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페 디엠'은 '오늘을 즐겨라'라고 말하지 않는다

<죽은 시인의 사회> 속 '카르페 디엠'과 오역을 생산하는 시스템의 함정

by 주노트
※ 이 글은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주요 결말과 반전 등 핵심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POSTER.jpg 우리는 '카르페 디엠'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을까?

"Lost in translation"

번역 과정에서 상실되는 뉘앙스나 의미를 뜻하는 이 말은, 번역의 실패를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하는 변명이다. 각본가가 단어 하나를 고르기 위해 밤낮으로 고심한 흔적은, 게으른 노력과 편리한 번역에 의해 관객에게 전달되지 못한 채 폐기된다.

2018년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의 개봉은 우리에게 두 가지 충격을 주었다. 하나는 높은 영화적 가치를 지닌 히어로물의 등장이고, 다른 하나는 무능한 번역가 한 명이 수억 달러짜리 영화의 영혼을 얼마나 손쉽게 난도질할 수 있는가 하는 공포였다. 각본이라는 정교한 설계도를 쥐여줬더니, 번역이라는 시공사가 제멋대로 재료를 아껴 부실 공사를 강행한 셈이다. 결국 관객은 영화라는 건물이 무너지는 현장에서 속절없이 사고를 당하게 되었다.

이러한 오역이 가장 잔인하게 자행된 사례가 바로 <죽은 시인의 사회>의 'Carpe diem'일 것이다.

<죽은 시인의 사회>의 핵심 주제를 관통하는 이 대사를 "오늘을 즐겨라"라고 번역하고 있다. 극 중 '키팅 선생'은 학생들에게 하루하루를 '즐기며' 살아가라고 말하고 싶었을까?

dead_poets_society_2.jpg 번역에 따르면, 학생들에게 '즐기라'고 가르치는 키팅 선생

이 대사가 처음 등장하는 신은 새롭게 부임한 영문학 선생인 '존 키팅'이 '로버트 헤릭'의 시 을 가르치는 장면이다. 시의 첫 행인 "Gather ye rose-buds while ye may(할 수 있는 동안, 장미 봉오리를 수확하라)"를 설명하기 위해 라틴어 문구인 "Carpe diem"을 언급한다. 이어서 키팅은 이 문구를 "Seize the day"로 번역한다. 여기서 'Seize'는 꽉 붙잡아서 손에 가두고 놓지 않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Seize the day"는 '그날(하루하루)을 꽉 붙잡아두고 놓지 말라'는 말이다. 좀 더 줄여보자면 '그날(오늘)에 충실해라'로 해석해야 한다. 꽃을 수확하기 위해선 꽃을 꺾어 내 손으로 가져오는 물리적 행위를 동반한다. 키팅이 'Seize'를 선택했다는 것은 이러한 능동적 행위를 내포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처절한 능동적 행위를 우리는 가볍게 감상해야 했다. 이는 스크린을 찾은 관객을 넘어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까지 영화가 전달하는 메시지를 왜곡시켰다. 영화의 영향력이 오역의 영향력으로 바뀌어 버린 셈이다.

이러한 의미는 그 신의 마지막을 보면 더욱 확실해진다. "Carpe diem. Seize the day. Make your lives extraordinary." 직역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너의 삶을 평범하지 않게(특별하게) 만들어라."

'특별한 삶'을 '즐기기' 위한 유희로 해석하게 되면, 키팅 선생은 학생들의 일탈을 선동한 것이 되고,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동아리는 일탈의 결과물이 된다. 1시간이 넘도록 키팅 선생의 가르침을 듣고 웰튼 아카데미 교장의 손을 들어주게 되는 것이다.


호라티우스의 시에 나오는 이 문구는 실제로 'Enjoy the day'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한정적인 번역에 가깝다. '카르페 디엠'이 나오는 문장을 보자면, "carpe diem, minimum credula postero", "Seize the day, trusting as little as possible in the future.", "오늘에 충실해라, 내일을 가능한 한 적게 믿어라."이다. 내일의 불확실성에 의존하지 말고, 오늘을 충분히 활용하라는 뜻이다. 오늘을 즐기면 오히려 내일의 불확실성에 의존하는 결과가 생기게 된다. 이것은 호라티우스가 하고자 하는 말이 아니다.

이 시에 영향을 준 에피쿠로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말로 '쾌락주의'로 번역하고 있지만, 이것은 오히려 에피쿠로스를 잘못 이해하게 하는 번역에 가깝다. 에피쿠로스는 쾌락을 유지하기 위해 쾌락을 방해하는 요소를 줄이고자 노력한다. 대표적으로 '고통', '욕망', '불안' 등을 절제하여 현재의 안정과 행복을 추구하고자 한다. 이러한 철학은 쾌락으로 방탕한 생활을 하자는 것이 아닌, 오히려 금욕적이고 단순한 생활을 통해 유지 가능한 행복을 찾고자 노력한 것에 가깝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오늘'은 즐겁게 놀고 넘어가는 날이 아닌, 장기적 행복이 유지되는 삶의 일환으로 보는 것이 맞다.

만약 '쾌락주의'를 보고 빵과 물이 아닌 포도주와 고기 안주를 떠올렸다면, '카르페 디엠'까지 갈 것도 없이 이미 번역에 의해 놀아나고 있는 것이다.

dead_poets_society_1.jpg 꺼져가는 젊은 생명력에 주사한 열정이라는 처절한 사투

어떤 사람들은 '즐기다'의 의미를 폭넓게 생각하여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 번역은 각본이 전달하고자 하는 것을 얼마나 충실히 전달했는지가 가장 중요하다. 자막을 보고 실제 각본이 주는 것 이상의 해석이 필요해진다면 관객은 번역에 의해 더 먼 곳으로 이동하여 제대로 영화를 볼 수 없고, 그 의미를 사유할 수 없게 된다. 실제 의미를 따져보지 않더라도 영화를 보면 더 분명한 이해가 가능하다.

엄격한 집안에서 의사라는 정해진 직업을 강요받던 '닐 페리'는 연기를 향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그는 이러한 열정을 증명하기 위해 훌륭한 연기를 펼쳤으나 이는 그를 더욱 압박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고, 그가 느낀 상실감은 그를 죽음으로 몰았다.

'Carpe diem'을 '오늘을 즐겨라'로 해석하게 되면, '닐 페리'라는 인물은 '즐기지' 못해 죽음을 택하는 도파민 중독의 어리석은 인물로 그려지게 된다. '닐 페리'에게 연극은 즐기기 위한 도구였을까? 우리는 영화가 주지 않는 이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즐기다'의 가벼움과 '죽음'의 무거움 사이에서 수많은 혼동과 재해석을 해야 하는 불편함이 발생한다. '닐 페리'에게 연극은 삶에 숨통을 틔우는 산소호흡기였다. 무대 위에서 그의 미소는 '즐거움'보다 의식을 잃어가던 중에 에피네프린을 맞은 환자가 눈을 뜬 것과 같았다.

물론 산업 구조상 번역가의 활동에 많은 제약이 있다는 사실은 익히 들어 알고 있다. 하지만 시스템의 열악함이 결과물의 부실함을 정당화하는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결국 부실한 건축물은 매몰된 피해자를 낳을 뿐이다. 번역 때문에 영화를 온전히 즐기지 못하거나, 번역을 걱정하며 관람을 망설인다면, 이는 영화를 제작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방향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고전부터 현대 작품에 이르기까지 번역과 관련한 논란은 끊이지 않고 있다. 수많은 OTT와 배급사들이 미완의 번역을 들고 퍼나르기를 할 때, 관객은 크레딧에 보이지도 않는 번역가를 향해 원망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영화의 번역은 영어보다 영화를 탐구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번역가도 사람이기에 자신만의 감상과 해석이 존재할 수 있다. 그렇기에 번역은 최대한 직역해야 하고, 직역으로 그 의도가 전달되지 않는 경우 번역이 영화의 질감을 살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것은 번역가 한 사람의 노력으로 해결될 수 없기에 영화를 유통하는 주체들이 진정 영화를 '즐기는' 사람들이라면 관객이 영화를 '수확'할 수 있도록 노력을 보여줘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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