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채물감 May 03. 2020

내 안의 나를 꺼내는 일

- 새로운 시작

암호를 잊어버렸다. 무슨 대단한 비밀문서도 아니고, 어쩌다 두어번 쓴 일기 파일의 암호를 잊어버렸다. 누구도 손대지 않을 유에스비, 누구도 열어보지 않을 문서에, 혹여 남편이나 딸들이 급히 유에스비를 찾아서 이걸 써야 할 수도 있으리라는 희박한 가능성을 염려하여, 나는 어쩌다 쓴 일기에 암호를 걸어놓았었다. 한달여가 지나고 새로 이어 쓰고자 문서를 열어보려 하는 지금, 나는 암호가 뭔지 모르겠다. 인터넷 쇼핑 사이트도 늘 같은 아이디와 암호를 사용하던 나, 두 번째 일기를 쓰고 나서 보안 등급을 올려야겠다는 쓸데없는 마음을 먹었다. 그렇더라도 항상 사용하던 비번을 조금 더 확장한 그 언저리에서 바꾸었을 것이다. 허나, 지금 전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 때로 돌아가서 어떻게 바꿔 써볼까 상상하면서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도무지 맞지를 않는다.


암호를 바꾸던 날 나도 모르게 다시는 이 파일을 열어볼 수 없게 하려 했던 것일까. 무의식이 행동을 결정할 때가 있다. 그 동안 일기를 좀 써보자 마음먹고 노트에 몇 자 끄적였다가, 얼마 후 다시 일기를 꺼내 보고는 스스로 몹시 민망하여 찢어버리고 흔적을 지운 적이 여러 번이다. 내 속의 나를 들여다보는 일이 왠지 모르게 불편하고 부끄러웠다. 펜으로 노트에 적지 않고 컴퓨터 자판을 두드린 후 저장하면서 어쩌면 다시는 이것을 읽을 수 없도록 봉인해 버리려 했는지 모른다. 새로운 암호를 입력하던 순간 나는 다음에 이 암호를 기억해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던 것 같다. 그럼에도 그리했던 것은 다시 열어보지 못하더라도 괜찮다는, 아니 다시 열어볼 수 없게 해버려야겠다는 의지의 실천이었나 보다. 파일 속성을 보니 만든 날짜 3월11일, 수정한 날짜 4월1일이다. 두 번째 혹은 세 번째 쓰던 날 나는 아마도 암호를 바꾸고 잊어버리는 방법으로 일기를 찢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27일 만에 내가 다시 뭔가를 쓰려 했던 것은, 어느덧 시간이 많이 흘러버린 탓이다. 병가를 모두 소진하고 질병휴직에 들어갔다. 코로나19로 아이들은 개학이 연기되고 온라인개학 상태이다. 매일 세 끼 아이들의 식사를 챙기고, 책을 읽고, TV를 보고, 가끔 공원에 나가 산책을 한다. 끼니마다 무얼 먹을지 고민할 때마다 학교급식의 소중함은 절실하고, 어서 아이들이 개학을 하고 나는 어디든 돌아다녔으면 좋겠다. 휴직을 계획할 때는 결코 이런 생활을 바란 게 아니었다. 아이들이 등교를 하고 나면 나도 후딱 집안 정리를 끝내고  뭔가를 배우러 가고 나들이를 하러 나가고, 비행기 타고 유럽이나 남미여행을 가는 상상을 했다. 그러나 온 세상을 바꾼 코로나19가 미천한 나의 계획을 바꾸지 못할까. 아이들의 끼니를 챙기고, 사회적거리두기를 실천하기 위한 몸부림만 있다. 코만 살짝 막혀도 긴장이 되고, 아이가 기침 한번만 해도 이마에 손을 얹어본다.

그러다 오늘 고등학교 2학년인 첫째 아이가 점심을 먹고 나더니 독서실을 가겠다며 집을 나섰다. 이곳은 코로나 청정지역에 가깝지만 언제 어떤 경로로 감염될지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 탓에 아이들에게 밀폐된 공간은 가지 못하도록 하였었다. 그러면서 학원은 보냈다. 첫째는 학원 가는 것과 다를 바 없다며, 집에서는 집중이 되지 않으니 독서실을 다니겠다 선언하였다. 틀린 말이 아니다. 충분히 띄엄띄엄 앉을 정도의 상황이 되면 다녀오고 절대 마스크를 벗지 말라 당부하여 보냈다. 저녁 7시에 돌아온 아이는 만족스런 얼굴이다. 진작에 갈 걸 그랬다며 내일부터는 학교 온라인 출석체크를 하고 나면 아침부터 독서실을 가서 온라인수업도 듣고 공부도 하겠다고 한다. 진학과 진로에 대한 불안감을 늘상 표현하는 아이, 더 이상은 안되겠었나 보다. 엄마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갑상선 수술을 하고 다시는 쉴 기회가 없으리라는 생각에 몇달간의 휴직을 선택했으나, 코로나19에 덮쳐 그저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수술 전부터 외출을 싫어하고 주말에도 꼭 필요한 가사노동 외에는 소파에 가만히 앉아 TV나 스마트폰만 쳐다보는 것이 일상이 된 지가 한참이다. 그 무기력은 갑상선암 때문이었나보다 하고 과거를 포장해보고 싶다. 그러나 수술을 하고 어느덧 두달이 훌쩍 지났지만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목에 선명하게 그어진 수술 자국, 아직 상처 부위에 미미하게 남은 통증이 그나마 나는 쉬기 위해 이러고 있는 거라는 위안을 준다. 책을 보다가, 잠이 들었다가, 드라마를 보다가, 스마트폰을 보다가 한량이 따로 없다. 진정한 요양으로 봐야 할까. 이제 뭔가를 시작할 때가 된 것 같다. 문득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이란 걸 제대로 써본 적이 없어 막연함이 없지 않지만, 외부활동도 여행도 어려운 요즘같은 시기는 글쓰기를 시작하기 좋은 기회이다. 그 시작은 내 생각과 마음을 끄적여보는 것부터였고, 이전의 내 마음을 다시 들여다보려 하였으나 암호를 잊어버린 탓에 그것은 실패하였지만, 다시 또 시작하면 된다. 언제나 시작은 반이다.


며칠 전부터 피아노를 좀 뚱땅거려보았다. 배워본 적이 없는 피아노, 둘째아이 옆구리를 찔러 한 곡을 배워봤다. 짐노페디, 드라마나 애니매이션에서 가끔 나오는 이 음악이 왠지 어렵지 않을 거 같았다. 아이가 초등학교때 보던 어린이 피아노 교본의 짐노페디는 왼손이 단 두 손가락만 움직이면 된다. 게다가 여덟 마디만 외우면 계속 반복이다. 참 잘 골랐다. 처음엔 양손을 따로 움직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10분 정도 치고 나면 금새 손가락이 아파왔다. 그렇게 하루에 몇 번씩 연습을 하였더니, 어쩜 그래도 흉내가 내졌다. 아이들이 잘했다고 박수까지 쳐주니 흥이 절로 났다. 3일 만에 짐노페디를 막히지 않고 치고 기쁜 마음에 핸드폰으로 녹음까지 했다. 친구에게 녹음한 것을 들려주고 자랑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그러나 다음 미션 ‘요술공주 밍키’는 생각보다 많이 어렵다. 4마디 한 줄 치는 데 며칠 걸렸는지 모르겠다. 그 다음 진도가 안나가서 낙심할 때마다 짐노페디를 연주하며 위안을 얻어야했다. 나의 스승 둘째아이가 체르니부터 하자고 하니, 스승님 말씀을 들어야 하나 보다. 밍키도 매일 연습하다 보면 언젠가는 한 곡을 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유명한 작가나 교수들도 그 좋은 글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고 들었다. 매일매일 조금씩이라도 글을 쓰고 훈련을 하였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나의 작은 시작은 매일 이렇게 일상을 적어나가는 것으로 하려 한다. 내 속의 나를 꺼내는 일이 어색하고 부끄럽지만 나 자신을 마주하지 않고는 더 이상 즐겁지도 행복하지도 않을 것만 같은 이유에서다. 이렇게 조금씩 나를 끄집어내다 보면 내 인생이 조금 달라질지 모른다. 또 어쩌면 좋은 글을 쓰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복권을 산 것 마냥 근거없는 희망으로 미소가 지어진다. 당첨될 때까지 복권을 사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