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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칠양파 Jul 26. 2015

볼테르의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단 하나의 신념으로 세상을 살았던 한 남자!!

세상은 최선으로 이루어져 있고, 모든 건 다 최선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인물, 바로 캉디드다. 그에 이름은 프랑스어로 순박하다는 뜻. 이름 값 한다고, 캉디드는 그가 믿고 있는 신념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인물이다. 사랑하면 안 되는 그녀를 사랑한 죄로,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곳에서 쫓겨나 그에게, 톰소여의 모험처럼 대단한 모험이 펼쳐진다. 지구 한바퀴는 가뿐하게 다녀주는 센스.



전쟁을 겪고, 종교의 폐단을 보고, 사람을 죽이고, 자신 앞에 죽음이 와도 그는 여전히 '이 세계는 가능한 모든 세계 중에서 최선의 세계'라고 외친다. 17세기 고전 작품인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저자 볼테르)를 21세기를 살고 있는 이 시점에서 보면, 이질감이 든다. 아무리 소설이라지만, 이런 인물이 있을까 싶어 지니깐. 그러고 보니, 예전에 봤던 천사들의 합창이라는 드라마에서 '낭만적이야'를 외쳤던 그 아이와 캉디드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누가 봐도 절대 낭만적이지 않은 모습인데, 그 아이만은 낭만적이라고 믿고 있으니깐 말이다.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고, 자신의 호의를 나쁜 수단으로 악용하는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그는 점점 삶이 싫어지게 된다. 그래도 살아야 하기에, 단 하나의 희망만을 버릴 수 없기에, 그 희망을 위해 다시 살기로 한다. 그건 바로 사랑이다. 여기서도 사랑의 힘을 참 위대하다. 결국 그 사랑이 현실 앞으로 왔을 때 물러날까 고민도 하지만, 그는 그 사랑을 끝까지 지켜낸다.



200페이지 정도 되는 길지 않은 분량이어서 그랬는지, 빨리 읽었다. 지루하거나 길게 붙잡지 않고, 빨리 빨리 다음 에피소드로 넘어가게 만든다. 처음에는 완역본이 따로 있는지 알았는데, 읽은 이 책이 바로 완역본이었다.  중간중간 내용이 빠진 듯한 느낌이 들어서 완역본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었. 적은 분량이지만, 스케일 하나는  어마어마하다. 여느 판타지 소설 못지 않다.



특히, 상상의 나라로 알고 있는 엘도라도까지 나오는 장면에서는 이 소설이 대관절 어디까지 갈 것인가 하고 혼자 걱정이 되기도 했다. 엘도라도에 도착한 캉디드는 금과 루비, 에메랄드를 갖고 장난치는 아이들을 보면서 "여기가 도대체 어디란 말이야? 이곳 왕손들은 정말 교육을 잘 받았나 봐. 황금을 돌같이 여기는 걸 보면 말이지"(본문 중에서)라면서 놀란다.



그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엘도라도에 살아야 하건만 그는 또다시 지옥 같은 세상으로 나갈 준비를 한다. 속으로 미쳤구나 했다. 유토피아가 따로 없는 이 곳을 떠나니깐 말이다. 역시 이유는 사랑 때문이다. 그눔의 사랑이란, 17세기나 21세기나 위대하고 중요한가 보다. 엘도라도를 떠나면서 돌멩이를 한 아름 챙기고 나왔지만, 사람 좋은 캉디드는 계속해서 사기를 당한다. 당하고 또 당하고 그래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다. 이러니 개나 소나 그 앞에서 사기를 치게 된다.



모험도 모험이지만, 여기서는 사람이 죽지 않는다. 죽었던, 죽였던 사람이 살아나고, 또 살아난다. 그리고 이 넓은 지구에서 그들은 꼭 다시 만난다. 그것도 아주 드라마틱하게 만난다. 솔직히 고전이고, 꼭 읽어야 되는 책이라고 생각해서 읽었는데,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많이 나왔다.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감동을 주는 고전도 많은데,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는 감동보다는 콩트처럼 느껴졌다.


볼테르는 다재 다능한 작가로 이름이 높다. 그는 루소, 디드로, 몽테스키외와 더불어 계몽주의의 대표적인 철학자일 뿐만 아니라 시인, 극작가, 비평가, 역사가로서도 문명을 떨쳤다. 그러나 오늘날의 볼테르는 주로 그가 "철학적 콩트"라고 이름 붙인 소설들의 작가로 기억된다. 철학적 콩트는 볼테르가 자신의 철학적 사유를 대중에게 널리 전파할 목적에서 창안해 낸 새로운 문학 형식으로 일종의 우화적 소설이다. (p205)

소설 끝 부분 이 책에 대한 설명을 보니 왜 콩트처럼 느껴졌는지 이해가 됐다.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저자 볼테르)는 그 시대의 잘못된 폐단을 풍자한 부분이 많이 나온다. 포레스트 검프처럼 그 사건을 다 겪은 캉디드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더라도 나는 일이나 해야겠다라고 결심한다. 모든 게 최선이라고 말한 그가, 어느 시골 농부의 모습을 본 후 어떤 부자도, 어떤 왕도, 어떤 성직자도 농부보다 못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우화적 소설답게 캉디드와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다로 익사이팅한 모험의 끝을 낸다. 살짝 허무해졌지만. 나라면 엘도라도에서 놀고 먹고 그러고 살았을 텐데 말이다.


팡글로스는 때때로 캉디드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최선의 시계에서는 모든 사건들이 연계되어 있네. 만일 자네가 퀴네공드 양을 사랑한 죄로 엉덩이를 발길로 차이면서 성에서 쫓겨나지 않았더라면, 또 종교 재판을 받지 않았더라면, 또 걸어서 아메리카 대륙을 누비지 않았더라면, 또 남작을 칼로 찌르지 않았더라면, 또 엘도라도에서 가지고 온 양들을 모두 잃지 않았더라면 자네는 여기서 설탕에 절인 레몬과 피스타치오를 먹지 못했을 거 아닌가." (p200)


캉디드의 스승인 팡글로스는 여전히 신념을 버릴 수 없나 보다. 그러나 캉디드는 이젠 신념만 강조하는 인물이 아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사과나무를 심을 줄 아는 인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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