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고니아가 박제한 울분.. 분해한 오스카의 지적 허영심

지구를 지켜라의 심장을 도려낸 란티모스의 메스, 할리우드의 우아한 폭력

by 주노트

※이 글은 <부고니아>와 <지구를 지켜라!>의 결말과 주요 반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Bugonia_POSTER.jpg <지구를 지켜라!>의 울분을 박제하고 얻어낸 제98회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

할리우드가 장준환 감독의 한국 영화 <지구를 지켜라!>의 리메이크를 한다는 소식은 걱정보단 기대를 갖게 했다. 좋은 플롯을 가지고 있음에도 관객이 이를 제대로 느끼지 못하게 한 투박한 연출을 교정하고 원작의 매력을 대중적으로 확장할 수 있는 합리적인 대안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봉한 란티모스의 <부고니아>는 원작의 진화를 기대한 관객을 완벽히 배신했다. 원작과 전혀 다른 주제를 같은 플롯에 얹어 전달하는 동안 란티모스의 예리함은 오히려 원작의 각본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 투박한 연출이 그리워지게 되었다. 장준환의 '망치'를 란티모스가 예리하게 깎아 송곳마저 박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아마 원작을 모르고 봤다면 그저 란티모스에게 실망한 정도로 끝났겠지만, 원작의 생명력을 기대한 관객의 입장에서 란티모스도 할리우드의 일부라는 것을 확인하게 한 셈이다. 이것은 '리메이크'가 가진 함정이자 시스템적 한계이기도 하지만 할리우드와 란티모스의 최근 영화가 어디에 초점을 두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원작의 '망치'가 주었던 강렬한 체험이 란티모스의 세공을 거쳐 어떻게 차갑게 전시되었는지 각 작품을 통해 해부해 본다.


가벼운 껍데기를 찢어버린 묵직한 플롯


'코미디'라는 그릇은 영화를 담기엔 가벼웠다

<지구를 지켜라!>는 정체성의 혼란이 홍보의 실패를 넘어 작품 자체의 치명적 약점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KOBIS(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에 여전히 코미디로 분류된 이 영화는, 장르적 유희를 기대한 관객에게 개연성 없는 슬랩스틱과 부조화스러운 엔딩을 던지며 흥행 참패라는 성적표를 받아 들었다. 하지만 이 영화가 재평가된 데에는 유치한 껍데기 아래 할리우드조차 탐낼 만한 정교한 플롯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병구와 강사장의 대립은 단순 납치극이 아닌, 사회 구조적 폭력의 피해자와 가해자가 벌이는 계층 역전의 사투다. 영화는 병구의 광기를 빌려 사회 계층을 전복시키는 쾌감을 제공하다가도, 그것이 개인의 복수라고 느껴지게 하는 반전을 통해 관객에게 배신감과 혼란을 야기한다. 하지만 강사장이 실제 외계인이었다는 결말의 2차 반전은 '망상'으로 치부되는 사회적 약자의 울분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이는 단순한 반전을 넘어, 구조적 전복이 불가능한 현실 자체를 파괴하는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장준환의 둔탁한 연출은 이러한 주제를 강화하고 있다. 과장된 표현, 정제되지 않은 미장센은 누군가의 울분을 드러냄과 동시에 폭발하기 전 어지러운 상태를 보여준다. 연출의 투박함은 의도로 볼 수 있으나 결국 작품을 방해하는 자충수가 되었다.

그 둔탁함이 코미디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지나치게 전면에 드러난 코미디는 관객의 몰입을 방해하고 영화의 본질을 해친다. 코미디적 유희가 목적이 되는 순간 병구는 '상징적 행위자'가 아닌 '기괴한 웃음거리'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코미디라는 가벼운 그릇에 무거운 주제를 담은 셈이고, 그릇이 깨진 자리에 주제는 흔적을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호흡 조절의 실패 또한 몰입을 저해했다. 납치 과정은 코미디로 휘발되었고, 대립 과정은 지루하게 늘어졌다. 중반 이후의 긴박함이 발휘되기도 전에 관객은 이미 지쳐버린 상태였다. 영화를 보는 내내 적절한 호흡 조절과 절제된 코미디가 더해진다면 확실한 명작이 될 수 있으리란 생각을 하게 했다.

'리메이크'라는 단어는 원작이 고평가 된 부분은 살리고, 저평가된 부분은 보완하는 것을 기대하게 한다. 하지만 란티모스는 영화의 주제마저 바꿔버렸다. 란티모스의 '지구'는 병구가 지키고 강사장이 폭파했던 그곳이 아니었다.


란티모스의 예리함으로 박제한 약자의 울분


란티모스는 할리우드 시스템 안에서 <지구를 지켜라!>의 호흡과 장르의 일관성을 정교하게 재단하는 데는 성공했다. 특히, 특정 색을 각 시퀀스의 미장센에 활용한 것을 통해 란티모스의 미적 감각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정교함에 의해 '울분'은 증발했다. 고정된 앵글과 등장인물의 옆모습 혹은 뒷모습을 비추는 시선은 관객과 등장인물을 철저히 타자화한다. 병구의 울분에 함께했던 체험은 사라지고 테디의 기괴함을 안전한 거리에서 관람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거리두기는 란티모스 영화에서 반복되어 온 방식이지만, 그 시선이 심리적 혹은 윤리적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대상 혹은 계층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사회 피지배층은 행동의 주체가 아닌, 장식장에 박제된 나비 모형이 되었다.

Bugonia_Still_cut.jpg 테디의 '설득'을 타자 시점에서 보는 앵글

이러한 변화는 캐릭터의 본질적 차이에 의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원작의 병구는 조력자 순이에게 계획을 설명하며 진실을 공유한다. 그녀는 설득이 필요한 대상이 아니었다. 강사장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강사장이 병구와 순이를 설득하거나 선동하려 애쓴다. 하지만 <부고니아>의 테디는 다르다. 그는 끊임없이 돈과 미셸을 설득하려 애쓴다. 하지만 결국 설득은 실패하고 돈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무고한 생명의 희생은 테디를 자신의 어리석음에 자멸하는 확신의 빌런으로 만든다. 병구의 '설명'은 이미 울분에 대한 정당성이 공유된 상태임을 암시한다. 하지만 테디의 '설득'은 타인을 오염시키는 격리가 필요한 대상으로 규정한다.

설정의 변화는 더욱 잔인하다. 원작에서 병구의 어머니는 병구의 벤젠으로 죽지 않는다. 하지만 테디의 어머니는 미셸에게 속은 테디에 의해 죽는다. 맹목적 믿음이 소중한 주변인을 파괴하게 하여 그를 어리석은 사회의 불순분자로 비난하게 한다. 심지어 결말부에서 자신의 폭탄에 사망하는 연출은 주인공을 향한 조롱의 마침표를 찍는다.

원작의 백미였던 강사장의 고백 장면은 <부고니아>에서 가장 당혹스러운 공백으로 치환된다. 장준환은 이 장면에서 긴박한 호흡을 유지하며 병구의 부실한 망상에 논리적 개연성을 부여하여 관객이 '진실'의 존재를 의심하게 유도하지만, 란티모스는 미셸의 고백을 지나치게 짧고 갑작스럽게 처리함으로써 관객이 '망상'을 확신하게 되는 효과를 낳는다.

이러한 '조롱의 일관성'은 결말의 인과를 붕괴시킨다. 외계인의 실체가 밝혀지는 순간, 영화가 쌓아온 테디의 망상이 갈 곳을 잃는다. 지구의 폭발이라는 결말이 지구인의 사망으로 치환되어 있지만, 이는 원작이 가진 카타르시스를 거세하고 인위적인 메타포는 난해함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원작의 결말은 주제가 바뀐 <부고니아>에 안착할 수 없었고, 끼워 맞추기는 속이 빈 상자에 포장지를 씌웠다. 수많은 해설은 부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처절한 노력에서 기인한다. 억지로 맞춘 몽타주에 적절한 심상이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럼에도 노력한 결과는 테디를 관찰의 대상으로 삼는 것에 교집합이 생긴다. 이는 초기 란티모스의 심리적 표현이 할리우드의 지적 허영심을 채우기 위한 '해석'이라는 행위에 굴복한 결과물이기도 하다.


박제된 울분을 구출하기 위해선 장준환의 망치가 필요했다.


지난 번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에서 다뤘듯, 할리우드가 '해석하는 영화'에 집중하는 것은 흐름이 되었다. '감상'은 '해석'의 다른 말이 되었고, '박제'는 영화의 문법이 되었다. 문제는 이러한 박제의 대상이었다. 사회의 지배층이나 기득권을 박제하고 조롱했다면 이렇게까지 불쾌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장준환에 의해 위로를 받은 집단이 란티모스에 의해 조롱을 받아야 한다면 란티모스는 이러한 불쾌함을 유도했다고 읽을 수밖에 없다. 아마 <부고니아>에 원작이 없었다면 그저 타자화에 대한 미학적 불쾌감에 그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 대상이 '병구'였다는 점은 미적 우월감에 심취한 일갈이자 원작의 위로를 배신한 결과이다.

'리메이크'의 리스크가 여기에 있다. 과거 <하녀>의 리메이크를 보며 입체적 심상과 영화적 성취가 사회 계층구조의 가시화로 치환된 것에 실망한 기억이 있다. 각본가나 연출가의 창의성이 원작에 의해 제한되고, 원작의 감상은 리메이크작에 영향을 준다. 란티모스와 윌 트레이시는 높은 창의력을 보여 준 전문가들이다. 하지만 그들의 창의력이 제한을 받고, 어긋난 창의력이 원작을 훼손하는 방향으로 활용되었다면 각 영화와 그 영화의 팬 모두에게 좋은 결과일 수 없다.

<부고니아>를 보고 난 아쉬움은 <지구를 지켜라!>를 다시 보게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의 투박한 연출과 과장된 표현이 그리워지기까지했다. 과거 영화가 사회 피지배층의 울분을 토로하는 것을 성취로 보았다면, 현대 영화는 얼마나 미학적으로 진열하고 해석의 여지를 부여했는가로 기준을 삼고 있다. 이제 할리우드는 온 몸으로 느껴지는 각본보다 유려하게 꾸며진 논문에 더 큰 점수를 주고 있다. 이는 영화 관람의 대상을 소시민이 아닌 기득권, 특히 지적 허영심이 필요한 층위로 삼고 있는 것이다. 영화가 유희의 요소는 맞다. 하지만 그 유희를 이스터 에그를 찾는 보물찾기로 제한하고, 시네필을 정답을 찾는 사람으로 해석한다면 과거 충격과 전율을 주었던 영화들은 더이상 나오지 않을 것이다. 한국 영화의 할리우드 리메이크는 엄청난 뉴스였으나, 이제 이런 뉴스에 휘둘리지 않으려 한다. 란티모스는 더이상 <더 랍스터>를 만들 수 없고, 예리한 표현을 가진 <지구를 지켜라!>는 나올 수 없음을 인정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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