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는 언제까지 퓰리처 상을 시상할 것인가.

오스카는 체험하지 않는다: 아카데미 작품상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by 주노트
포스터.jpg 위대한 예술가가 대단한 기자가 되었을 때, 오스카는 비로소 박수를 보냈다.

최근 몇 년간의 오스카 작품상 명단은 이 시대의 사회적 병폐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주는 르포르타주의 목록이었다. 오스카는 얼마나 세련된 문체로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지에 집중했고, 영화계는 여기에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내가 사랑한 영화는 이러한 매개체가 아니었다.

생애 첫 영화관에서 만난 <타이타닉>이 주었던 충격은 계급의 반항을 논의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을 바라보고 놓아주는 숭고한 과정을 심미적이고 감각적으로 구현했기에 경탄했다. 그 다음 영화관에서 <식스센스>를 통해 소외 계층에 대한 고발이 아닌, 가족에 대한 사랑을 서스펜스라는 장치를 통해 보여줄 수 있다는 사실에 매료되었다. 나는 영화만이 줄 수 있는 표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영화를 사랑하게 되었다.

최근 오스카의 선택은 이러한 예술적 체험에 집중하지 않았다. <기생충>은 사회적 계층구조를 세밀하게 해부했고, <노마드랜드>는 잊힌 집단의 존재를 리포트했다. 이제 오스카의 심사위원단은 과거 유명 기자들이 보여주었던 세련된 작문실력을 평가하는 편집국장이 되어 있었다.

폴 토마스 앤더슨의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One battle after another)>의 등장은 이러한 오스카의 행보에 일침을 줄 것이라 기대했다. 나는 다시 한 번 영화가 주는 충격을 받기 위해 아무것도 알아보지 않고 영화관을 찾았다. 하지만 내 기대는 보기 좋게 빗나갔고, 오스카는 폴 토마스 앤더슨이라는 미학의 마지막 보루마저 무너뜨렸다.


그렇다고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영화적 표현이 별로인 것은 아니다. 3시간에 가까운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높은 몰입도를 유지할 수 있으며, 속도감은 인상적이었다. 문제는 3시간 동안 우리가 본 장면이 영화적 화려함인지, 저널 표지를 장식한 폭파장면인지에 있다.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예술적 심상이 아닌, 자극적 전개였다. 장면 속 인물의 내면을 느끼기보다 그것들이 사회적으로 무엇을 비유하고 있는지를 찾는 일에 몰입하는 순간, 관객은 자극적 저널리즘에 매료될 뿐이다.

폴 토마스 앤더슨이라는 감독의 영화가 어려운 이유, 아니 흔히들 말하는 어려운 영화를 사람들이 그렇게 느끼는 이유에는 의도된 불친절함이 있다. 폴 토마스 앤더슨의 영화에서 자주 보이는 롱테이크는 이러한 불친절함의 백미이다. 할리우드 영화임에도 인물이나 상황을 조각내지 않고 긴 장면을 그대로 보여주며 관객이 몰입하고 감각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돕는다.

하지만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플롯은 숨 쉴 틈이 없다. 영화의 첫 장면인 퍼피디아 베벌리 힐스(테야나 테일러)가 다리 위에서 이주민 수용소를 바라보는 신에서 조용한 긴장감을 느끼며 기대감을 끌어올리기에 충분했지만 이내 그 장면이 프렌치75라는 집단의 '혁명'활동을 설명하는 역할 외에 다른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었다. 그 이후 전개되는 밥 퍼거슨(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및 록조(숀 펜)와의 만남, 각 등장인물 간의 대립, 위기상황의 발발 등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그 과정에서 팽팽한 긴장감을 주지만 감각적인 심상을 느끼기엔 조급했다.

또한, 각 장면이 충분한 논리적 개연성을 부여받으며 감독이 의도하는 방향대로 감상하고 해석하게 되는 '친절한' 영화로서의 요소를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이 영화는 도도한 예술가보다 상냥한 도슨트를 고용했다.

프렌치75라는 집단이 이주민 자유활동을 지지한다는 점, 그들이 테러리스트 성격의 활동을 지속한다는 점, 크리스마스 탐험가 클럽이 백인우월주의 성격의 자본가 클럽이라는 점 등 영화를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시놉시스는 이미 그들이 무엇을 의미하고, 감독이 이를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관해 친절한 주석을 달아준다.

조니 그린우드의 음악은 이 조급한 플롯의 뛰어난 조력자였다. 이 영화의 극적인 전개와 깊은 몰입감의 배경엔 조니 그린우드의 음악이 있었다. 밥 퍼거슨이라는 인물의 인스케이프가 반항적 인물에서 사회적 인물로, 진지한 인물에서 코미디적 인물로 변모하며 영화의 메시지를 다양한 형태로 운반하고 있다. 음악은 이 극단적인 호흡 속에서 관객이 길을 잃지 않고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도록 했다. 애석하게도 이 조력자는 메시지 전달자로서의 역할마저 충실히 수행했다. 실력 있는 음악가의 음악이 사회적 구호로 사용된 셈이다. 스크린 위에서 친절함은 덕목이 될 수 없다. 길을 잃지 않기 위한 표지판은 다양한 풍경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한다.


포스터_2.jpg 자극적 르포르타주, 친절한 주석으로서의 미장센

이 영화의 거시적 구도는 프렌치75의 '혁명' 운동과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의 백인우월주의 활동이다. 독특한 것은 이 두 조직 간의 직접적인 대결 구도는 없고, 오히려 서로를 신경 쓰고 있지 않는다는 점이다. 각 단체는 자신의 이념에 매몰되어 있고, 그 이념의 선전에 집중하고 있다. 오히려 미시적인 관점에서 프렌치75 활동을 그만둔 밥 퍼거슨 및 그의 딸 윌라 퍼거슨(체이스 인피니티)과 크리스마스 탐험가 클럽에 가입을 희망하는 록조라는 집단 외부 인물의 대립이 이 영화의 주요 대립 구도이다. 이는 영화가 과거의 유산이 된 혁명과 그 이후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함과 동시에 이념의 수호를 담당하는 정치인 및 자본가 계층보다 그들의 추종자들이 훨씬 위협적이고 공격적이라는 내용을 담는다.

프렌치 75의 활동이 이주민 자유 활동에 직접적으로 묘사되어 있다는 점은 그들이 사회적 소수자를 위한 집단임을 적극적으로 암시하는 부분이다. 다만, 그들이 폭력적이고 메시지가 정확하지 않다는 점은 특정 대상을 암시한다기보다 적극적이고 투쟁적이던 시대의 반항아들을 그려냈다고 본다. 베벌리힐스가 밥 퍼거슨과 함께 폭발물을 설치한 장소에서 자극적 행위를 하고자 하는 장면은 그들의 행위가 자극적인 것에 매몰되어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또한, 록조가 프렌치75의 활동을 사전에 인지하고 베벌리힐스를 협박하는 장면과 오히려 '당하는' 형태의 일반적이지 않은 성적 취향을 드러내는 장면을 대조적으로 나열하며 기득권과 남성 우월주의를 풍자적으로 묘사한다. 베벌리힐스가 임신한 상태에서 사격하고 술을 마시는 장면이나 출산 이후 본인의 딸에게 질투를 느끼고 결국 '혁명' 활동을 재개하는 부분에서 그들의 활동이 이념적이기보다 개인적인 것에 가깝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밥 퍼거슨이라는 캐릭터의 내재적 형상이 베벌리힐스와는 다르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딸인 윌라 퍼거슨을 키우는 밥 퍼거슨이 딸을 단속하고 마약과 술에 찌들어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과 그의 행색을 통해 그가 현실 도피적 히피문화나 혁명 이후 사회에 흡수한 과거의 유산이라는 점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암구호를 잊어버리고, 옥상에서 떨어지고, 길을 잃는 등 딸을 구하는 그의 활동이 순탄하지 않다는 건 과거의 혁명 세대의 사회 흡수 혹은 길을 잃은 해산이 현재 이어지는 혁명과 단절되어 있다는 것을 풍자적으로 드러낸다. 디카프리오의 코미디 연기는 이러한 풍자를 세련되게 포장한다.


이 영화가 소설 <Vineland>를 영화화한 작품이기에 60년대 급진적 체제 전복 운동을 그리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지만, 현대적인 해석이라는 점에서 그 이후 반 체제 활동과 2011년 'TIME'지가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던 'Protester'일 수도 있다. 정확하지 않은 메시지는 그들을 해산하기보다 오히려 강력한 유인이 된다는 점에서도 60년대 반 체제 운동의 목표 상실이 해산의 직접적인 계기였다는 점과는 달리, 불분명한 메시지로 인해 오히려 대중으로 확대되었던 현대적인 기득권 반대 운동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는 크리스마스 탐험가 클럽이 백인 남성 우월주의 집단임과 동시에 비밀스러운 정치 혹은 자본가 집단이라는 설정이 현 정부와 보수주의 성향의 추종자들을 가리키고 있다는 해석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는 점에서도 근거를 찾을 수 있다. 과거의 유산으로 시작한 이야기지만 결국 현재 진행 중인 상황에 관한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영화가 'One battle after another'인 것이다.

이러한 해석을 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지금 'X'를 켜면 영화에서의 갈등을 텍스트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해석이라 하기 민망한 직접적인 묘사는 문학적인 글이라기 보다 설명문에 가깝다는 평가를 하게 한다. 관객 앞에 감각이 아닌 지식이라는 허들을 두고 이를 풀어내는 탐정 역할을 부여한 것은 오스카의 지적 허영심을 채워주기에 충분했다.


사회 비판적 시선을 담은 영화는 물론 필요하다. 나는 '켄 로치'감독도 상당히 좋아한다. 내가 걱정하는 건 오스카를 포함한 영화계 주류가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 '어떻게 보여주고, 무엇을 느끼게 할까'를 고민한 영화계는 이제 '무엇을 보여주고, 어떻게 비유할까'를 고민하고 있다. 영화계가 영화적 표현을 중시하던 풍조를 스스로 버리게 되면 젊은 예술가의 실험적 작품활동 의지와 영화적 체험을 기다리는 관객의 기대를 모두 꺾어버리는 처사다.

현대 영화 관객이 스크린에서 모니터로 이동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다. 모니터 속에선 과거의 직관적 체험보다 유희와 해석이 중요한 것도 분명하다. 하지만 스크린에서마저 모니터의 문법을 따르기 시작하면 여전히 스크린을 찾는 관객을 기만하는 행위이다. '영화관'에선 '영화'를 상영해야 한다. 그것이 영화관을 유지하는 핵심이다.

나는 여전히 영화의 예고편을 보며 뉴스의 헤드라인이 주는 건조한 명사형 어미보다 과거 스크린에서 느낀 추상적인 형용사를 떠올리길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