 그럴 때 마다 이모는 내겐 촌수로 할머니가 되시는 지 엄마한테 달려가 시퍼레진 눈을 보여주면서 대성통곡을 하곤 했다.  물론 그 후 나는 계산조차 되지 않는 촌수의 할머니에게 쥐어터지고 2차로 울 엄마에게 쥐어 터졌다.  마지막으로 이모의 분풀이 복수도 결코 빠지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나는 머리보다 몸이 먼저 이모라는 존재에 대한 권위와 위험성을 깨닫게 되었다.     


    이모와 나는 상극도 그런 상극이 없다.  드물게 죽이 맞아 재미나게 논 적도 있지만 보통은 서로 못잡아 먹어 아니 나를 못잡아 먹어 안달이 난 이모와 그런 이모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치는 모습이 바로 우리 둘의 관계다.  해외 명작으로 널리 알려진 ‘톰과 제리’가 딱 우리 이야기다.  가끔은 원작자가 우리를 알고 있나 싶을 때도 있다.  한 살 많은 조카를 휘어 잡아야겠다는 본능에 가까운  서열정리에 대한 욕망과 그런 이모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픈 자유를 향한 갈망이 부딪히면서 그렇게 되었던 것 같다.  이모가 정리 안 해도 어차피 나는 조카에 불과한 것을 왜 그리 정해진 서열을 굳이 확인하려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그러고보니 학창시절 내 주변의 여자들을 손수 정리해주신 분도 우리 이모였다.   


- 어??!!!

- 어?  이...모?

- 니가 여긴 웬 일이냐?  누구 만나러 왔어?

- 어라?  두 사람 아는 사이였어요?

- 내 조카야.

- 어, 저, 그게...

- 어허, 내뺄 생각 말고 좋은 말로 할 때 앉지.     


    우리 이모는 눈치도 빠르다.  아, 바로 눈치 챘어야 했는데 굳이 확인하려고 여기까지 들어오다니.  튀어보려던 나의 속셈은 이모가 가볍게 던져준 의미심장한 말 한마디에 꿀꺽 삼켜야 했고 도축장에 들어가는 소마냥 얌전하게 자리에 앉았다.  깔깔대며 뒤집어지는 속없는 친구 와이프, 친근하게 어깨 동무를 해주며 음흉한 미소를 그윽하게 담고 나를 바라보는 이모.  아, 신이시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새벽까지 이어진 수청은 오로지 내 카드로 감당해야 했으며, 두 여인을 위해 나는 눈물의 피에로가 되어 끝날 줄 모르는 공연을 이어가야 했다.     


    새벽 네 시.  내일 출근해야 한다며 일찍 보내준 이모의 배려에 감읍해 하며 두 여인을 집까지 모셔다 드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집에 가면 다섯 시.  씻고 나면 출근할 시간이겠지.  잠을 자야 내일이 올텐데.  자지 않고 바로 출근해도 내일일까?  그냥 이대로 잠들어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


----------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구독과 라이킷, 댓글로 격려해주시는 분들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

매거진의 이전글 # 편지 열 하나 / 저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