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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칠양파 Oct 01. 2015

비포 선라이즈를 현실에서 기대하는 건 어려운 일일까?

에단 호크 (제시 역), 줄리 델피 (셀린 역) 주연의 영화 비포 선라이즈 (Before Sunrise), 1995년도 영화다. 벌써 19년이나 지난 영화이지만, 지금도 영화 같은 현실을 꿈꾸고 있다면 너무 낭만적인가? 어릴 때부터 여자라면 누구나 백마 탄 왕자에 대한 동화책을 여러 권 접하게 된다. 백설공주에서, 잠자는 숲 속의 공주에서 그녀들을 깨우는 남자들은 모두 다 백마를 타고 온 멋진 왕자님이다. 물론 내가 공주는 아니지만, 학습의 효과라고 해두자. 그 효과로 인해 성인이 되어도 여전히 어딘가에 있을 백마 탄 왕자를 놓칠 수가 없다.



유아기 때는 백마 탄 왕자, 드라마라는 문화를 접하고 난 후에는 멋진 재벌 2세에 대한 로망은 성인이 되어도, 혹시 하는 기대감에 여전히 꿈꾸는 소녀처럼  마음속 어딘가에 절대 끊어지지 않은 끈을 잡고 있었다. 그때 기차여행에서 백마 탄 남자는 아닐지라도 운명의 남자를 만날 수 있다는 꿈을 다시 꾸게 해 준 영화가 바로 비포 선라이즈다.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유럽 횡단 기차 안에서 셀린은 우연히 미국인 남자 제시를 만나게 된다. 실연의 상처가 있던 제시와 셀린은 나홀로 여행이라는 공통점과 기차라는 한정된 공간 속에서 심심(?) 하던 차, 이야기 꽃을 피우며 금방 친해진다. 그리고 도착지인 비엔나에서  꿈같은 하루 밤을 보내게 된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비엔나의 곳곳을 다니면서, 그들은 사랑, 실연, 아픔, 결혼, 인생, 죽음 등 인생에 대한 여러 얘기를 하면서 서서히 서로가 운명의 상대라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하루 밤이 지나고 다음날, 그들은 각자의 길을 떠나게 된다. 6개월 후에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서.



백마 탄 왕자는 내가 공주가 아니기에 현실에서 찾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기차 여행에서 운명적인 남자를 만난다는 건 왠지 어렵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영화가 허구이지만, 어느 정도 현실을 반영하기에 혹시 모를, 이런 기대쯤 한 번은 해도  되잖아하는 실현 가능한 꿈을 갖고 나홀로 기차 여행을 했었다. 여행이 아니어도 좋았다. 기차만 탈 수 있다면, 혼자 가는 출장에서도 만날 수 있으니깐.



그렇게 한번, 몇 년이 지나고 또 한 번, 혼자만의 출사를 위해 또 한번. 그러다 알았다. 영화는 영화구나. 현실에서 영화 같은 만남을 꿈꾸는 건 어렵다는 사실을 말이다. 응답하라 1994에서 삼천포로 내려가는 김성균이 옆자리의 어여쁜 누군가를 기다리지만, 결과는 할머니와 손자. 개구쟁이 손자로 인해 고생까지 하면서 그도 알게 된다. 현실과 이상은 다르다는 사실을 말이다.



물론 이렇게까지 친절히 안 알려줘도 안다. 영화는 영화, 드라마는 드라마, 동화책은 동화책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나 꿈을 꿀 수 있지 않을까? 그 꿈마저 없으면 삶이 너무 삭막해지지 않을까? 물론 복권 1등 당첨처럼 참 어려운 꿈이지만, 그러기에 더더욱 그 꿈을 꾸고 있는지 모르겠다. 꿈에서라도 에단호크 같은 남자가 내 옆자리에 앉아 살짝 눈 인사 후,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얘기를 시작하고, 그 시작이 점점 서로에게 흥미를 갖게 되고, 그 흥미가 결국 운명으로 마침점을 찍는다면, 캭~ 더할 나위 없는 행복한 꿈일 텐데 말이다.



혼자만의 여행에서 비어 있는 옆자리를 보고 있으면 왠지 모를 기대를 한다. 그리고 다음 정거장에서 문이 열리고, 들어오는 사람들을 쳐다본다. 가끔 괜찮은 사람이 보이기도 하지만, 그 뒤에는 항상 누군가가 있다. 그나마 개구쟁이 아이가 옆자리에 앉지 않으니 좋아해야 하나. 앉자마자 코를 골면서 자는 아저씨나, 같은 꿈을 꾸고 있어 서로가 불편한 이름 모를 여인, 대체적으로 현실 속 내 옆자리는 그냥 현실이다.



이제는 그런 꿈조차 사라져 버린 지 오래다. 그저 목적지만을 생각하고, 아이폰을 뒤적거리거나 책을 보는 등, 옆자리에 누가 앉든 전혀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더구나 운전을 하게 되면서 그 꿈은 완전히 파괴되어 버렸다. 물론 영화 속 히치하이킹으로 브래드 피트(델마와 루이스) 같은 운명의 남자를 만날 수도 있지만, 운명의 남자를 만날 확률보다는 강도를 만날 확률이 높기에 시도조차 못해봤다.



여자 아이들에게 백만 탄 왕자 동화책은 그만 읽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존재도 모른 채, 너무 큰 꿈만 꾸게 되기 때문이다. 세상에 왕자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희박하다. 그 속에서 나만의 왕자님을 기다리는 건 낭만적이 아니라, 현실을 제대도 직시하지 못하는 루저(?)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왜 루저임을 알면서도 여전히 왕자는 아니더라도 왕자 같은 운명의 남자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알면서도 버리지 못하는 건 중독인가? 아니면 그 꿈마저 사라지면 스스로 너무 비참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님을 알면서도 여전히 '혹시'에 목매고 있는 나, 비정상인가요? ^^;



백설공주, 잠자는 숲 속의 공주가 아니라 우리의 동화인 평강공주가 어떻게 보면 현실 속에서 진정한 왕자를 만난 최고의 여성이 아닐까 생각한다. 본인의 노력으로 왕자로 만들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찌질이 같은 남자를 만나야 하나? 솔직히 온달장군은 키, 외모 등 기본기는 갖추었다고 생각한다. 바보라 불렀던 이유는 스펙이 부족했기에, 그 부족함을 평강이 채워주니 누가 봐도 질투 날만한 남자로 변신했을 거 같다. 물론 잘 키웠다가, 부잣집 여자에게 뺏길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지만 말이다.



국내이기에, 유럽이 아니기에 에단호크를 만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건, 너무 억측이겠지. 그래도 또 '혹시' 모르니, 나홀로 유럽 여행을 떠나 볼까?! 백마 탄 왕자든, 운명의 남자든 다 좋다. 우선 떠나야 누군가를 만날 확률이 높아지겠지. 더 늦기 전에 오랜만에 나홀로 서울이 아닌 시리도록 푸른 바다와 하늘이 보이는 그곳으로 떠나고 싶다. '혹시' 또 모르잖아.



비포 선라이즈를 시작으로 비포 센셋, 비포 미드나잇까지, 감성을 촉촉하게 만들어 주는 참 좋은 영화다. 단, 영화로만 보면 말이다. 더불어 서로 알지 못했지만, 우연에 우연 그리고 또 우연의 만남으로 운명이 된 첨밀밀의 여명과 장만옥도 생각나네. 그러고 보니, 첨밀밀 같은 만남도 과정은 길지만 나쁘진 않았는데, 그럼 기차 대신 뭘 해야 하는 거지. 이러다 네버엔딩 스토리가 되겠다. 가을비를 보니, 내 안의 감성이 마구 폭발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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