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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싼타페 Jul 30. 2020

# 편지 열 하나 / 저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처음 그대 없는 집에 들어가니 이상하더이다.  나 몰래 어딘가 숨어 그대 찾는 내 모습을 훔쳐보며 혼자 입을 막고 킥킥 거리고 있을 것만 같은데 아무리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구려.  그대 집에 없는 것이 맞건만 왠지 저녁을 하다 잊어버린 것이 있어 동네 슈퍼라도 간 것처럼 온기가 남아있는 것은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소.  집에 오면 늘 손부터 씻으라 하던 그 목소리 잊지 않아 깨끗하게 씻고 나왔건만 밥 먹으라는 소리 들리지 않으니 어색하기 짝이 없소.     


    옆 집에서 들리는 초인종 소리에 이제야 슈퍼에서 돌아오나 보다 하고 문을 열어주니 아무도 없더이다.  나 왔노라는 소리는 아이들 인사하는 소리와 함께 옆 집에서 들리니 머쓱해진 모습으로 문을 닫았구려.  늦은 시간 하나 둘 집으로 돌아오는 모습 보고 있자니 돌아올 기약 없이 멀리 떠나버린 그대를 잡지 못한 내 죄가 더 없이 크게 다가오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불러주는 이가 있기에 화답하는 몸짓을 보이건만 나는 누가 있어 불러주며 누구를 향하여 불러야 할지 모르겠소.  나만 홀로 존재하는 듯 하니 한기가 밀려오듯 떨리는구려.  나의 존재가 그대로 인한 것은 아니겠지만 그대로 인해 내 존재의 가치가 더해지고 내 주변의 가치들이 더해졌음은 그대 덕분이었소.  나를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는 두 눈에 따뜻함을 더하도록 해주었고 작은 것들이 더 아름다움을 깨닫게 해주었으며 가까이 있는 것들이 더 소중함을 알도록 해주었다오.  이제 누가 있어 내게 그런 것들을 가르쳐주고 일러주리오.     


    온 집안에 그대 체향 은은하게 배어 있으니 온기 되어 포근하게 해주는구려.  눈 감지 않아도 그대 모습 선명하니 보지 못하는 그리움이란 게 슬그머니 물러가는구려.  그대 그렇게 아직은 내 안에 있기에 견딜 수 있을 듯 하오.  처음 그대를 만난 때 두근거림이 지금도 있구려.  자리에 누워 눈을 감으니 그대 곁에 누운 양 심장소리 요란해지는구려.  내 아직 그대 사랑하는 마음이 변하지는 않았나보오.     


    아침에 눈을 떠도 그대 모습 볼 수 없으리란 생각에 처음 그대에게 청혼하던 때가 떠오르는구려.  비록 진수성찬이 아닐지라도 그대가 정성스레 차려주는 밥을 날마다 먹고 싶었소.  시간 날 때 마다 그대 손을 잡고 동네 한 바퀴 돌며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고 싶었소.  매일을 만나도 매일 헤어지는 것이 싫어 함께 자리에 누워 잠을 청하고 함께 아침을 맞이하고 싶은 마음에 결혼이 무척이나 하고 싶었더랬소.  마음은 간절했지만 용기가 안나 몇날며칠을 가슴 졸이며 애만 태웠는지 모르겠소.  그대를 만나 결혼하니 참으로 행복했소.     


    이제 그대와 헤어질 일은 없겠지만 만날 수도 없으니 그때와 다르지 않구려.  그대 차려주는 밥을 먹고 싶은데 그럴 수 없구려.  그대 손 꼭 잡고 산책하고 싶어도 할 수 없구려.  그대와 함께 누워 잠이 들고 아침에 일어나 그대 얼굴 보고 싶은데 어찌 해야 하오.       


    그대 있는 천국에서 그대가 차려주는 대신 없는 솜씨나마 내가 그대 위해 작은 밥상이나마 차려주면 어떻겠소.  영원히 아프지 않을 천국에서 날마다 산책하는 것도 좋겠구려.  여기서는 삶에 쫓겨 가고 싶은 곳도 제대로 못 갔지만 천국은 분명 아름다운 곳일 테니 어디든 다녀봅시다.  그곳은 돈도 필요 없을 테고 아무리 돌아다녀도 힘도 들지 않을 테니 발길 닫는 대로 마음껏 다녀봅시다.  토끼마냥 폴짝폴짝 뛰어도 보고 나비처럼 팔랑팔랑 날아도 보며 그렇게 다녀봅시다.  여서 못해준 거 거서 죄다 해주리다.     


    세상에 존재하고 있던 그대에게 처음으로 결혼해 달라 했을 때 그대 그러마고 선뜻 답해주었소.  이제 그대를 더욱 사랑할 수 있어 그대를 더욱 사랑할 수밖에 없기에 이제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도 여전히 존재하는 그대에게 다시 한 번 청혼하리이다.  그때처럼 흔쾌히 답해주기 바라오.     


    “저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 끝까지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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