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전여전(父傳女傳) -노적성해-
우리 가족은 주말마다 교외로 자주 여행을 다닌다. 주로 여행을 추진하고 실행에 옮기는 사람은 남편이다. 나는 사부자기 (힘들이지 아니하고 가만히.) 있으면 된다. 여름에는 주로 ‘야영’을 다니고, 봄, 가을에는 ‘체험학습’ 위주로 다닌다. 그리고 작년부터는 용감하게 가족끼리 해외로 ‘자유여행’을 다녔다. 이렇게 말하면 결기(못마땅한 것을 참지 못하고 성을 내거나, 딱 잘라 행동하는 성미.)가 있으신 분들은 나를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재수’없는 인간으로 생각하실 수 있겠다. 하지만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조금만 참고 끝까지 들어보셨으면 한다.
사실 나는 이런 삶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다. 나의 어린 시절을 색깔로 표현한다면 ‘짙은 회색’이다. 어렸을 적 우리 집은 가난하고, 무언가 ‘펑’하고 터질 것 같은 극도의 긴장감이 가득 차 있었다. 나의 부모님은 참 많이도 싸우셨다. 싸움의 원인은 ‘돈’ 이었지만, 두 분의 성격이 너무 판이하게 다른 것이 가장 큰 원인이였다.
아버지의 강다짐(까닭 없이 남을 억누르고 꾸짖는 것)은 세 딸들에게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차곡 차곡 쌓이게 했다. 항상 ‘화’를 불같이 내기만 하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어떻게 사랑을 표현해야 할지 모르는 분 같았다.
내가 성인이 되기 전에 가족끼리 간 유일한 여행지는 ‘몽산포’였다. 엄마의 부유한 고등학교 동창들과 가족 단위로 같이 갔으며, 내 나이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엄마는 잘 사는 친구들에게 어려운 모습을 보이기 싫었는지 무리해서 ‘피서’를 준비했다. ‘텐트’도 빌리고 ‘음식’도 많이 준비하셨다. 몽산포에서 지낸 2박 3일 동안 바닷물이 노랗고 지저분한 것 빼고 나쁜 기억은 없었다. 글을 쓰는 이 순간, 코펠에다 밥과 반찬을 덜어 먹고, 텐트 안에서 가족끼리 잤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이때만큼은 우리 가족도 행복했던 것 같다. 아빠도 다른 아빠들처럼 그곳에서는 화도 안 내고 우리한테 친절하게 대해 주셨다.
내가 사춘기가 된 이후로는 아버지와의 갈등은 더 심해졌다. 아버지가 혈기 부리면 예전에는 무서워서 울었지만, 나이가 들면서 당당하게 대들었다. 불행히도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언니와 동생도 그렇게 했다. 그렇게 우리는 아버지를 미워하다가 하나 둘 결혼해서 지긋지긋한 회색 집을 떠났다. 어쩌다 친정에 오더라도 우리는 아버지에게 냉갈령(몹시 매정하고 쌀쌀한 태도)하게 행동했다.
“불행함을 느끼면서 도피하기 위해 새로운 나라로 줄행랑치는 것은 아니겠지.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을까? 자기 마음속에 맺힌 원한이 있는데 바깥세상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 -비자야 판디트, 「잊을 수 없는 충고」, 이어령 편저, 『휴일의 에세이』 〔제2판〕(문학사상사,2003),20쪽.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마음에 대충 덮어놓고 ‘새로운 나라’로 왔지만 전혀 행복하지가 않았다. 결혼생활이 힘들 때마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은 자꾸만 내 마음속에 ‘쓴뿌리’가 되어 나를 옭아매고 있었다. 나는 내가 꾸리는 가정은 ‘100%’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 내가 그토록 싫어했던 아버지가 혈기를 부리던 모습이 나에게도 있었다. 어느 순간 나는 ‘남편’과 ‘자식’들에게 끊임없이 화를 내고 독설을 매일 날리고 있었다.
나름 종교생활을 열심히 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아버지를 마음속에서 용서했노라고 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에 대한 원망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순간에 내 삶을 지배하고 있었다.
작년 5월에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지셔서 ‘뇌경색’ 판정을 받으셨다. 하루아침에 하반신 마비의 중증 장애인이 되셨고 ‘혈관성 치매’ 증상도 오셨다. 아버지가 병원생활을 하기에 집에서 아버지 짐을 정리하다 수첩 5권을 발견했다. 5년 전부터 하루의 일과를 기록하신 ‘다이어리’였다. 그것을 동생과 같이 보다가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항상 우리에게 손톱만큼의 정도 없다고 생각했던 아버지였는데, 수첩 속에는 자신만의 언어로 최선을 다해 딸들에 대한 애정을 표현해 놓으셨다. 짝사랑을 하는 사람처럼, 유치원 딸아이를 양육하는 아버지처럼 우리의 일상을 소소하게 기록해 놓으셨다.
본인이 早失父母하여 사랑을 받지 못해서였을까? 아버지는 우리에 대한 애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시고 쓰러지셨다. 건강하실 때 좀 더 일찍 이런 마음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 사건 이후로 내 마음속에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많이 녹아 없어져 버렸다. 그저 아버지의 진심을 늦게라도 알게 된 것이 하늘의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제는 아버지의 손도 잡으며 진심으로 쾌유를 비는 말도 한다.
두 딸들에게 매우 곰살맞게 대하는 남편을 볼 때, 예전에는 우리 아버지와 비교가 되어서 마음이 불편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자연스레 나도 우리 아버지를 떠올린다. 아버지가 표현을 하지 못했을 뿐이지 우리를 사랑했던 것이 확실하니까. 그리고 나의 과거 기억을 다시 색칠하고 있다. 부모님의 불화로 온통 ‘회색’이었던 곳을 수줍게나마 조금씩 ‘색’을 입히고 있다.
(-이 글은 10여 년 전에 대학원 숙제로 쓴 글입니다.^^ 순수 한글을 집어넣어서 짓는 수필이었어요, 한글에 대한 부연 설명은 괄호 안에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