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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스 May 08. 2023

빗속에서 춤을 추면

로마의 포르테 프레네스티노(Forte Prenestino)에 다녀왔다. 강한 요새를 뜻하는 이 공간은 이탈리아에서 CSOA(Centro Sociale Occupato Autogestito)라고 불리는 소셜센터이다. 과거에 군사요새로 쓰이다 방치되었는데, 1986년 시민들에 의해 점거되어 그때부터는 시민들이 자체적으로 운영하고 관리하는 공동체 공간이 되었다. 반파시즘, 반성차별주의, 반인종차별주의의 원칙을 앞세우며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행사를 꾸준히 실험해 왔다.


노동절을 기념하는 포르테의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 친구들과 장장 9시간의 버스여행을 감행했다. 운 좋게도 우리에게 지정된 좌석은 맨 앞자리. 눈앞에 펼쳐지는 탁 트인 풍경 덕분에 즐겁게 갈 수 있었다.


구글 이미지로 예상해 본 포르테는 크지 않았는데, 듬직하게 자리 잡은 입구를 지나 터널을 통과하니 새로운 세상이었다. 크고 작은 통로에 여러 공간이 켜켜이 숨어있었다. 과연 요새로 지어진 공간 같았다.


멀리서 들리는 소리를 추적하다 보니 우리는 '레게 숲'에 도착해 있었다. 친구가 챙겨 온 반짝이는 스티커를 눈가에 붙이고 음악에 맞춰 몸을 아무렇게나 움직였다. 오른쪽에 있던 친구는 미소를 잔뜩 머금은 채 팔과 손가락을 유연하게 흔들었고, 맞은편에 있던 친구는 두 눈을 꼭 감고 빙빙 돌았다. 같은 음악 아래 다양한 몸짓이 존재했다.


눈을 뜨면 춤을 추는 사람들, 눈을 감으면 귀를 가득 채우는 레게 음악. 진한 녹음에 둘러싸여 맥주 한 병을 돌려 마시니 곧바로 여름이었다.


날씨는 점점 흐려지는데 아무도 걱정하지 않았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을 때 오히려 더 들떠버렸다. 우리는 테크노음악이 흐르는 벌판으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 거세게 들이붓기 시작했다. 어느새 우리는 진흙탕에서 춤을 추고 있었고 신발은 흥건히 젖어버렸다. 그 와중에 실수로 진흙 웅덩이에 빠진 나는 엉망이 된 바지를 가리키며 반쯤 우는 얼굴로 친구를 바라보았다. 곧바로 웃으며 "너 자유로워 보여! 지금 이 순간과 너무 어울리는데?"라고 호탕하게 대답하는 친구.


듣고 보니 정말 자유로운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앞머리가 쩍쩍 갈라지고 선크림이 전부 지워져 못생겨져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나에게 주어진 임무는 오직 그 순간을 끝내주게 즐겨주는 것. 현재만 있던 순간, 어떻게 되든 좋은 순간. 오히려 좋아, 이런 말이 절로 나왔다.


찰나의 자유로움이라는 것을 안다. 멈추지 못하는 춤을 춰야 한다면 곤욕일 것이다. 그러나 가끔씩은 이렇게 내리는 비를 맞겠다고 결심하고 그 속에서 제멋대로 춤을 추고 싶다. 튼튼한 벽으로 안전하게 지켜줄 나만의 요새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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